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새로움은 언제나 은총 / 대림 제2주일 나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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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3-12-10 | 조회수19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새로움은 언제나 은총 / 대림 제2주일 나해(마르 1,1-8)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다. 모든 위로의 샘이신 하느님께서는 나그넷길을 걷는 이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시고, 당신의 외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영원한 생명을 보여 주셨다. 그리하여 미리 세례자 요한을 보내시어 죄를 뉘우칠 기회를 주셨다. 그는 죄의 용서의 은총을 주는 표지로 물로 세례를 주었다. 요한은 광야서 외치는 이의 소리였고, 그분께서는 생명과 은총을 주시는 분이셨다. 이렇게 요한은 구세주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길을 닦으려 파견되었다. 이사야의 글에 “보라,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 닦아놓으리라.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온 유다 사람들이 그에게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님 시대를 살면서 그분을 위해 온전히 바친 인물이 세례자 요한이다. 그는 즈카르야 사제의 외아들로 사제직을 계승해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야 할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예수님 길을 닦으려고 광야의 예언자가 되었다. 그는 “나는 몸을 굽혀 그분 신발 끈조차 풀 자격 없다.”라며, 예수님 앞에서 한없이 ‘작은 이’임을 드러냈었다. 그의 손가락 끝은 늘 예수님이었고,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며 구원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였다. 요한이 자신의 명성만을 위해 살았으면 어땠을까? 광야에서 금욕적인 삶을 내세우며 명성을 누리고 그들의 스승 노릇이나 했다면 어떻게? 아마도 그는 구원 역사에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으리라. 어쩌면 있으나 마나한 존재였을 게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광야에서의 그 소리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직감한 그대로 ’먼저 온 이‘의 그것임을 알았다. 그는 이전의 생활 습관과 혼돈된 생각에서 벗어나, 죄의 회개로 주님 길을 마련하고자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그리하여 그를 통해 광야는 새로운 생명을 위한 터전이 되었다. 이 대림 시기를 보내며 우리 또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처럼 요한의 외침을 온 마음으로 새겨야만 할게다. 그것은 삶의 새로운 변화를 위한 첫발을 내딛겠다는, 굳은 회개를 뜻하니까. 이처럼 세례자 요한의 임무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합당하게 맞이하도록 사람들을 잘 준비시키는 일이었고, 그 방법은 바로 ‘회개’였다. 그리하여 그는 온 유다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렇게 그는 하느님 자비의 힘으로 위로와 변화를 가져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성령의 세례에 앞서,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 하느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그날을 앞당기도록 회개해야 할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거룩하고 신심 깊은 생활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에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이지만, 이날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 날을 잘 맞이하는 지름길은 회개와 신심 생활이다. 이렇듯 회개는 은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예비 동작이 바로 회개이니까. 그러니 단지 뉘우침만 의식해서는 안 될 일이다. 신앙인은 회개 후에 다가올 새로운 시작을 더 중시해야 한다. 인생길에서 잘못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이리라. 그러기에 우리는 요르단 강가에서의 요한의 외침을 늘 묵상하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자. 이것이 대림 두 번째 주일 메시지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라도 축복이다. 그런 마음 자세는 아무 때나 생겨나는 것이 아니리라. 대림 시기의 은총임을 꼭 기억하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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