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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대림 제2주일 나해, 인권주일, 사회교리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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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12-10 조회수214 추천수3 반대(0) 신고

[대림 제2주일 나해, 인권주일, 사회교리 주간] 마르 1,1-8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수학의 정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 학창시절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이 책으로 공부할만큼, 심지어 수학 교과서보다 더 자주 볼 정도로 유명한 책이었지요. 그런데 많은 학생들에게 이 책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 1장인 ‘집합’ 부분에는 책이 새카맣게 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한 흔적이 남아있는데 뒤로 갈수록 그 흔적이 점차 옅어지다가 마지막 장은 아주 깨끗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지요.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해보겠다’는 처음의 다짐이 점점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나태함과 게으름 때문에 시간에 쫓기다보니 후반부는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수학성적이 바라는만큼 오르지 못하고 늘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 모습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철저한 성찰과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초기에는 그 변화가 금방이라도 이루어질 것만 같습니다. 나를 새로운 삶에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어렵게 얻은 구원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열정으로 마음이 불타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의 불씨는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쉽고 편한 것을 찾는 우리의 나태함과 게으름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단점, 허물과 잘못에 쉽게 실망하고 좌절하여 포기해버리는 우리의 나약함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회개가 늘 ‘작심삼일’로 끝나다보니 내 삶과 존재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지요.

 

오늘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꾸준한 성찰과 회개를 통해 구세주이신 주님을 내 마음에 받아들일 준비를 하라고 권고합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듯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한 때는 골짜기처럼 깊게 파였던 곳이 흙으로 메워지고, 높은 산과 언덕이었던 곳이 비와 바람에 깎여 낮아지는 것처럼, 꾸준한 자기 성찰과 통회를 통해, 회개를 위한 한결같은 노력을 통해, 깊이 파인 감정의 골을 이해와 용서로 메우고, 한껏 높아진 교만과 욕심을 겸손과 순명으로 깎아 평평하게 만들라는 겁니다. 그래야만 주님께서 내 마음 안에 더 수월하게,  더 빨리 오셔서 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이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대림시기를 보내며 ‘회개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들었고, 자기 허물과 잘못을 성찰하며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주님의 길’을 닦아 왔는데, 우리 마음은 무엇이 달라졌는지요? ‘이런 부분만큼은 확실히 나아지고 좋아졌다’고 자신있게 내세울 만한게 있는지요? 이 천 년 넘게 길을 닦았으면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오시는 길이 세상에서 가장 넓고 빠른 ‘고속도로’가 되어있어야 하는데, 그 길은 여전히 좁고 험한 ‘가시밭길’이 아닌지요? 우리 각자의 삶을 살펴보아도, 그렇게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며 사순시기와 대림시기를 보냈으면 언제 어디서 주님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기쁘게 그분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할텐데, 우리는 올해도 또 지금도 여전히 준비되지 않은 부족한 모습으로 ‘그분을 갑자기 만나게 되면 어쩌나’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만약 그렇다면 올해는 정말 달라야 합니다. 회개는 죄에서 하느님께로 한 번 돌아선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 그 상태를 꾸준히 유지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매 순간 하느님 뜻에 깨어있는 자세로 꾸준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예전의 상태로, 욕심과 집착에 눈이 멀어 하느님께 등을 돌린 죄인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마는 겁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그 길은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그 길과 같은 길입니다. 지금 그 길이 나의 실수와 잘못으로 막혀있다면, 자기 합리화와 핑계들로 그 상태 그대로 방치해둔다면, 그러면서도 자꾸만 남들의 잘못을 탓하며 그들을 비난하고 원망한다면, 내 마음은 그 무엇도 지나갈 수 없는 막다른 길, 어느 쪽으로도 나아갈 수 없게 사방이 꽉 막힌 거대한 장벽이 되겠지요.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시고 싶어도 오실 수 없고, 우리가 주님께 건너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완전한 단절과 고립의 상태가 되고 마는 겁니다.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며 피하고 싶어하는 ‘지옥’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봉독하는 마르코 복음은 이런 독특한 구절로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음이, 그분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며 세상 종말의 순간 ‘심판주’로서 다시 오심이 나에게 ‘복음’, 즉 기쁜 소식이 되려면 다시 오실 그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의 재림이 마치 ‘덫’이 나를 덮쳐오는 것처럼 두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세상에, 그리고 내 마음 안에 오실 길을 곧게 내라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회개’할 것을 강조합니다.

 

요한의 삶 중에서 우리가 집중하고 따라야 할 부분은 물로 세례를 베푼 그의 ‘활동’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고 따른 그의 ‘삶’ 자체입니다. 요한은 고귀한 신분과 대중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뒤로하고 세상이 아닌,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부족하고 약한 인간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음’을 잘 알았기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단절시키기 위해 광야로 나아간 겁니다. 척박하고 메마른 땅인 광야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하느님의 도우심과 자비에 의탁할 따름이지요. 요한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길쌈을 하여 원하는대로 옷을 지어입지 않고 죽은 낙타에서 가죽을 벗겨내어 옷을 해 입었습니다. 경작이나 목축을 하여 제 힘으로 먹을 것을 마련하려 들지 않고 광야에서 얻을 수 있는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마저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만 먹을 수 있었으니 요한은 철저히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고 순명하는 삶을 산 겁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요한으로부터 본받아야 할 ‘회개의 세례’입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내 뜻과 계획, 내 욕심과 바람, 내 기호와 취향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허락하고 바라시는 것들에 온전히 집중하며 살아야, 내 마음과 지향이 오롯이 하느님을 향하는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사는 이들은 세상이 주는 부귀영화에 집착하거나 연연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심으로써 시작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복된 삶을 누리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합니다.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방치해두지 않고 즉시 뉘우치고 회개하여 영적으로 ‘티 없고 흠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첫번째 노력입니다.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지 않고 주님께서 주시는 시련과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주님과 그분 사랑에 대한 굳건한 신뢰와 믿음 안에서 그 고통과 시련을 극복해나갈 힘을 얻는 ‘참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두번째 노력입니다. 우리가 그런 노력들을 성실하고 꾸준하게 해 나간다면,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이 우리에게는 고대하던 구원에 이르는 기쁨의 시간이 될 겁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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