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참 기쁜 소식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1| | |||
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12-12 | 조회수296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잃은 사람을 찾는 하느님” -늘 깨어 실천적 회개로 하느님께 화답(和答)하는 삶-
“주님의 날이 가까이 왔다. 보라,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복음 환호송)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넘어지는 잘못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대죄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면 주님의 용서요 치유요 구원입니다. 정말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대죄입니다. 정말 자기를 포기하여 스스로 “잃은 양”이 되면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도 속수무책 어쩌지 못합니다.
아마 거의 20년동안 계속될 것입니다. 매월 두 딸 가정과 한 아들 가정, 그리고 부부가정을 위해 매달 꼭꼭 미사를 봉헌하는 분입니다. 처음에는 다 미혼의 자녀들이었는데 지금은 다 결혼하여 손주들도 많습니다. 그중 “남궁우주”, 한 손녀의 이름을 잊지 못합니다. “우주”같이 크고 귀하다하여 “우주”라 작명한 것 같습니다. 부모에게는 자녀 하나하나가 우주보(宇宙寶)요 세상이듯 하느님께도 우리 하나하나가 그러합니다. 오늘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 주님은 우리의 생각을 물으면서 비유를 시작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어 예수님은 자신의 생각을, 하느님의 생각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백마리 양중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둔 채 잃은 양 하나를 집요히, 끝까지, 마지막까지 찾아 나서는 목자의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주님의 마음을 피력합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말씀중에 반드시 나오는 말마디입니다. 하느님의 기쁨은 잃은 사람, 하나를 찾았을 때의 기쁨이요, 작은 이들 누구 하나라도 잃는 것은 결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라는 말마디는 오늘 복음 앞에도 분명히 언급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마태복음 25장 “최후심판” 일화에서 주님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과 자신을 일치시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관심사이자 기쁨은 “잃은 한 사람”에게 있음을 환기시킵니다. 우리 주변에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기울임은 물론 자신을 돌아볼 것을 촉구합니다. 비유에서는 99마리 양중 길잃는 양은 하나인데, 실제 오늘의 인간 현실을 보면 100중 하나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잃은 양같은 사람들일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길 잃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참 많은 사람들이 길을, 희망을, 빛을, 자기를 잃고 방황합니다. 심각한 것은 아예 잃은 양같은 자기 존재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존재 망각의 비극보다 큰 비극도 없습니다. 아예 주님을 찾지도 않고 자포자기 절망으로 주님 찾기를 포기하고 지내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물음은 우리 하나하나의 독자를 향합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합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길잃은 존재입니까? 또는 주님의 공동체 안에, 주님 안에 몸담아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까? 부단히 물어야 할 것입니다. 자성과 더불어 더욱 열렬히, 항구히, 한결같이 희망이자 빛이자 길이신 주님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단히 찾아 오시는 주님께만 맡기는 무책임한 자세가 아닌 우리 역시 주님께 화답하여 주님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이 잃은 양같은 우리를 찾아오셔도 우리가 주님을 찾지 않으면 결코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대림시기의 주제는 온통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께 집중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자 꿈이요 빛이자 길이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를 찾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희망과 꿈을, 빛이자 길을 잃을 때 병든 사람, 병든 공동체, 병든 사회, 병든 나라는 필연입니다. 대림시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희망과 꿈을 주시고자, 빛이자 길이 되시고자 찾아 오십니다.
그러니 대림시기야말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잃은 양들 같이 희망과 꿈, 빛과 길을 잃은 무기력한 무감각한, 무의욕적 삶이었다면 이 은총의 대림시기 심기일전, 회개와 더불어 날마다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찾아 오시는 희망이자 꿈이요, 빛이자 길이신 주님을 마음 활짝 열고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어제도 강조했다시피 대림시기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은 우리 안에 희망과 꿈을 팍팍 심어주시고 친히 빛과 길이 되어 주십니다. 이사야서 다음 말씀이 우리를 더욱 하느님께 집중케 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 주님의 입김이 그 위로 불어오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진정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모두가 사라져가는 덧없는 세상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하느님의 말씀에 희망의 닻을 내리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빛과 생명이 충만한 영원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이사야서 말씀이 삶의 광야에서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께 적극적으로 화답할 것을 촉구합니다. 적극적 행동으로, 삶으로 회개의 실천을 명하십니다.
“너희는 광야에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거친 곳은 평지가 되고, 험한 곳은 평야가 되어라, 이에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니, 모든 사람이 다함께 그것을 보리라.”
주님과 함께 내 삶의 광야 안팎을 부단히 갈고 닦고 가꾸고 돌보아 평정케 하여 주님을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찾는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사람을 찾는 겸손한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요 바로 이것이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다음 이사야서 말씀도 우리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온아, 높은 산으로 올라가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루살렘아, 너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라. 두려워말고 소리를 높여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 그분께서는 목자처럼 당신의 새끼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끌고 오신다.”
우리 모두 시온이, 예루살렘이 되어 주님 오심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착한목자 주님을 영접하는 대림시기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그동안 참 많이 나눴던 “하늘을 담자”라는 제 자작 애송시를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바로 고요한 호수가 되어 우리를 찾아 오시는 하늘이신 주님을 담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이요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