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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이 세모에 그분 멍에를 / 대림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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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3-12-13 조회수159 추천수1 반대(0) 신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 세모에 그분 멍에를 / 대림 제2주간 수요일(마태 11,28-30)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에게 큰 오류는 스스로 규정한 하느님 모습과 자기만이 지닌 어떤 신앙심이 아닐까? 내가 하느님 틀로 가는 게 아니고 그분께서 내 틀에 들어오시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니 걸핏하면 하느님 원망으로만 이어진다. 자신이 설정해 놓은 틀에서 상대방이 벗어나면 용납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과중하게 지었던 율법의 멍에를 벗겨 주러 오셨단다. 그렇지만 못된 우리는 또 다른 멍에를 만들어 스스로 짊어지려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 씌우려한다.

 

이렇게 힘들게 하는 무거운 짐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가족 생계에 대한 부담으로 지워진 짐들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삶의 짐을 멘 이들모두는 내 멍에를 메고서 모두 당신께 오라신다.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고생하며 무거운 짐 진 너희는 모두 내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단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가끔은 자신만이 모든 짐을 짊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 자신이 다른 누구의 등에 타고 있는 사실을 잊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짐의 일부를 짊어지셨다. 다시 말해 나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만 가진다면, 우리가 진 짐은 가볍기 그지없고 지고 갈 힘과 용기가 생길 게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 멍에를 메면 안식을 얻고 편해진단다. 그분의 짐은 가볍단다. 어떤 멍에이기에 가벼울까? 아니 어떻게 메었기에 그럴까! 단지 사랑일 게다. 사랑만이 그러하리라. 끝없이 주는 사랑이니까.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능력은 말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단순하게 제시하신다. 하느님 자비의 최고 표현은 당신께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라셨고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온전히 함께 나누기를 바라셨다는 데에 있다.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 친밀감으로 들어 높이시려는 예수님의 계획은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리라.

 

예수님께서는 삶의 큰 짐을 지고 가는 이들을 언제 어디서나 초대하신다. 나아가 그들이 짐을 내려놓고 쉬도록 부르신다.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너무나 많은 짐을 진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만이 인간의 멍에를 가볍게 한단다. 사실 짐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강도는 달라질 게다. 재산을 재벌과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놓고, 백세의 무병장수를 찾는다면, 대다수는 어쩌면 불행하리라. 그러나 동일 눈높이에 두고 보면 우리는 행복할 게다.

 

이렇게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평범한 일에도 그저 감사할 게다. 거룩한 신성을 끝내 감추시고 비천한 인간으로 태어나신 그분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마냥 행복한 추억만을 가지리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그토록 처참하게 돌아가신 그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고통과 십자가를 이겨 낼 게다.

 

곳곳에 소통이 단절된 불통이 드러난다. 작은 이들과 아픔을 함께하는 그 한계가 자꾸 멀어진다. 빈익빈부익부가 자꾸 벌어진다. 그분의 편한 멍에가 그리워진다. 세모의 찬바람이 세차게 분다. 우리만이라도 그 편한 멍에를 메고 그분의 사랑을 안고, 작은 이웃을 찾아 나서자. 그분 멍에를 대신 야무지게 메고 작은 이 찾아 함께하는 삶에서, 대림시기의 훈훈한 안식을 누리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멍에,짐,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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