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신구약 인수 인계자인 예수님과 요한 / 대림 제2주간 목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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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3-12-14 | 조회수15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신구약 인수 인계자인 예수님과 요한 / 대림 제2주간 목요일(마태 11,11-15) 우리는 이 대림시기에 세례자 요한을 자주 만난다. 앞으로 며칠간은 더 자주 만날 게다. 그가 머문 광야는 유혹을 떨치는 자리였고 그가 촉구한 회개는 진리를 향해 몸과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대림에 우리의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묵상하는 시간으로 삼아야 하겠다. “진실로 이르노니,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중,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는 더 크다.” 세례자 요한은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기에 위대하다. 처음에 모두가 그가 구세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단다. 그만큼 그의 말과 행동은 유다인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삶은 엘리야 예언자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임박한 구세주 출현을 알리는 예언자이므로 구약의 그 어떤 예언자보다도 더 위대한 역할을 담당했다. 때로는 예언자들이 배척받고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그는 구세주의 수난을 예표하며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쳤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낮추며 ‘작은 이’ 삶을 살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며 예수님 앞에서 정녕 작아졌다. 그리고 모든 것을 비우며 광야에서 살았다. 아마도 가장 낮은 삶을 살았으리라. 이제껏 우리도 세속에서 모든 이 중 나보다 잘난 이 없는 줄 알고 지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하늘 나라의 삶을 살기로 한 이상, 그 누구보다 나를 낮추며 살자. 사실 요한처럼 준비하는 이들은 어디에나 있다. 주인공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조연’들이다. 세상살이에 조연 없는 주연은 없다나. 그들은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이 있기에 행사는 빛나고 성공을 거둔다. 사실 진정한 주인공은 그들을 잊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도 증언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 태어난 이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하늘 나라는 왜곡되고 있다. 하느님 나라를 개인의 소유물로 전락시킨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런 폭력이 난무하여 마치 힘깨나 설치는 자들이 진리의 빛을 감추고는 정의를 짓밟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가 하늘 나라를 쉽게 다룬다. 죄짓지 않는 이들만 가는 곳으로 생각한다. 율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는 이들만 가는 곳으로 여긴다. 단지 그것은 우리들만의 생각일 뿐, 거기에는 그분께서 허락하시는 이들만 가는 곳이다. 그러기에 오로지 기도하는 삶을 살자.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삶일지라도, 그것은 우리들의 판단이지 그분 판단은 아니니까.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더 크단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여전히 폭행을 당한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설쳐 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사실 요한까지만 해당된다. 우리가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예언서와 율법의 ‘한 점 한 획’도 소홀히 다루는 것을 삼가자. 귀 있는 이는 분명히 새겨들어야만 한다. 이처럼 그는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였다. 신약의 출발점에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언급하신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 드리고, 자신은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지는 해요, 예수님은 떠오르는 해였다. 자기에게 주어진 주님의 선구자 역할을 다한 뒤에 조용히 물러났다. 요한이야말로 주님을 돋보이게 하고, 자신은 주님의 배경이 된 안개꽃과 같은 이다. 그의 아름다움이 거기에 있다. 그는 하늘 나라가 가져다 줄 구원을 미리 선포하였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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