231206. 대림 제1주간 수요일.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나 있느냐?”(마태 15,34)
“대림시기”는 자신의 갈망과 마주하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갈망으로 목마른 이들이 예수님을 따라 산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군중이 다리 저는 이들과 눈 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 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마태 15,30)
이들은 갈망을 품고, 타인들의 손에 이끌려 산 위에 올라와 있는 이들입니다. 스스로 올라오지도 못해 이끌려와 예수님의 발치에 놓여 있지만,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가슴 속에 당신의 음성을 불어넣으십니다. 또 다가와 면전에 나와 있지만, 당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 안에 당신의 빛을 불어 넣으십니다. 그들의 질병을 치료하시고,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고쳐주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마음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못 다한 말도 다 들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이르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길에서 쓰러질지 모르니 그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마태 15,32)
군중이 치유는 받았지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굶겨서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치유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마치, 강도 맞은 사람을 치료해주고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줄 뿐만 아니라 여관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루카 10,35)라고 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깊고 깊은 사랑의 신비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먹이시고, 미처 바라지도 못했는데도 이미 용서하시고, 뒷날까지도 가엷게 여기시는 그 저린 마음의 사랑을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오히려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을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하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물으십니다.
“‘너희에게는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그러자 그들이 ‘일곱 개가 있고 물고기도 조금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마태 15,34-35)
그렇습니다. “빵”은 ‘이미’ ‘우리 가운데’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사실, 곧 우리 가운데 빵이 있다는 이 사실을 일깨워주시고 확인시켜 주십니다.
실제로, 제자들에게는 빵과 물고기가 이미 “일곱 개”나 있었습니다. “일곱”은 완전함의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것들이 있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을 보지 못하고 또한 찾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제로, 복음사가는 그것으로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도 일곱 바구니에 가득 찼다.”(마태 15,3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를 순례하면서, 자꾸만 스스로를 ‘아는 사람’인 양 여깁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아니라, ‘찾는 사람’이 순례자입니다. “참된 빵”인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 그가 진정한 순례자요 대림의 길을 걷는 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야”에 있지만, 방황하는 이가 아니라 빛을 따라 길을 걷는 순례자로서, “하느님만을 찾는 사람들”(베네딕도의 수도규칙 58,7)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저 군중이 가엽구나.”(마태 15,32)
주님!
당신은 속 깊은 곳도 환히 보시고 깊이 숨겨진 말마저도 다 들으시니,
제 안에 당신이 새겨준 가엾이 보는 마음을 드러내시어,
제 마음이 당신 마음 되게 하소서.
그 마음으로 약한 이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제가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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