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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6) 유다인의 율법(律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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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12-26 조회수63 추천수2 반대(0) 신고

 

 2021년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2023. 12. 26. (화요일)

 

로마서6) 유다인의 율법(律法)

 

(로마2,17-29)

17 그런데 그대는 자신을 유다인이라고 부르면서 율법에 의지하고 하느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을 배워 하느님의 뜻을 알고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할 줄 안다고 합니다. 19 또 자신이 눈먼 이들의 인도자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의 빛이라고 확신하며, 20 율법에서 지식과 진리의 진수를 터득하였으므로 어리석은 자들의 교사이며 철없는 자들의 선생이라고 확신합니다. 21 그렇다면 남은 가르치면서 왜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왜 그대는 도둑질을 합니까? 22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그대는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왜 그대는 신전 물건을 훔칩니까? 23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그대는 율법을 어겨 하느님을 모욕합니까? 24 과연 성경에, “하느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모독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5 그대가 율법을 실천하면 할례는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율법을 어기면, 그대가 받은 할례는 할례가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26 그러니 할례 받지 않은 이들이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면,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27 그리하여 몸에 할례를 받지 않았으면서도 율법을 준수하는 이들이, 법전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았으면서도 율법을 어기는 그대를 심판할 것입니다. 28 겉모양을 갖추었다고 유다인이 아니고, 살갗에 겉모양으로 나타난다고 할례가 아닙니다. 29 오히려 속으로 유다인인 사람이 참유다인이고,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할례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칭찬을 받습니다.

 

로마서 118절 이하에서부터 320절까지 복음을 설명하는 바오로는 인류가 예외 없이 모두 다 하느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하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있습니다. 복음이, 복음이 되는 까닭은 그것 없이는 해결될 수 없는 자리에 있다. 이것을 먼저 증명해 보이는 것이죠.

우리는 118절 이하에서는 어떻게 우리가 심판(審判) 아래 있는가를, 하느님을 알 만한 것이 있음에도 하느님을 우상(偶像)으로 바꾸고 자기 욕심대로 살아 더럽게 된, 스스로 심판의 길을 간, 인류를 고발하는 바오로의 말을 보았습니다.

2장에 들어와서는 그것이 남들 잘못하는 거 보고, “어 그거 잘못하는 거다. 그러면 안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그러면 안 된다를 안 하고,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답이 있어야 된다가 2장입니다. 그러니까 213절에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율법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대로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얘기했죠. 그러니 아는 것, 지식이 실체가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자가 실체가 되는 것. 모르면 실체가 될 수 없고, 아는 게 실체가 아니라 아는 걸 실행해야 드디어 자신이 그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17절 이하의 말씀은 이 일에 이렇게 모두가 심판 아래에 있다는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들 한 부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루는데, 그것이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는 선민이고 하느님의 율법을 받았으며 할례를 갖고 있으니 우리는 하느님의 심판 아래 있을 리가 없다.” 라는 질문과 도전이 가능하다 라는 전제 아래서, 어떻게 유대인도 동일하게 심판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는가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7장으로 가보죠.

 

(예레7,1-7) 1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 2 주님의 집 대문에 서서 이 말씀을 외쳐라. “주님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서는 유다의 모든 주민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3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겠다. 4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

5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6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7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예로부터 영원히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에 살게 하겠다.

 

이렇게 꾸짖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를 일으켜 성전 문 앞에 서서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다, 이것이 야훼의 성전이다,” 그게 무슨 말이죠? 우리가 지었다. 우리가 지었다. 네가 하느님께 성전을 바치면 네 임무가 끝나고 네가 하느님으로부터 호위를 받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라.

나를 위하여 성전을 짓고 와서 제사를 할, 나를 알고 내 앞에 엎드릴 지식과 신앙이 있거든 그것의 실체를 보여라. 여기 있는대로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는, 그것이 선행이기 때문에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가지시는 속성, 기뻐하시는, 우리를 부르시는 실체의 본질입니다.

자비와 정의, 그걸 행하지 않고 다른 무엇으로 그 내용을 소유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장면이 조금 더 읽겠습니다.

 

(예레7,8-11) 8 그런데 너희는 그런 빈말만 믿어 안심하고 있다. 그러다가 모두 허사가 된다. 9 너희는 훔치고 죽이고 간음하고 위증하고 바알에게 분향하고 있다. 알지도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라 가고 있다. 10 그리고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찾아 와 나의 앞에 나서서 살려 주셔서 고맙다고 하고는 또 갖가지 역겨운 짓을 그대로 하고 있으니, 11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너희가 하는 짓을 나는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게 옛날 표현이라 완곡하게 되어 있는데요. 이게 아주 서슬이 시퍼런 말이죠. 너희들이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거짓 맹세하고 우상숭배하면서 성전에만 들어오면, 와서 제사만 드리면, 우리는 할 거 다 했다 그러느냐? 말이 되느냐? 이런 겁니다.

현대어 번역을 제가 한 번 쓸 작정입니다. 아 시퍼런 현대 성경 이런 거 하나 쓸, 그러니 조심해야 될 문제죠. 유대인이 선민이라는 지위, 율법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베풀었다는 것이 실체를 대신할 수 있느냐? 실체의 증거가 될 수 있느냐? 그렇지 않다. 본문에 돌아와서 보면 확실해지는데, 이 표현을 본문에서 이렇게 똑같이 쓰고 있습니다. 220절부터 보겠습니다.

 

(로마2,20-23) 20 율법에서 지식과 진리의 진수를 터득하였으므로 어리석은 자들의 교사이며 철없는 자들의 선생이라고 확신합니다. 21 그렇다면 남은 가르치면서 왜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왜 그대는 도둑질을 합니까? 22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그대는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왜 그대는 신전 물건을 훔칩니까? 23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그대는 율법을 어겨 하느님을 모욕합니까?

 

놀랍지 않아요? 하느님을 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산다. 우리는 선민이다. 라고 말하는, 하느님을 섬기는 법으로 제시된 그 가장 중심이 되는 십계명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마라. 피조물의 형상으로 신을 만들지 마라. 내 이름을 망령(妄靈)되이 일컫지 마라. 이 모든 걸 범하지 않았습니까? 율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행해서 자신의 실체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이 예레미야 7장의 경고는 너희는 내가 실로에서 행한 일을 회고해 봐라 라는 말로 이어지는데 실로에 행한 일이라는 건, 사무엘상 4장에 나오는 이 사건입니다. 유명한 사건이죠. 봐두고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1사무4,1-11) 1 그리하여 사무엘이 하는 말은 그대로 온 이스라엘에 통하게 되었다. 그 무렵, 불레셋군이 스라엘을 치러 몰려 오자, 이스라엘군도 그들을 맞아 싸우려고 출동하였다. 이스라엘군은 에벤에젤에 진을 쳤고 불레셋군은 아벡에 진을 쳤다. 2 불레셋군이 이스라엘군을 향하여 열을 지어 싸움을 벌였는데, 이스라엘군은 불레셋군에게 패하여 싸움터에서 죽은 군사가 사천 명이나 되었다. 3 군사들이 진영으로 돌아 오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부르짖었다. '야훼께서 오늘 우리를 불레셋군에게 패하게 하시니, 이런 변이 어디 있느냐? 실로에 있는 야훼의 계약궤를 모셔 오자. 그것을 우리 가운데 모시면 적군의 손에서 우리를 구해 내실 것이다.' 4 그리하여 진영에서 사람을 실로에 보내어 거룹을 타고 만군을 거느리시는 야훼의 계약궤를 모셔 오게 하였다. 당시에 그 계약궤를 모시고 있었던 사람은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였다.

5 야훼의 계약궤가 진에 도착하자 온 이스라엘군은 땅이 진동하도록 함성을 올렸다. 6 불레셋군은 이 함성을 듣고 '히브리 진영에서 저렇게 큰 함성이 터지니 웬일이냐?' 하며 웅성거리다가 야훼의 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7 불레셋군은 겁에 질려 소리쳤다. '이스라엘의 신이 진영에 들어 왔으니 이제 우리는 망했구나. 이런 일은 일찌기 없었는데, 8 이제 우리는 망했다. 누가 저 무서운 신에게서 우리를 살려 내겠느냐? 갖가지 재앙과 질병으로 에집트인들을 친 신이 아니냐! 9 그러니 불레셋 사람들아, 힘을 내어라 사나이답게 싸우자! 지금까지는 히브리인이 우리를 섬겼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들의 종이 될 판국이니, -사나이답게 싸우자!' 10 이리하여 불레셋군이 짓쳐 들어 오자 이스라엘군은 크게 패하여 제각기 자기 천막으로 도망쳤다. 이스라엘군은 보병이 삼만이나 쓰러졌으며 11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었다.

 

생생한 역사, 법궤를 갖고 있으며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스라엘이 법궤를 앞세워 나가, 법궤가 없이 싸워서는 사천 명이 죽고, 법궤를 앞세우자 삼만 명이 죽는, 그리고 법궤를 빼앗기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사야 52장에 가면,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입니다.

 

(이사52,1-5) 1 깨어라, 깨어라. 너 시온아, 힘을 내어라. 찬란하게 몸을 단장하여라.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아!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너에게 들지 못하리라. 2 먼지를 털고 일어나거라. 포로가 되었던 예루살렘아! 너의 목에서 쇠사슬을 끌러 버려라. 포로가 되었던 내 딸 시온아! 3 그렇다,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값없이 팔려 갔으니, 너희를 물러 내는 데 돈을 내야 할 까닭이 없다.' 4 그렇다, 주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의 백성이 처음에는 에집트로 몸붙일 곳을 찾아 내려 갔었고, 나중에는 아시리아한테 억눌려 큰 고생을 하였다. 5 그런데 내가 이러고만 있을 때가 아니지.' 야훼의 말씀이시다. '나의 백성은 억울하게 붙들려 가 고생하고, 그들을 마구 부려 먹는 자들은 개가를 부르는데,' 야훼의 말씀이시다. '나의 이름은 날이면 날마다 멸시당하고 있구나.

 

이집트에 잡혀 있었던 경우와 아시리아에 망했던 북왕조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렇게 모아, 함께 놓고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세상이, 나를 모르는 나라들이 늘 괴롭히고 있는데,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로 인하여 쫓겨간 것입니다. 아시리아와 바벨론에 포로로 쫓겨왔죠.

그리하여 하느님의 이름이 종일 모욕을 당하십니다. “내 이름이 모욕을 당하니 내가 참고 있겠느냐라고 구원을 말씀하시는 이 내용 속에 '너희는 왜 쫓겨가고, 나는 왜 모욕을 받는가 생각해 보라'가 같이 들어 있죠.

모든 열방(列邦) 앞에 하느님의 구원과 복의 제사장이 되도록 부름 받아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 하느님의 약속,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성립된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과 교제하며 그 복을 누리는 모든 일에서 실패하자, 이스라엘을 세워 찬송 받으시고 그 은혜를 모든 인류에게 주시려던 하느님의 뜻은 깨집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가만 놔둘 수가 없습니다. 그들도 죄를 자초했으니까요. 그것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그들에게 벌(심판)이 임한 것만 문제가 아니라 그로 인하여 하느님의 이름이 더럽혀집니다. 선민이라는 이유로, 무엇이 옳은지 안다는 이유로, 율법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그 지위가 아무런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라고 얘기하는 거죠. 옳은 것을 알고 하느님을 안다면 그 아는 것을 실체화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지식(知識)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자신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본인에게 부끄러움이 되듯, 허풍쟁이가 되듯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섬긴다는 말은 그것을 실체화하여 자신들을 하느님의 자녀라는 하느님의 의지와 목적에 맞게 스스로를 하느님께 맡겨 인류가 스스로 만들 수 없는 하느님의 목적을 그 은혜로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그들은 책임에 전혀 자격이 없는 불성실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가 바벨론 포로로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막막한 세월을 지나야 했던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聖徒)들에게도 그 인생이 막막해 보이는 이유는, 아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그 싸움, 예수를 믿는다는 말, 십자가를 따라간다는 말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에 실패하는 까닭입니다. 믿고 십자가를 알고 있으니 책임(責任)은 없고 보상(報償)만 있다고 쉽게 생각하는, 그 스스로 자신을 속인, 스스로가 만든 낙관 속에 아마 길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오늘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멸망을 앞에 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런 꾸중을 합니다.

 

(아모5,21-24) 21 '너희의 순례절(절기)이 싫어 나는 얼굴을 돌린다. 축제 때마다 바치는 분향제(번제. 소제) 냄새가 역겹구나. 22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과 곡식제물이 나는 조금도 달갑지 않다. 친교제(화목제)물로 바치는 살진 제물은 보기도 싫다. 거들떠보기도 싫다. 23 그 시끄러운 노랫소리를 집어치워라. 거문고 가락도 귀찮다. 24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공의)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

유명한 말씀이죠.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고 사회를 어떻게 건강하게 더 낫게 만들려고 할 때, 가장 자주 쓰는 인용입니다. ‘정의(正義)를 물같이 공의(公義)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너 혼자 믿고 너 좋다고 숨어다니지 마라. 사회적 책임을 져라, 할 때, 제일 많이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린 깊이 음미해야 됩니다. 오늘 있었던 유대인을 향한 꾸중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으면 십자가를 알면 그게 실체냐 이거죠. 그게 그것을 믿은 내가 십자가와 예수로 어떤, 어떤 존재가 되느냐 하는 문제에서 아까 얘기했던 예레미야 7장과 마찬가지로 너희가 실제로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행할 수 없다면 실천하고 있지 않다면 너희들의 주장, 지식, 소유는 다 그것 자체가 실체일 수 없고, 실체가 되지 않은 이상은 심판을 면할 수 없다. ? 하느님은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기에.

이것이 로마서 118절부터 320절에 이르는 심판(審判)의 기준입니다. ‘각각 그 행()한대로 갚으실 것이다.’ 여기에 다 떨어야 되는 겁니다. 그 조건을 만족시키라. 이렇게 간단한 얘기가 아니라, ‘네가 무얼 알고 있느냐?’ 이거죠.

세상 사람은 무지(無知)해서 못 믿었다고 합시다. 우린 알고 있죠. 유대인들은 먼저 알았으며 신약시대 성도들은 예수로 인하여 믿고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몰라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하지 않으면, 몰라서 못한 거를 알면 한다고 생각을 하는 대목에 대한 공격입니다. 아는 것이 모르는 것과 대비되지, 모르고 못한 것과 알고 못한 것은 둘 다 못한 거가 됩니다.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생각을 해야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우리를 뭘로 만들고 있습니까?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을 정말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예언자로서 우리 잘 아는 세례자 요한같이 정말 피를 토하며 외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우리는 그것만 좋습니다. 피를 토했다. 세례자 요한을 봐라. 이렇게 얘기하면 우리 몫이 없어지더라니까요.

예수를 그 따위로 믿어서 되냐?’ 그러면 그게 그 사람의 본체가 아니라니까요. 성경이 얘기하는 것같이 너는 사랑을 하냐? 인내를 하냐? 온유하냐? 겸손하냐? 그렇게 묻는 거예요. 하느님이 그 아들을 보내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구원이 가지는 실제적인 내용이에요.

하느님이 베푸시는 은혜, 우리를 향한 구원은 매우 구체적이라서 그 구원은 성육신으로 인간으로 찾아오십니다. 더 이상 구체적일 수 없죠. 어떻게 하면 더 이상 구체적이겠습니까?

하늘에 무지개가 가득 찬다. 은하수가 가득 흐른다. 땅이 쪼개지고 가운데서 용암이 솟는다. 무엇이 가장 우리들에게서 실제적이겠습니까? 같은 인간으로 오는 것보다 더 무서운 그 분명한 실체가 어디 있습니까? 실체적으로 찾아오셔서 우리의 삶을 사시고, 우시고, 고통스러워 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너도 내가 준 말씀, 네가 믿었다는 내용들을 살고, 죽고, 부활해라.’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나가서 그 설교 최고야! 그렇게 살고, 죽고, 부활하래이러고 말 것입니다. 장담하건데 그럴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얼굴을 펼 수가 없습니다. 죽여버리고 끝이 나야 됩니다. 필리피서 2장으로 갑니다.

 

(필리2,12-16) 12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함께 있을 때에도 언제나 순종하였거니와 그 때뿐만 아니라 떨어져 있는 지금에 와서는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13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14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을 하거나 다투지 마십시오. 15 그리하여 여러분은 나무랄 데 없는 순결한 사람이 되어 이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십시오. 16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키십시오. 그래야 내가 달음질치며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그거 쉬운 거 아니다. 그렇게 말씀하는 셈입니다. 12절에요. 그죠? 그 앞에 11절이 있죠. 당연히. 성경만 보면 모든 생각이 도망을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앞은 계속 앞 숫자가 있습니다. 5절 이하가 이것이었습니다.

 

(필리2,5-8) 5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아까 아모스를 가지고 얘기한 것처럼, 그렇게 꾸짖고 소리 지르면 일이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자기 실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삶처럼 찾아오신 하느님의 구체적인 은혜에 대하여 나 자신이 빛이 돼야 됩니다.

빛을 비추지 말고, 횃불을 들어 비추지 말고, 우리 자신이 빛이 되라는 겁니다. 우리 자신의 실체가 되라고요. 말씀과 약속과 구원과 새 생명의 실체가 돼야 됩니다. 그렇게 살아내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를 보고 빛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2,000년 역사 동안에 그리스도교가 유대인을 경멸했습니다. 예수 못 박은 것들, 그렇게는 정체성이 확보되지 않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바리새인들, 그러면 내가 내 정체성이 완성이 된 게 아니고 유대인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길을 가야지.

말씀을 갖고 있지 않고 말씀을 살아내야죠. 바리새인 같이 표현이 의()가 아니라 내용이 의()가 되어야죠. 포장이 전부가 아니라 내용이 차야죠. 우린 자꾸 그리로 갑니다. 그러니 이 싸움은 실천의 유무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의 유무가 아니라 실체의 의무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실체의 의무를 가지려면, 내가 믿고 내가 고함지르는 것이 나냐? 가장 사소한 도전에 그걸 실제로 내고 있느냐?

그런 차원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이렇게 해라라고 하는 것은 은혜인 것입니다. ()이 상실(喪失)된 마음에 버려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죠? 그게 118절 이하에서 나왔던 하느님 진노(震怒)의 구체적, 현실이었습니다. 마음의 욕정대로 버려두는 것이었습니다. 제 멋대로 살도록.

그런 의미에서 꾸짖고 너 이러면 되냐라고 얘기할 때는 하느님이 그걸 우리 안에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지 마라.’ 복인 것입니다. ‘여길 넘어가지 마라라는 울타리와 움켜잡음이죠.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마라 라고 이렇게 선을 긋고 울타리를 쳐주는 것들이죠. 우린 여기서 벗어나 그걸 외우고 주장하고 고함지르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審判)과 경고(警告)는 복음(福音)을 증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첫 걸음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겠다. 포기하지 않겠다가 너무나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부르시는 예수 안에서의 방법에 대한 이해를 여기서 출발하지 않으면, 우리는 끝없이 예수를 믿는 것이 중립지대에서의 선택이 됩니다.

선택을 미루고 살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미루고 있는 동안은 다 울타리 밖에 있는 겁니다. 버려져 있는 것입니다. 붙잡으러 오시는 손길을 구하고 엎드려 하느님의 통치 아래 있겠습니다. 저를 울타리 밖에 서 있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구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내가 다른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요, 매일의 현실 속에서 도전하는 세상의 위협을 타협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서 하느님 앞에 은혜를 구해야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 바오로의 이 깊고 깊은 그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2코린5,17-19) 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18 이것은 모두 다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해 주셨고 또 사람들을 당신과 화해시키는 임무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19 곧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느님과 화해하려면 순종해야 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이상 무릎 꿇어야 합니다. 그것은 굴복도 아니고 구속도 아니고 손해도 아닙니다. 거기서만 생명과 진리가 나오고 의미와 가치와 자랑과 기쁨이 흘러 나옵니다.

어찌 생명이 우물가를 떠나겠습니까? 하느님의 거룩하심으로 부름받은 거룩한 백성이며 영광된 인생인 줄 아는 주 예수님 안에서 허락하신 은혜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사는 충성과 인내도 배우게 하소서. 누리고 자랑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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