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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12월 23일: 루카 1, 57 -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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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쪽지 캡슐 작성일2023-12-22 조회수118 추천수0 반대(0) 신고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1,60)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에 먹칠을 한다.’라는 표현이 어디서 어떻게 사용하게 되었는지를 오래전에 읽었습니다. 조선시대 기생들은 어느 대갓집 여인들 못지않게 기예와 글솜씨에 능했다고 합니다. 비록 술을 따르고 노래를 부르던 여인네들이지만, 그들에게도 서로에게 불문율 같은 약속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다른 동료 기생의 남자를 엿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행여 동료 기생의 남자를 유혹한 기생이 있다면, 그 기생의 이름을 기방妓房 앞에 크게 써 놓고서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그 이름에 먹칠을 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게 그들에게는 가장 큰 모욕이며 징벌이었습니다. 이처럼 이름은 기생에게도 가장 중요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었기에 그 징벌이 가장 두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우리도 세례 성서를 받을 때, 자신의 주보 성인을 닮는다는 말처럼 본명을 지을 때 분명히 자신이 지을 본명의 성인이 누구인지를 미리 알아보고 지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 저의 주보 성인이신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저도 제 주보 성인처럼 그렇게 살았으면 싶습니다. 저는 제 가족 중에서 맨 처음 세례받았습니다. 그래서 제 어머니의 본명이 모니카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1,57) 고 시작하며, 이를 들은 이웃과 친척들 모두 같은 마음으로 기뻐하고 축하하는 모습이 참으로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사실 모든 가정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큰 축복이며 경사이겠지만,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이웃과 친척들은 마치 자신들의 일인 양 함께 기뻐해 주는 마음 씀씀이가 너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다 그렇게 이웃과 친척들의 축하와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요한의 탄생 순간은 온 동네가 시끌벅적할 만큼 관심과 주목을 받으며 태어났지만, 6개월 후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이방인 동방박사들 이외에는 어떤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고 마굿간에서 쓸쓸히 태어난 것과 매우 대조적인 모습임을 기억합시다. 왜냐하면 복음은 단지 이 순간만이 아니라 다른 순간, 천사의 예고에 따른 차이(=즈카리야와 마리아), 어머니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과 만남 역시도 동일한 맥락에서 복음사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고 봅니다. 

발단은 바로 요한의 탄생 여드레째 되는 날 곧 할례와 함께, 이름을 짓게 되는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관례에 따라 아기는 아버지의 이름을 딴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 시작은 어머니 엘리사벳이 나서서,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고 말하는 그 자리에 왔던 사람들은 전통과 관례를 무시한 엘리사벳의 의견을 무시하고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지금껏 말문이 닫혀 있던 즈카리야가 서판에 또렷하게 “그의 이름은 요한”(1,68)이라고 쓰는 순간,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들도 놀랐지만, 더 놀란 것은 그동안 말문이 막혀있던 즈카리야의 입이 열리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자 더 놀랐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이 일로써 왜 즈카르야가 말문이 막혔으며 그리고 이제야 말문이 열려야 했나를 당사자인 즈카리야는 물론 그들 모두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당사자인 즈카리야는 물론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과 이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 향한 하느님의 놀라운 초대이며 가르침이었다고 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늘 놀라움과 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을 통해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십니다. 그러기에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으며,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하고 말하였다.” (1,65~66) 고 장황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주님의 손길이 요한을 보살피고 있음”(1,66)을 알아본 사람들은 이 일이 있고 난 이후에, 요한이 어떻게 성장하고 있나 끊임없이 주목하였으리라 봅니다. 물론 아직도 옛 질서에 머무는 사람들은 그의 존재가 거북하고 부담스러울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오늘 말라키 예언자는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3,24) 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 아시는 것처럼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부부는 굳이 조상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불렀을까요? 물론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은 주님의 천사가 알려준 대로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요한이라는 새로운 이름의 뜻이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푸신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로써 요한은 한 가문을 마감하고 한 가문의 새 시대를 열면서 새롭게 열리는 가문은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지배하는 가문이 될 것임을 이미 그 이름에서부터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후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끝없이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한없는 은총을 내리시는 하느님을 외칩니다. 그러니까 그가 외치는 내용이 곧 그의 이름의 의미였으며, 그가 외치는 내용이 사실 요한의 존재 이유였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으며, 우리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내용이 바로 우리의 이름에 걸맞으며, 자신의 있음을 드러내고 있나 늘 기억하면서 살아갈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 각자의 이름이 먹칠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고, 존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나 용맹한 하느님이라 불리리니,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으리라.”(입당송, 이사9,5;시72,17참조)

** 저희 수도회 전 진 도밍고 신부의 부친이신 전옥철(세베로) 님께서 21일 귀천하셨습니다. 장례미사는 12월 24일 07시에 있을 예정입니다. 기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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