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자선으로 만남의 기쁨을 / 대림 제3주일 나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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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3-12-17 | 조회수15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자선으로 만남의 기쁨을 / 대림 제3주일 나해(요한 1,6-8.19-28) 대림 제3주일은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한 ‘자선 주일’이다. 기도만큼이나 중히 여기셨다. 자선은 주님 사랑 실천의 한 방법으로,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주신 성체성사 나눔의 신비를 체험하는 신앙 행위다. 오늘 교회는 가난하고 병든 이, 소외된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특별 헌금을 통해 자선을 실천한다. 교회는 자선이라는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사람들은 또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엘리야도 아닌데 세례는 왜 주오?” 그가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으로, 나는 그분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세례자 요한의 정체를 묻고 또 묻는다. 신원을 밝히라는 그 요구에 요한은 이사야가 말한 그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면서, 구세주의 신발 끈조차 감히 풀어 드릴 자격이 없는 이로 소개한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도 자신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질문해 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그분의 심부름꾼이며, 그분만을 충실히 따르는 이다. 또한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돌보는 이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갇힌 이들을 찾아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이, 그분의 말씀을 기쁨으로 전하는 이가 되어야만 할게다. 사실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고백했다. 그리고 내 뒤에 오시지만,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심을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요한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그의 세례에 관한 증언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는 광야에서 가끔은 고독을 안고 살지만,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죽기 살기로 그곳을 탈출하려 한다. 더구나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모으고 더 챙기려 하지만, 우리 내면은 더 황폐해지고 초라해지며 더 지친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를 발견하며, 주님만이 희망임을 체험한다. 그렇게 목마름은 채워지면서 우리는 기쁨의 위로를 받는다.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소중한 장소이다. 대림 첫 주일의 주제는 ‘깨어 기다림’이었다. 둘째는 ‘회개’였고, 셋째 주일인 오늘은 신앙인으로서는 항상 누려야 할 ‘기쁨’이다. 그런데 그토록 기다렸던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다. 어쩌면 이는 기다림의 목표를 소유하는 것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리라. 힘겹고 고된 가운데서도 비움과 자선으로 기쁜 신앙생활을 하라는 말씀일 게다. 예로부터 신앙인은 만남이라는 기쁨을 당당하게 가져야만 할게다. 그 만남이라는 기쁨의 희망을 외면하고 살아왔다면 이제라도 시도해야 한다. 아름다운 만남을 연습해야만 한다. 이것이 대림 시기 셋째 주일의 가르침이다. 그분께서는 늘 기쁨으로 은혜의 축복을 주심에도, 감사하며 받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내자. 이렇게 교회는 자선이라는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오늘 대림 제3주일의 바램은 ‘기쁨’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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