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1. 대림 제2주간 월요일.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
놀라운 사실이 선언되었습니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루카 5,20)
예수님께서는 ‘함께 온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의 용서’를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 앞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누구인데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루카 5,21)
참으로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단 한 분, 오직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용서할 수가 없거늘, 감히 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있을까? 더구나, 하느님께서 용서하셨다는 것을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하느님이 아니고서야 말입니다. 그러니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루카 5,24)
그리고 그 증거로 중풍병자를 치유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그러자 그는 그들 앞에서 즉시 일어나 자기가 누워있던 것을 들고, 하느님을 찬양하고 집으로 돌아갔다.”(루카 5,24-25)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치유 받았어도 “들것”을 여전히 들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몸이 치료되었다고 해서, 몸을 버려두고 다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치유 받은 이들이요, 이미 용서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지니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는 ‘치유 받았음을 보여주는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라는 상처를 ‘하느님 백성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야곱이 ‘엉덩이뼈의 상처’를 ‘축복의 표지’로 지니고 다녔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들것'에 메여 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상처’에 메여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는 '들것'을 기꺼이 들고 다녀야 할뿐 아니라, 오히려 ‘들것’에 아픈 형제들을 태워서 들고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할 일입니다. 마치 몇 명의 남자들이 중풍병자를 ‘들것’에 태워 들고 왔듯이, 내 형제들이 나를 '들것'에 태워 예수님께 데려왔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들것’ 위에 우리의 죄와 인류를 들고 아버지께로 가셨듯이 말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십자가의 상처를 ‘구원의 표지’로 지니게 다닙니다. 용서받고 치유 받았음의 표지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치유를 입었습니다. 신령스런 주님의 사랑을 말입니다. 이토록, “우리가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습니다.”(마태 5,26). 아멘.
하오니, 주님!
들것에서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가게 하소서.
들것 위에 당신의 사랑을 들고 다니게 하소서.
십자가의 상처에서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듯이,
저도 상처에서 저를 일으키신 그 사랑을 드러내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루카 5,24)
주님!
당신께서는 치유 받은 이에게
들것이 더 이상은 필요하지 않으나 그것을 들고 가라 하십니다.
하오니, 더 이상은 상처를 아파하거나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지니신 십자가의 상처처럼, 구원의 표시로 들고 가게 하소서.
이제는 사랑을 퍼올리는 구원의 샘이 되게 하소서.
아픈 이를 태워 나르는 들것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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