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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3) 복음(福音)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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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12-23 조회수120 추천수0 반대(0) 신고

성 바오로

 

2023. 12. 23.(토요일)

 

로마서3) 복음(福音)의 힘 .

 

(로마1,14-23)

14 나는 그리스인들에게도 비그리스인들에게도, 지혜로운 이들에게도 어리석은 이들에게도 다 빚을 지고 있습니다. 15 그래서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소원입니다.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17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18 불의로 진리를 억누르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과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가 하늘에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19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20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21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22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23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오늘 로마서 내용은 이제 사도 바오로가 왜 그토록 로마에 가려고 하는가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그런 걸 묻는 것 자체가 약간 의아스롭죠? 너무나 당연하게 복음을 전해야 되고, 목숨이 달린 문제고, 운명에 관한 문제인데 빨리 가서 도와야지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는 그런, 어떤 감동과 설득을 위한 책이 아니고, 보다 큰 시각에서 하느님의 일하심을 그리고 있는 책입니다.

다른 서신서들과 달리 어떤 지금 그 서신을 받아야 되는 교회에 일어난 어떤 어려움 갈등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인류 전체를 관객으로 놓고 바오로가 하느님이 무얼 하셨는가? 무얼 하시는가? 그리고 무엇을 약속하여 실제로 역사 속에서 그 일을 어떻게 추진하고 계시고 약속하신 대로 가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는 책입니다.

 

로마에 가기를 원하는 것은 14,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그리스인이나 이방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내가 다 빚진 자입니다.’ 이 빚졌다는 건, 상대방에 대한 책임이 남아있다는 뜻인데, 로마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과 바오로 사이에 무슨 채무관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11절을 로마서를 여는데서 시작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오로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는 말과 5절에 있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총과 사도의 직분을 받아에 해당하는 설명입니다. 하느님이 무얼 하셨고, 나에게 무얼 맡기셨느냐 해서 로마에 가야 될 책임이 그 안에 들어 있어서, ‘어찌하든지 내가 너희에게 가려고 한다.’ 이거죠.

로마 교회에 있는 사람들과의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하심이, 너희한테까지 나를 보내고 있으므로 이건 나에겐 책임이다. 이게 빚진 자다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제, 복음을 정의하고 18절부터 그 유명한 하느님의 진노(震怒)에 관한 설명이 등장하는데, 이 모든 이해에 관하여 지금 자꾸만 반복하는 로마서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슨 그림을 그리는가를 놓치면 복음서나 다른 서신(書信)에서 보는 것 같은 이 실제적이지만 구원에 집중된 자꾸 작은 그림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결심(決心), 그 다음에 순종이라는 몇 가지 덕목으로 복음과 믿음의 생활이라는 것이 이렇게 구체적인 책임의 문제로 좁아집니다. 이걸 좁다고 얘기하는 것은 그게 작아서가 아니라, 로마서가 그리려고 하는 큰 그림을 방해한다는 의미에서 작게 됩니다.

로마서가 그리는 복음에 관한 설명을 로마서가 그리려는 의도를 따라 읽을 줄 알아야 된다 그거죠.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느냐? 복음이 뭐 길래? 라는 종속절이 16절인 것입니다. 복음이 뭐 길래, 앞에서 말한 것에 계속 이 문법적으로 뒷 구절들이 따라오고 있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능력인데,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끄럽지 않다는 말은, 소극적인 표현은 물론 아니고 가장 큰 표현을 역설적으로, 수사학적으로 표현한 것이죠.

여기서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하느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죠? 하느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 실패가 없고, 부족할 것이 없고, 모자랄 것이 없다는 말을 하는 거죠. 물 샐 틈 없다. 완벽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긍정적인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긍정적인 말을 하는 순간 그거 하나로 자꾸 제한이 되니까. 빈틈이 없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너희는 포위되었다. 그 말을 하십니다. 너희는 포위되었다고. 그렇죠.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하느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 그렇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며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됨이다.” 이렇게 복음을 설명합니다. 모든 특별한 경우, 모든 절망, 모든 불가능에 이 복음은 작용합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놀라운 그 약속은 죽음의 자리에서 부활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 이미 저지른 일을 뒤집을 수 있답니다. 저지르기 전에 회개해야 되는 게 아니라, 저지른 다음에 뒤집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하느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어떻게 능력이 되느냐? 그래서 17, ‘복음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믿음에서 믿음으로 계시됩니다. 이는 성경에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은 뭘까요? 17절 대로하면, 믿음으로 살아야 되는 건데요. 그러면 약간 조건으로, 책임으로 주어지지 않습니까? 제대로 연속성 있게 일관되게 읽으시려면 이렇게 제가 설명을 하면 이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복음에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나서,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성실함으로 또는 신실함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에 대하여 신실하게 되게 하니 성경대로 의로운 이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느님의 신실하심, 우리를 신실케 만든다는 것이 왜 필요하죠?

그러니까 18절 그렇지 않으면 진노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다. 하느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다 이겁니다.

진노가 어디에 임한다고요? 불경(不敬)과 불의(不義), 불경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섬기지 않는 것이요, 불의는 하느님께 대하여 신실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실하심 밖에는 거기는 그것 자체로 심판이고 저주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복음은 뭐냐? 내가 하느님의 신실하심 속에 들어오는 것인데, 그 일을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이미 행하셨다는 선언이다.

역사적인 사건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한 개인이 예수를 믿어 회개하는 실존적 순간이 다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하느님의 이 행위 하느님의 자비와 의로우심과 능력에 의하여 제공된 역사적 사건 위에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이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 때문에 우리의 행위 회계 결단 신앙이라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무한히 모든 조건과 경우에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걸 복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전에 일제강점기 속에 있을 때 이런 일 당했었죠. 해방이 됐는데, 해방이 된 게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가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남양 열도에서 아직도 일본이 진 줄 모르고 밀림 속에 아직도 군인으로 살아남아 애쓰며 숨어 살던 사람들을 만나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 식이 된 거죠.

자비로운 하느님의 통치, 복을 주시려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제 나라가 바뀌었는데, 하느님이 우리가 지은 대로 갚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냈는데, 거기에 참여하고 누리는 일로 복음은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죠.

나도 되는가? 그렇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 라는 말은 그때 그 조건절이 아닙니다. 훨씬 큰 선언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누구나라는 얘기입니다. 너도 된다. ‘회개(悔改)는 나도 되는구나를 아는 거죠.’ 죄 짓던데서 죄 안 짓는 데로 돌아서는 그런 도덕성과 또 종교성의 변화가 아닙니다. 내가 누군지 아는 겁니다. 그게 하느님을 알아야 내가 누군지를 알죠. 그 관계에서의 문제니까. 회개를 하면 하느님이 누군지 알겠습니다.

하느님의 신실하신 은혜를 입어 내가 존재한다는 것 알겠습니다. 나도 하느님께 신실하겠습니다는 조건도 아니고, 그저 책임도 아니고, 알게 된, 주어진 우리의 영광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거죠. 각오와 감동 속에 동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 은혜 속에서 동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가야 이 문제가 풀릴 것입니다. 하느님이 하느님께 신실하지 않는 자들, 즉 불경과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진노하신다면, 아 그건 좀 불공평하지 않는가? 아니 그런 일이 정말 사실인가? 거기에 대한 설명이 19절 이하 입니다.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이미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명백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진노, 하느님의 신실하심과 통치 바깥에 있는 것이 어떤, 어떤 심판과 벌 속에 있는 것이냐? 역사를 보라. 하느님을 아는데,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신실하심을 구하고 그에게 신실한 존재가 되기를 거부했던 것을 보라.

우리가 언제 하느님을 알며, 알고도 잘못을 범했습니까? 세상을 보라. 그게 창조 세계 하느님의 신성이 너무나 분명해서 예술이 있지 않냐 이러는 겁니다. 예술이 있습니다. 신앙과 관계없이 예술이 있습니다. 창조 세계, 보이지 않는 신성이 충만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예술이 있죠.

그리고 뭐가 있다고요? 영혼과 양심에 갈증과 자극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영혼의 갈증과 양심의 가책이 있습니다. 양심의 가책은 여러분 너무나 잘 아시니까 설명이 필요 없지만, 영혼의 갈증은 뭐죠? 인간이 스스로 만족한 사람이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유명하다는 문학 작품들을 보십시오. 문학 작품은 위대한 작품일수록 그것은 신앙 고백과 거리가 멉니다. 모든 위대한, 인류가 유산으로 삼고 있는 모든 위대한 문학 작품은 다 이, 이 반발, 거역, 즉 자유에의 의지로 가득해서, 그 자유가 죽음을 극복 못하는 문제에서 아우성치는 것들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가집니다.

그가 가진 자유와 그가 주장하는 모든 가치들이 죽음을 극복한 것이 없기 때문에, 즉 운명 앞에 무력한 자유에 대하여 놀랍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이 그 고유한 가치가 자유라고 이해들 하고 있는데, 그 자유가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이제는 다 안 읽겠지만,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읽다 말다, 읽다 말다를 여러 번 한 그거, 이게 무슨 얘긴지 모를 얘기가 전부 그 얘기죠. 이방인. 이런 것들입니다. 왜 사람은 바람을 피우나? 왜 사람은 술을 먹나? 왜 사람은 싸우나?

노인과 바다. 청새치를 잡았으면 빨리 냉동실에 넣어야지 그건 왜 끌고 오는가? 이런 긴 얘기들을... 답이 없죠. ? 죽으니까. 죽어나가니까. 아무리 지가 잘났어도 죽어버리는 데는 대책이 없거든요. 그 유한(有限)함을 무력함을 실컷 보았는데, 그러나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다만 생존을 위하여 생각 없이 살 수는 없더라니까요.

고민하죠. 묻지요. 덤비죠. 이게 다 위대한 작품이라는 겁니다. 그의 영혼이 스스로 채울 수 없는 더 깊은 것을 요구하고 있는 탓입니다. 그래서 얘기죠.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 자체가 너희가 더 큰 것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것에 대한 증거이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해도 행복하지 않지 않습니까? 아무리 교육을 받아도 인간성이 나아지진 않지 않습니까? 그렇죠. 한계를 알아야죠.

그것이 무엇을 채우기 위하여 하느님이 만드신 것인가를 아는 것이 복음이라 그러죠.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영광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겐 복입니다.

한 인간의 지식과 경험과 고급한 사색과 무슨 고민과 투쟁 그런 거하곤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소원하는 것보다 큰 창조주 하느님의 기쁘신 뜻, 영광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거부합니다.

 

(로마1,21-23) 21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22 그들은 지혜롭다고 자처하였지만 바보가 되었습니다. 23 그리고 불멸하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인간과 날짐승과 네발짐승과 길짐승 같은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자행되고 있고,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반복될 것입니다. , 인류가 행하고 행할 수밖에 없는 그 속에, 그 현실에 하느님이 찾아와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합니다. 회복 합니다.

그래서 예수가 오심으로 로마서에 기록된 것과 조금도 틀림없이 일치하는 인간의 부패, 무지, 미련함과 패역함들이 예수로 하느님이 극복하시고, 인류를 자신과 화해했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을 초월하여 떠다니는 가치이기 이전에 역사적 분기점을 만들어낸 분이요. 역사란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바꿀 수가 없는 것으로 역사의 못을 박아 선포하는 겁니다. “나는 너희와 화해했다, 나는 너에게 신실한 하느님이다. 누구든지 예수 안에 들어오라.”

예수가 누군대요? 우리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신 분. 감동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의 피로 부른 자들, 그 어떤 것도 이 부름에서 제외될 수 없는 조건을 만족시킨 분으로 부르고 있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그리스도교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들만은 아닌 것 같습니까? 저 사람만은 아닐 것 같습니까? 그 모든 사람이 예수 안에서인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는 뜻은 하느님의 뜻을 벗어난 영역과 존재와 가치가 있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과 일하심을 벗어나면, 당장 하느님의 신실하심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거긴 불경이 가장 으뜸 되는 이유요, 당연히 부름의 밖에 있을 수 없고, 하느님의 진노하심 속에 자신을 쳐박는 것이 된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 복음이 선언하는 신앙생활이란 뭐죠? 하느님이 시작하신 하느님의 통치와 복 주심과 예수 안에서의 신실한 약속들을 근거로 하여 우리 생애를 그 통치에 동참시키라는 것입니다. 다만 도덕성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 백번도 넘게 얘기했습니다.

옳아야 되는 것, 유능해야 되는 것의 싸움이 아니라 하느님이 일 하셨고, 예수 안에서 보이신 대로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렇게 일하고 계신다.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가장 큰 가치다. 그 큰 그림의 한 조각이다. 한 부분이다. 그러나 함께 만드는 하느님의 뜻이요 역사다. 환란을 이깁니다. 고통스럽지 않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늘 분명하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큰 그림 속에 들어있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들락날락 하지마. 내가 믿으면 하느님이 돌아보시다가 내가 외면하면 하느님이 또 숨으셨다가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허락된 역사적 사건이요, 예수 안에서 붙잡는, 예수 안에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통일하시겠다는 에페소 서신의 선언으로 지금 진행되고 지금 역사하고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는 시대인 것입니다. 우리가 못나서 이 일에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거죠. 하느님은 신실하게 일하고 계신데 말입니다. 인류가, 인류 역사 내내 진리와 정의를 추구했습니다. 혁명도 하고 전쟁도 하고 교육도 시키고 반성도 하고 유엔도 만들고 별의별 짓을 다 했지만 언제나 하느님은 빼놓고 있습니다.

그 사실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께 신실한 자가 되도록 하느님이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예수 안에서 불러 내 백성 삼았으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살아라. 네가 못 났다고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너희들의 힘으로 유지되는 약속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내가 한 약속이다. 못 담을 것이 없다라고 역사적으로 못을 박아놨죠.

BC가 아니죠. 지금부터 2023년 전에 정확한 숫자는 한 번 집에 가서 세어 보십시오. 그게 로마서가 하고 싶은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죠. 복음의 기쁜 소식은 제가 써왔으니까 읽죠. 우리가 우리를 섬겨 우기고 기만하고 과장하고 절망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시겠죠?

거기 나온 단어마다 다 가슴이 찔리죠? 구원이란 오직 자비로우신 창조주 하느님의 통치와 보호 아래에 있다는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하느님의 일하심 속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지지고 볶는 그것.

예수님이 33년간 살았는데 그의 삶을 다 기록한 것이 복음서가 아니다. 마지막 3년 공생에만 기록했는데 그것도 다 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는 지지고 볶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린 그걸 간과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인생을 살면서 제일 크게 놀라는 것은 자유가 뭐냐 하는 것입니다.

자유란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기 위하여 자기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닌 것은 자유와 행복을 가져다 준다가 거짓말이었다는 거 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현대사회에 이르러 행복을 위해서는 자유가 아니라 권력이 있어야 된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 책임을 국가가 져야 된다는 것이 현대사회입니다.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을 지라는 것이죠. 나의 행복을 위하여. 그 직전까진 뭐였다고요? 그게 자유였어요. 개인으로는 힘이 없어서 행복을 못 가진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권력으로 옮기고, 국가에 요구하여 행복을 부지런히들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힘들어합니다. 답이 없습니다. 국가가 통치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민원 해결만 해야 되니까 그것도 못해먹을 일이 됐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자유가 뭔지 모르는 것이죠.

 

요한복음 8장에 이렇게, 성경에는 자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한8,31-3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진리가 자유를 준답니다. 진리가 뭐죠? 옳은 것 아닙니다. 예수 자신입니다. ‘내가 곧 길이고 진리고 생명다.’ 이 간혹 오해하는 거죠. 우린 진리가 어떤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원칙. 무인격에게 자신을 바치곤 합니다. 무인격은 융통성이 없어요.

예수가 진리라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이냐?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표현인지 아십니까? 인격자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거든요.

인격은 융통성이 있습니다. 타협하고 망가지는 것 말고, 혼란과 부패를 하는 무원칙이 아니라, 원칙보다 더 큰 것을 만들어내는 자비, 은혜 말입니다. 불쌍히 여긴다. 이해한다. 용서하고 사랑하고 축복한다. 이런 것은 원칙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이 가지는 의지요. 성품입니다.

자유는 예수 안에만 있습니다. 어떻게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께 신실한 자가 되므로 하느님의 신실하심의 통치 아래 들어가면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격의 부요함을 알게 됩니다.

법이나 도덕이라는 것은 최저선이죠. 그 위가 쌓여야죠. 여름날의 뭉개 구름처럼, 깊은 숲처럼, 깊은 바다와 망망한 바다처럼 크고 넉넉하고 무한하고 풍요로운 인격과 성품의 자유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로마8,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아니 신앙이든 실존이든 우리 삶 속에 두려움이 따라오는 이유는 우리들이 불안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한계를 알기 때문이고, 우리가 위험 아래에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기면 우상과의 관계에도 어떤 대가를 치르지 않고는 얻을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어느 신을 섬겨도 불안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다른 모든 것과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표현 중에 하나가 두려움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1요한4,18) 그걸 여기서 얘기합니다.

아버지와 자식이라는 관계는 두려움이 있지 공포가 있지 않습니다. 매를 맞을 수도 있죠. 꾸중을 들을 수도 있죠. 근본적인 공포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날 죽일 것 같애. 그렇게는 생각 안 합니다. 배짱이죠. 무슨 배짱? 나 더 때리면 집 나갈 거야. 이게 공포와 다른 것입니다. 기도할 때 써먹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내 안에 있는 부요하심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안심이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요하심에 대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맨 밑바닥을 차지하는 그 뿌리, 하느님이 누구신가? 하느님이 내게는 어떤 존재인가? 나는 어떤 가치가 있는가에 이 안심, 이 항복, 이 자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복음입니다. 우리가 이미 고백하고 가지고 있고 그 지위에 있는 신앙입니다. 우리의 못난 것이 우리를 늘 자책케 하고 혼란케 할 수 있어, 하느님이 그러시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신에게 준 하느님의 명예를, 위대함을 알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이 기회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로 깨닫게 하시며 살 찌우시고 알게 하십니다. 그것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생각 않고 사는 매 순간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순간들인가를 기억하는 신자(信者)된 고백과 희망과 믿음이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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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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