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자신만의 차분한 시간을 / 12월 2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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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3-12-21 | 조회수13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자신만의 차분한 시간을 / 12월 21일[성탄 4일전](루카 1,39-45)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처음부터 끝까지 '기다림이다. 부랑자 두 사람은 나무 밑에서 하염없이 ‘고도(Godot)’를 기다린다. 누구인지, 또 언제 올지 모르면서. 구원자일 거라는 추측만 할뿐. 그가 오지 않자, 그들은 나무에 목매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 끈이 끊어져 실패다. 그때 누가 내일 목을 매자기에, 다른 이가 "만일 온다면?"하고 묻는다. 그러면 그때는 "구원되지."라고 답한다. 그들은 간절히, 더 오랜 기간 구원해 줄 ‘고도’같은 이를 기다렸단다. 이처럼 인간은 나약하고 불안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때로는 그 어려움이나 고통을 되도록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조바심으로 서두르는 것 같다. 이는 자신의 고통을 다른 이에게 드러내는 것을 약한 모습이라고 여기기에. 그래서 가끔 있는 고통도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힘든 일을 남에게 드러내지 않고 혼자 감당할 경우, 때로는 자신에게 더 큰 상처를 안기리라. 천사가 다녀간 후 마리아는 길을 떠나 유다 산골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그때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그녀는 성령이 넘쳐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이 들리자 저의 태 안의 아기마저 즐거워 뛰놉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이렇게 마리아는 임신 육 개월이 훨씬 지난 엘리사벳을 찾았다. 늦둥이를 잉태한 그녀와는 달리, 남자도 모르고 아기를 잉태한 처지이다. 아마도 마리아는 기쁨은커녕 불안과 초조함으로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리라. 그런 마리아를 그녀는 따뜻하게 위로한다. 두 여인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이해하기 힘든 일을 서로 위로하며 시간을 보냈을 게다. 서로를 버텨 주고 용기를 주는 새로운 삶의 ‘버팀목’을 찾으려는 우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 얼마나 다정한 위로인가?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찬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은 정말 큰 힘이 되었을 게다. 사실 내가 어려울 때, 누군가 내 곁에 마냥 있어 주면 얼마나 큰 힘이 될까? 우리도 공동체 안에서 때로는 서로를 배려하고 격려해 주어야만 할게다. 이처럼 고통과 슬픔, 병이나 연약함은 혼자만이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니다. 다른 이에게 힘을 주는 존재라면, 나는 더 큰 힘을 받으리라. 이처럼 하느님께서도 죄 많은 우리를 구원하시러 이 땅에 오실 때에 정말 치밀했다. 먼저 남자를 모르는 수줍은 마리아의 동의를 구하고자 가브리엘 천사를 나자렛으로 보내 설득했다. 그녀와 약혼한 요셉을 면담으로 다독이기는 거북해, 꿈에서 양해를 구했다. 또 길잡이 요한을 앞서 보내고자 사제 즈카르야에게도 통보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를 유다 산골 엘리사벳에게 보내, 태중의 두 아이 만남을 사전에 성사해 메시아 탄생 예고를 최종 ‘리허설’로 확인까지 한다. 그렇게 하느님의 ‘예수’라는 이름으로 지상 순례의 여정을 계획하실 때 참으로 치밀했다. 우리도 때로는 지친 몸 이끌고 조용한 곳에서 묵상하며 자신만의 시간을 갖자. 누군가가 그리워 질 때, 만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자. 이렇게 오늘을 사는 우리는 가끔 자신을 되돌아보도록 하자. 지난 일들을 묵상하며 다가올 일들을 차분히 준비하는 시간 만들자.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려고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우리에게 오실 ‘기쁜 성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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