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1) 서론(序論)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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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12-21 | 조회수117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23. 12. 21.(목요일) 로마서1) 서론(序論) (로마1,1-7) 1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2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3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4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우리는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7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1장 1절에서 7절까지 말하자면 로마서의 서론이고 인사인데, 아주 중요한 신약 서신서들의 공통되는 어떤, 그 사상이 거기에 강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주 놓치는 부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라는 얘기입니다. 이 복음은 하느님이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약속하신 것이다. 우리의 노력의 결실이 아니다. 우리의 진심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도권, 하늘의 하느님으로부터, 그리고 하느님의 약속과 방법으로, 하느님의 약속과 방법이라는 것은 예수로 인한 구원, 예수로 증거하는 하느님의 신실하심들입니다. 그것은 4절에 보는 바와 같이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능력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 그것은 죽음을 이긴 능력에 관한 것이다. 행복, 능력, 해결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죽음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총과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 너희에게 깨우침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것을 계획하셨고, 주시고, 나누게 하기 위해서 직분자도 하느님이 준비하셨다.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라고 돼 있습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는다. 우리가 믿어 뛰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붙잡아 움켜쥐시는 그런 역동적인 하느님께 그 주도권이 얼마나 강하게 강조되어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질 때, 일반적 종교본성에서 이해하는 것과 똑같이 이것이 고급한, 가치 있는 내용에 관한 것이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선한 일에, 옳은 일에, 그래서 가지는 어떤 세상이 줄 수 없는 보상에 관해서 기대하는 것이 종교 일반에 대한 우리의 기대입니다. ‘천상의 것이다,’ 하는 말에 대해서 우리가 아무런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리스도교의 다름은, 천상의 것을 갖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 거기에 도달한 자의 어떤 깨우침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시작하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하느님과 인간의 천상의 것의 만남, 은혜를 입고 축복을 받아야 되는 자가 하느님과 만난 수직적 만남에 대해서 매우 많은 오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만난 것으로 대표되는 그 많은 내용들 감동, 깨우침, 결단, 행복, 확신, 자유, 놀라움 같은 것들이 그 하느님과의 만남이 가지는 그 무한한 축복들을 세상의 것으로 다 설명할 수 없어서 추상적인 표현을 쓰는 바람에 하느님과의 만남이 역사적 사건인 것을 자꾸 놓칩니다.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은 하느님이 깨우침을 주시는 방법이 현실이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 전혀 못 알아듣는 얼굴이네요.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회개(悔改)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를, 본인이 회개를 해서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회개로는 보통 감동이 없고, 감동을 받아서 회개를 한 사람들은 그 체험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렇죠?. 회개를 해서 보상을 받은 게 아니라, 하느님이 강하게 찾아오셔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나를 찾아오신 이가 누구인지를 알고, 비로소 진리와 생명과 하느님에 대하여 예수 안에서의 증거들에 대해서 확연하게 깨닫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죄인입니다. 하느님, 나의 하느님으로, 예수님, 나의 구세주로, 내가 이제 믿습니다. 이제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는 감격이 있죠. 천상의 것과의 수직적인 만남이 일어납니다. ‘이제 다시는 세상에게 지지 않고 예수 믿는 자답게 거룩하게 살겠다.’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고, 자고 일어나면, 다음 날 아침에 “빨리 일어나서 세수하고 학교 가. 지금 뭐하고 자빠져 있어” 소리에 확 현실에 돌아온 걸 깨닫습니다. 어제의 황홀, 어제의 그 더 이상 필요 없을 모든 것을 가졌던 감동이 어머니의 거친 목소리 한 방에 날아가는 것을 봅니다. 그렇지 않았던가요? 그럼 그게 가짜였을까요? 아니요. 진실이었습니다. 그럼 우리가 하느님이 일하시는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느님의 임재를 강하게 확인시켜 주신 날만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의 나날들도 하느님이 나를 인도하고 계셨던 것이 현실이요, 인생이요, 역사라는 것을 아는 데에 성경의 증언이 바로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聖經)은 하느님이 누구시냐? 를 체험적, 개념적 차원에서 늘어놓고 있지 않습니다. 역사로 설명을 합니다. 구약 내내 하느님이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소개할 때는 “나는 너희 조상의 하느님이니,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계시하십니다. 저들의 생애 속에, 나라의 운명 속에, 역사 속에서 하느님이 당신을 알리시는 일들을 구체화시켜, 가장 크게는 예수로, 인간으로서 우리가 풍부한 환경 조건 속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개념과 그 가치로 그 말에 증거를 삼거나 본질을 삼지 않으시고, 찾아와 항복시키고 설득시키는 구체적인 개입으로 말씀하셨다 그럽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일어나는 수직적인 이 만남, 신성함에 대한 만남, 어떤 깨우침, 회개, 확신 모두는 이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하느님이 개입하셔서 만드시고, 때가 되면 확인을 주시고, 또 그 다음에 더 다지시고, 더 쌓으시고 하는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된다, 그런 말씀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보통 아멘을 안 합니다. 내가 어제 천국을 갔다 왔다 그러면 아멘을 하고, 하느님이 어제도 일하고 오늘도 일하고 내일도 일하신다 그러면 아멘을 안 하는데 그 이유가 뭡니까? 한 번만 만나려고 그럽니다. 마치 세상은 버려진 동네고 하느님은 저 멀리 계시다가 지켜보다가 안 되겠다 해서 한 번 뛰어 들어와 꺼내놓고 가시는 분이라고 생각을 하시니까 우리 인생 전체에 하느님이 늘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걸 우리는 너무 자주 놓칩니다. 모든 편지(서간문)들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종, 나 바오로는” 이겁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종이 된 바오로는 그 주도권이 하느님께 늘 넘어가 있고 하느님의 일하심에 강력한 증인으로 서 있습니다. 그것이 역사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옳고 그른 것으로 나눕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고, 쓸모 있는 자와 쓸모 없는 자로 나눕니다. 그러면 그때 하느님은 옳은 자 편에 계시고, 믿는 자 편에 계시고, 틀린 자와 믿지 않는 자는 하느님과 격리돼 있는 자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모두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도 원래는 믿지 않는 자였습니다. 예수 안에서 믿는 자로 부름을 먼저 받았고 아직 하느님이 저 사람들을 다 부르기 위하여 세상을 놔두고 있는 중인데 우리는 이분법으로, 옳을 때만 하느님과 함께 있고 틀 릴 때는 하느님 밖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옳을 때는 그게 정당한 인생이고 틀릴 때는 부당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네가 정당할 때도 은총이 필요하고, 네가 부당할 때도 은혜가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레슬리라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하여 아주 특별한, 아주 대단한 이해를 갖고 있는 분인데, 1960년대에 인도에 가서 삼십 년간 인도에서 선교사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인도 힌두교도들을 개종시키는 일을 하는데, 진지하고 오랜 각오를 하고 가서 힌두교도들을 만나고 힌두교 사제들 지도자들을 만나서 깊은 대화를 서로 나눕니다. 자기도 힌두교 경전을 배우고 그들에게도 성경을 이제 읽힙니다. 한 힌두교 지도자가 이런 말을 한 것을 레슬리 가 그의 책에 소개합니다. “내가 보기에 성경은 우주의 역사, 곧 창조 세계 전체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를 독특하게 해석한 책입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막중한 배역을 맡은 인간에 대한 해석도 독특하지요. 아주 특이합니다. 세계의 종교 문헌을 다 통틀어도 성경에 견줄만한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슨 차이인지 당연히 모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경전은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옳게 되는지, 무엇이 행복인지, 어떻게 그 행복을 얻는지에 관해서 쓴 책이라고 우린 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이 세상을 만들었고, 하느님의 기쁘신 목적으로 창조했는데, 인간이 타락해서 망쳤다. 그러나 하느님이 하느님을 거부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 라는 책이라는 겁니다. 다르죠.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이냐 어떻게 하면 행복을 얻느냐라는 수단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안목이 다른 것입니다. 행복, 승리라는 것이 맨 처음 나와야 할 가장 우선하는 가치가 아니고, 하느님과 그의 목적, 일하시는 방법, 그 속에서 인간의 위치, 세계 역사가 가지는 진정한 목표, 하느님이 일하시는 방법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가 성공을 하면 복 받은 거고 실패를 하면 벌 받았다라고 생각하는 건 가장 기본적인 종교 이해입니다. 어떻게 신에게 잘 보여 성공을 얻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그리스도교식으로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성공이 가져다주는 유익은 무엇이냐 하고 다시 묻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성공은 우리를 망칩니다. 그렇죠. 성공해서 망해본 적 있으시죠? 이때 표정 관리 잘하는 겁니다. 이제 진짜로 그런 사람은 아닌 것 같은 표정을 짓습니다. 성공해서 망한 건 우리 대표적으로 미국의 그 큰 복권에서 당첨된 자들이 100%로 1년 안에 망했다 하는 거죠. 새 차 사고 새 집 사고 새 마누라 사고 새 자식 사고 금방 성공이, 성공이 아니고 성공의 하느님이 그의 은혜로 개입하셔야 그 성공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복을 가질 수 있습니다. 실패는 다만 벌이 아니고, 절망이 아니고, 그 실패에 하느님이 은혜로 개입하시면 실패에서 성공으로 배우지 못하는 걸 배웁니다. 가장 중요하게 이해력을 배우죠. “실패할 수 있다.”를 알게 됩니다. 공부 잘한 사람들, 똑똑한 사람들이 제일 이해 못하는 게 공부 못하는 겁니다. 꼭 이렇게 물어 보더라구요. “왜 공부를 못했어요?” 이렇게. 너무 진지하게 “왜 못하셨어요?” 안 가르쳐 주는대. 절대 가르쳐 줄 수 없어. 그걸 물을 필요 없는 사람끼리 모여서 비웃어야 됩니다. 그죠? 당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불운이 뭔지를 당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열심히 살면 절대 불운 같은 건 없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가 우리가 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계를 알게 됩니다. 잘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과 잘해도 쓸 데가 없다는 것과 못해도 손해 볼 게 없다는 거를 배우지 못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71-72절은 고난에 관한 이런 깊은 통찰의 고백이 있습니다. “제가 고통을 겪은 것은 좋은 일이니 당신의 법령을 배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당신 입에서 나온 가르침이 좋습니다. 수천의 금과 은보다 좋습니다.” 왜요? 성공과 실패가 최고의 가치가 아니더라는 걸 압니다. 인간의 인간됨이 깊어지고 커지는 것을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는 걸 배우는 겁니다. 고난을 당함으로써. 고난을 당하지 않으면 깊은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걱정하는 사람을 찾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울어봐야 우는 자를 찾아갈 수 있고, 내가 울어야 상대방이 내 얘기에 진정성을 이해합니다. 꼭 망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어쨌든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지요. 성공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적고 실패로 배울 수 있는 것은 많습니다. 그런 하느님이 일하신 세상이 뭐냐? 왜 억울한 게 많고 왜 이렇게 싸움이 많으냐? 나라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그렇게 하고 계시는 겁니다. 아직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럴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려는 복이 진정 어떤 데서 무엇으로 만들어져야 되느냐를 보이기 위해서 아직 지금의 세상이 필요 하답니다. 우리 자녀가 울고, 절망하고, 방황하는 거 보기 힘들 것입니다마는 하느님은 우리보다 우리에 대한 사랑이 더 크십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가장 놀라운 하느님의 일하심의 신비를 구약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내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하느님은 그 백성들을 권면하시고 꾸짖으시고 할 때마다 당신의 권위를, 당신의 발언의 지위를 이것으로 댑니다. ““나는 너희 조상의 하느님이니,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라고 얘기합니다. 또 하나 붙이죠. 즐겨 “나는 너희를 노예 되었던 애굽 땅에서 구원하여 낸 너희 야훼다.” 이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할 때 대표적으로 표현하시는 하느님의 권위의 증거지요. 나는 너희 조상의 하느님이다. 한 번 도와준 하느님이 아니라 그 생애를 같이 한 하느님이다. 너희에게 구원을 준 하느님이다. 이거 둘을 합친 것이 이 사건에서 더 크게 나오는데요. 그건 뭐냐? 이 두 개를 합친 것보다 큰 사건, 바벨론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원하는 평안, 너희가 원하는 안심, 너희가 원하는 행복으로 타협할 수 없다. 나는 거룩한 하느님이고 나는 너희에게도 거룩함을 요구한다. 그 거룩함은 다만 윤리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걸 포함하지만 훨씬 큰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지위, 그 수준을 말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지위를 나는 타협할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이 자신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걸 감수합니다. 바벨론이 남 유다를 멸망시키고 그들을 포로로 데려가면서, “우리가 믿는 신이 유대인이 믿는 야훼 보다 크기 때문에 우리가 이기고 너희가 졌다.” 라고 큰 소리를 치고 유대인들을 조롱합니다. 하느님이 그 모욕을 감수 하십니다. 우리는 그 일을 십자가에서 더 분명히 보지 않았습니까? 하느님이 일하시는 방법 자기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려고 하는가? 그러기 위하여 무엇을 감수하시는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의 삶, 죄의 권세가 가지는 위협과 시험 앞에서 하느님의 크기를 죄가 만든 거짓과 헛된 것을 극복하여 가져야만 하는 하느님이라는 이름의 영광과 거룩을 지켜내는 자로 우리를 밀고 있습니다. 신자(信者)들이 겪는 신앙생활의 현실이죠. 그러니까 이 이해가 없으면 당황스러워집니다. 하느님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일하셨고 그 연장선상에서 그의 성실하신 약속을 따라 일하고 계시고, 그리고 완성할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 세계관입니다. 신자들의 믿음이죠. 지금 하느님 일하고 계시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태복음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요약돼 나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34절과 연결시키지 않으면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건 이런 뜻입니다. 오늘, 내일을 안심하도록 확보하려고 오늘을 살지 말라. 그런 뜻입니다. 내일을 안심해도 좋게 확보하려는, 오늘로 싸우지 말고 오늘은 오늘의 일로 채우고, 내일은 내일로 채워라 하는데, 여기가 어렵습니다. 내일이 뭐냐? 내일을, 오늘을 이해할 때에 세상의 권력과 세상의 방법이라는 시각에서 오늘을 이해하면, 내일을 오늘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내일을 갈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내일의 끝은 종말입니다. 종말은 세상이 심판받는 날이면서 그건 부정적인 표현이고, 긍정적인 표현으로는 하느님의 약속이 구체화되는 완성되는 날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과 상(傷)하는 것과 해(害)하는 것과 눈물과 죽음이 없어지는 하느님 통치의 완성의 날이 옵니다. 내일의 연장선상의 끝에, 막연함, 운과 불운밖에 없으면 내일은 오늘 준비해야 맞습니다. 그런 것이 하느님의 약속이 그 연장선상의 끝에 있다면, 말하자면 그리스도교 종말론을 알고 있다면, 하느님의 시작과 만드심과 완성을 알고 있다면, 내일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날로서 오늘을 규정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죠. 오늘이라는 도전, 오늘이라는 숙제를 하느님의 자녀로 대면하려는 것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는 것은 성실함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이 가져야 되는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건 잘못입니다. 주어진 일에 우리가 하는 모든 걸 해야죠.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고 거기에 목매다는 것이 아니라, 공부 열심히 해야 되고 직장생활 열심히 해야 됩니다. 그것이 종말과 연결되어 있는 자로 오늘을 살아야 됩니다. 그 오늘 하루는 보통 반복적인 일상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큰 시험은 아무 확인이 없고, 밤낮 똑같은 일 하는 이 막막함이 견딜 수 없는 시련이 되고 맙니다. 그걸 보여줘야죠. 뭐 하다 못해 정 안 되면 물고기 뱃속에라도 한 번 넣었다 빼주시든가. 하다못해. 그게 우리가 가지는 막막함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 속에서 큽니다. 기다릴 줄 알게 됩니다. 기다리는 건 늘 불안합니다. 이 세상 사는데 제일 힘든 게 기다리는 겁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더디게 갑니다. 기다리는 덕목을 배우게 됩니다. 초조함과 성급함과 그 자기의 연약함을 누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배워야 하는 첫 번째 덕목입니다. 그걸 세상에서는 예의라고 하고, 겸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사고가 터집니다. 좋은 일은 오늘 안 일어납니다. 사고가 터집니다. 사고 앞에 붙을 거 많죠. 넘어져 구르고, 차에 치이고, 병이 들고, 누가 죽었다 그러고 하는 사고가 터집니다. 그 오늘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 다음 내일의 연장된 선상에서 하느님이 일하는 오늘에 일어나는 하느님의 통치 속에서의 일입니다. 거기서 하느님의 일하심을 읽어내는 실력이 없으면 ‘한 날 괴로움은 그날의 족하다’라는 말로 싸맬 수 없는 오늘이 됩니다. 안심하고, 도망가고, 깊이 들어오지 않는 회피와 타협과 체념으로 흐릅니다. 우리가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겁내지 마십시오. 하느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서 붙드시어 우리의 비겁함과 체념과 절망과 변명까지도 가지고 일하십니다. 그걸 겪고 돌아오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 하느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이 갖는 크기를 경험하지 않으면 모릅니다. 집 나갔다 돌아온 탕자가 알게 된 아버지. 굳이 집을 나가는 방법을 택할 필요는 없지만, 그 큰 아들과 아주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큰 아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항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무서운 아버지죠. 놀라운 아버지죠. 그게 우리 인생입니다. 역사입니다. 그의 약속의 완성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니 겁내지 마십시오. 겁 안내면 현실이 형통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물론 고통스럽고 조마조마합니다. 힘에 버겁습니다. 그러나 비명은 지르지 마십시오. 하느님 없는 것 같이, 믿음 없는 것 같이 굴지 마십시오. 그래 이것으로 하느님이 일하신대. 이게 손해만은 아니래. 나의 잘못과 실패가 하느님의 실패는 아니래. 다시는 넘어지지 않는다가 아니라 내가 이번에 넘어진 것으로 배울래. 또 넘어지면 또 한 번 더 배울래. 그렇게 가는 것이 신자의 현실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하시는 복된 자의 신비로운 인생 여정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이라고 약속한 에페소서의 선언에 당도할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더 기다리고 더 헤아리고 더 깊어지는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살아가게 하기 바랍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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