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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 07) 말씀을 맡겨 주셨다. (로마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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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3-12-27 조회수94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1년 1월 25일 월요일 [(백)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2023.12.27. (수요일)

 

로마서 07) 말씀을 맡겨 주셨다.

 

(로마3,1-8)

1 그러면 유다인이 나은 점이 무엇이며 할례의 이로운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2 과연 여러모로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맡겨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3 그런데 어떤 유다인들이 신의를 저버렸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께서도 신의를 저버리시겠습니까? 4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거짓말장이라 하더라도 하느님만은 언제나 진실하십니다. 성서에도, '당신의 말씀에는 언제나 정의가 드러나고 재판을 받으시면 반드시 이기십니다' 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5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느님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는 말이지 6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겠습니까? 7 '나의 허위가 오히려 하느님의 진실을 더욱 드러내고 하느님의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죄인으로 단정을 받아야 하느냐?' 하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8 그뿐 아니라 '아예 선을 드러내기 위해서 악을 행하자' 하는 말이 나옴직도 합니다. 사실 내가 바로 그런 말을 한다고 하면서 나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단죄를 받아 마땅합니다.

 

이해는 하십니까? 여기 우리 번역이 틀린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본문을 그 문자적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거의 직역을 했기 때문에, 어떤 이들이 도대체 누군지 불분명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 번역한 거 하나 읽고 알아들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로마서 1장 마지막에 했던 얘기가 뭐냐 하면, 유대인은 하느님의 심판에서 면제(免除)됐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 였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 하면 선민(選民)이니까 율법을 받았고, 할례를 행했고, 성전을 갖고 있었으니 저들은 하느님의 심판의 대상이 아니고 이미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돼 그 심판과 어떤 단죄의 선 위로 이미 분리된 운명과 신분 아니냐? 그렇지 않다였죠.

할례를 행하거나 율법을 알고 있거나 성전을 지은 것이 당신 자신의 심판과 판정이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내면화하여 본인의 실력으로 갖고 있지 않다면 율법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율법을 행하지 않고도 단죄를 면할 수 있다고 꿈도 꾸지 마라.” 이렇게 됐어요.

 

(로마2,28-29) 28 그러므로 유다인의 겉모양만 갖추었다 해서 참 유다인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몸에 할례의 흔적을 지녔다고 해서 참 할례를 받았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29 오히려 유다인의 속 마음을 가져야 진정한 유다인이 되며 할례도 법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받은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의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칭찬을 받습니다.

 

우리는 성경 읽을 때 대부분 그냥 읽기만 하죠. 그러면 유대인일 필요가 뭐가 있냐? 선민은 왜 뽑았냐? 당연히 나와야죠. 생각해보니까 할례를 주고 율법을 준 것, 성전을 지라는 것이 아무런 유익(차이)이 없다면 도대체 그건 왜 했냐? 유대인은 왜 선민으로 뽑았냐? 그 생각을 해야죠.

그렇게 해서 유대인 된 이익이 있다. 뽑은 이유가 있다. 이게 1절이죠.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레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凡事)에 많다. 하느님의 말씀을 맡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이 찾아와 저들과 교제하시고 그저 그리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너무나 많죠.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과 교제하고 약속을 받고 있습니다.

3절에 나오듯이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려 그 믿지 아니함이 하느님의 신의를 저버렸느냐? 그 맡은 선민으로의 책임을 저들이 실패하지 않았느냐? 그러면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한 약속이 아직도 유효할 수 있느냐? 라고 묻는다면 즉 이스라엘의 실패로 하느님이 인류에게 한 대표적으로 선민에게 한 약속 사장 나라가 되어 모든 민족으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실패하였으므로 하느님도 그 약속을 폐기(廢棄)하셨느냐? 그렇지 않다가 4절입니다.

 

(로마3,4) 4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거짓말장이라 하더라도 하느님만은 언제나 진실하십니다. 성서에도, '당신의 말씀에는 언제나 정의가 드러나고 재판을 받으시면 반드시 이기십니다' 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시편 514절을 인용한 것인데, 그걸 뭐 속속들이 찾아가는 것보다 전체 맥락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결정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하느님이심을 진실하게 지키시고 계셨고, 지금도 그러고 계시고,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다. 이게 답입니다.

유다의 마음이 무엇이며 저들이 받은 실질적인 유익이 무엇이었는지 우리 다시 확인했는데 그것을 저들은 누리지 못했고 지켜내지 못했으나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한 약속과 이스라엘을 통하여 모든 인류에게 주려는 하느님의 약속에 지금도 신실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린 다 잘못했지만 하느님은 우리에 의존하거나, 우리의 결정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으시고 자신의 약속에 충실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를 창세기 12장에서 선민(選民)을 약속하시는 장면에서 이렇게 그 특징이 드러났었습니다.

 

(창세12,1-3) 1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이라는 조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그의 자손들로 이스라엘을 만드실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에게 한 것 같이 아브라함을 불러 그의 민족을 이룰 것, 후손들로 민족과 국가를 이룰 것 같이, 그 민족과 국가를 제사장 나라를 삼아 전 인류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일방적인 약속이고 일방적인 선포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이 약속에 준하여 사는 것은 명예가 되는 것입니다.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런 식으로 그것은 지금 말한 대로 조건이 아니고 명예다. 이렇게 얘기하자. 본문으로 돌아와서,

 

(로마3,5) 5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느님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는 말이지

5절 말씀은, 우리가 불의하고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성실히, 결국은 하느님의 진실하심이 그의 약속을 이루는 거라면 우리가 잘못한 것이 하느님의 의()를 더 빛나게 했으므로 조연상을 줘야 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 덕에 빛나지 않았냐? 여기엔 무서운 선언이 있습니다. 로마서 26절에서 했던 이야기죠.

 

(로마2,6-8) 6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7 꾸준히 선을 행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고 8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진리를 물리치고 옳지 않은 것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진노와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행실(行實) 대로 갚는다.’ 이건 하느님의 철칙입니다. 우리의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자신의 진실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과 똑같이 행한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저 유명한 갈라디아서 67절 이하를 생각해 보십시오.

 

(갈라6,7-8) 7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8 자기 육체에 심는 사람은 육체에게서 멸망을 거두겠지만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둡니다.

 

이건 철칙입니다. 하느님의 진실(眞實)하심과 함께 하느님의 공의(公義)는 동등한 두 개 검()입니다. 우리는 이걸 묶는 과정에서 우리의 죄성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이 그의 신실하심을 자신의 속성과 능력으로 이루신다면 우리에게 왜 책임을 묻느냐? 우리가 열심히 살 의무가 뭐냐? 라고 답변하고 우리가 책임을 져야 된다.

그러면, 우리가 책임진 대로 갚으시어 그렇지 않은 자들은 물리치시고 나를 확인시켜 주십시오. 하느님은 결국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 아닙니까? 로 내려옵니다. 이 둘은 다 억지를 쓰는 겁니다.

하느님의 진실하심을 성경이 증언할 때는 과연 하느님의 자비(慈悲)하심과 용서와 회복과 구원의 능력을 가장 큰 데까지 선언하고 그것이 만들어내려는 하느님의 뜻과 의로우심과 목적하심을 얘기할 때는 그 의로우심에 대해 끝까지 얘기합니다.

이것은 하나는 동()으로 가고 하나는 서(西)로 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은혜 속에는 책임이 있고, 책임 속에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부모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부모가 힘을 다하여 희생하여 자식을 위하여 자기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것은, 자식이 잘나서가 아니라 부모가 자식과 다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합리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합리화를 할 뿐이다. 은혜를 얘기하면, 그러니 뭐? 나 먹고 살든지 하느님이 책임지심으로 책임을 지라. 그러면 하느님, 그럼 내가 한대로 한 거 지금 빨리 다 주십시오. 라고 얘기를 해서 교묘하게 하느님의 두려우심과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과 심판에 대해서 끝없는 핑계를 댑니다.

각자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왜 현실적으로 신앙생활을 못하는가? 못할 수 없거든요.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하느님이 예수를 보내어 그의 구원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사실 도망갈 수도 핑계 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핑계 댈 수 없는, 이 도무지 순종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는 문제에서 늘 슬쩍 넘어가는 거는, 이렇게 오늘 당장부터 분명히 하느님 앞에서 순종을 하든가 안 하고 있으면 내가 잘못한 것이다라고 분명한 사실을 슬쩍 기만(欺滿)하는 것입니다.

너무 힘듭니다. 누구도 잘 안 하던데요.’ 이게 우리가 하는 모든 핑계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를 우리 로마서 본문에서 어떻게 이어서 하는가 보십시오.

 

(로마3,5) 5 우리의 불의가 오히려 하느님의 정의를 드러낸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느님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의 생각으로 하는 말이지 ~

 

여기 핑계되는 우리, 그럼 우리가 잘못해서 하느님의 의로우심이 더 빛이 나지 않았는가? 우리가 악역을 맡아서 하느님이 더 영광을 얻지 않았는가? 라고 말을 하더라는 거죠. 그렇다면 하느님이 어떻게 심판을 할 수 있겠느냐? 그 사람은 주인공을 맡았고 난 악역을 맡았는데 악역을 맡은 것도 개런티를 줘야지, 왜 내가 악역을 맡았다고 나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하는 얘깁니다. 진노를 내리시는 하느님이 불의하냐? 결코 그렇지 않다. 만일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려 우리의 불의가 필요하고 그 조건이 있어야 하느님의 의()가 완성되는 것 아닙니다.

하느님은 완전하게 홀로 의로우시며 공의로우시며 자비하시며 진실하십니다. 우리의 불의와 대조가 됐을지언정 우리의 불의를 필요로 하거나 조건으로 삼는 부분적인 의()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빛이 나는, 우리가 그림을 그릴 때 밝은 색을 칠하기보다 어두운 걸 칠해서 밝은 부분을 강조하는 그런, 제한된 거룩과 공의와 능력이 아니십니다. 홀로 거룩하신 분입니다.

 

(로마3,7) 7 '나의 허위가 오히려 하느님의 진실을 더욱 드러내고 하느님의 영광에 보탬이 된다면 왜 내가 죄인으로 단정을 받아야 하느냐?' 하고 물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느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그러니까 그 위에 있던 나쁜 우리 중에 어떤 나입니다. 아까 말하기를 바오로가 아니라 나의 거짓말로 하느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오?

조금 전에 한 것 같이 내가 한 잘못 때문에 하느님께서 의로우심과 진실하심을 더 두드러지게 사용할 수 있다면, 하느님이 나를 악역을 맡도록, 죄를 짓도록 왜 방임하셨는가? 그걸 극복할 수 있고 우리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진실할 수 있다면 우리의 거짓을 왜 방관(傍觀)하셨는가? 우리의 불성실을 왜 놔두셨는가? 끊임없는 질문이죠.

왜 생명나무는 먼저 먹이지 않고, 선악과는 먹게 놔뒀는가? 그 질문을 왜 한다고요? 책임을 회피하려고, 스스로가 비겁하다는 걸 인정해야 됩니다.

왜 먹지 말라는 거부터 먹었어? 먹으라는 거부터 먹지.” 그렇게 읽어야지 어 선악과는 왜 만들어? 먹으라고 그러면 확 천사가 막든가 기왕 먹어서 죄를 지어서 확 다 죽이고 새로 만들든가?” 이게 우리 모두가 가지는 비겁함의 극치입니다. 지금 나보고 어떡하란 말인가? 할 수 있는 만큼 더 해야 됩니다.

하느님은 의로우십니다. 우리가 나쁜 놈입니다. 여기 자기 이름을 써놓으세요. 그러나 나의 거짓말 다 각각 자기죠 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영화에선 그렇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주인공보다 악역이 잘해야 됩니다. 악역이 악역을 잘 할수록 주인공이 빛이 납니다. 그죠?

유명한 모래시계, 박태수의 친구요. 직속 똘마니였던 그 친구가 악역을 너무 잘해서 다른 역을 그 다음에 못 했다니까요. 그래서 가만 보면 뭐 최민수 씨가 연기를 못 했다기보다도 덕분에 얼마나 빛이 났는지 몰라요.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의 불순종과 우리의 불의함이 하느님의 영광을 더 드러냈는데, 왜 그것을 극복하시고 진실하심과 그의 약속을 이루실 수 있는 하느님이 우리를 버려야 된단 말입니까? 우리가 조연상이라도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단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유다인인 것과 아닌 것, 다시 말해 하느님의 길에 대해 훈련 받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사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차이는 아닙니다. 우선 유대인들에게는 하느님의 계시(啓示) 곧 성경을 기록하고 보존할 책임이 맡겨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 중 일부가 자신의 임무를 저버렸던 것은 사실이지만 하느님은 그들을 저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진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느님도 진실하기를 포기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세상이 다 거짓말을 일삼을 때에도 하느님은 끝까지 당신이 하신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고 참되십니다. 거부를 당해도 주님은 흔들리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악한 행위가 오히려 하느님의 의로운 행위를 분명히 드러내고 확장한다면 그 일로 우리는 오히려 칭찬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 악한 말이 그분의 선한 말씀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그쳐 말에 책임을 묻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바르지 않은 일을 하신다면 어떻게 그분께서 세상을 바로 세우실 수 있겠습니까? 그저 심사가 뒤틀려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나의 거짓됨이 하느님의 참되심을 더욱 영광스럽게 드러내 준다면 왜 내가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하느님한테 좋은 일을 하는 것인데 (라고 말이죠,)

실제로 어떤 이들은 우리가 악을 더 많이 행할수록 하느님은 선을 더 많이 행하시니 악을 더 많이 행하자고 말하며 다닌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순전히 중상모략인 것을 여러분도 잘 알 것이라 믿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신앙생활 하라그러면 언제나 이 문제를 걸고 넘어졌지 않습니까? 하느님 어쩌란 말입니까? 잘 살 실력은 없고 잘못했는데, 용서한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용서하셨으면 책임지셔야죠.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는 게 와서 회개하고 울고 가면그다음부터는 다 하느님 책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로마서 31절에서 8절에, 이 지적으로 인하여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대하여 이런 깊은, 그럼 성경에 도전을 받고 있고, 지적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됩니다. 출애굽기 194절입니다.

 

(출애19,4-6) 4 '너희는 내가 에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희를 어떻게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로 데려 왔는지 보지 않았느냐? 5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 6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 줄 말이다.'

 

그들은 책임을 지게 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크게 영광스러운 책임을 지게 됐죠. 명예로운 존재가 됐죠. 이 사실을 다 놓칩니다. 짐을 졌다고만 생각하지, 명예를 부여받았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 다른 민족은 지지 않을 짐을 지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라는 명예와 하느님이 지시하신 거룩한 길로 초대받았습니다. 저들은 실패했습니다.

오늘날도 똑같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으로 사는 영예를 스스로 외면한 그 실패를 반복하지 마시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시나이산에 강림하여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계시(啓示), 하느님의 개입, 자신을 나타내심, 간섭하심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큰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으로 오셨고 우리 실전과 현실에 찾아와서 우리를 움켜주셨습니다. 에페소서 1장으로 돌아와서 신약 성경에는 이런 식으로 이 말씀이 권면됩니다.

(에페1,3-12)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4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6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은총으로 8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을 넘치도록 주셔서 9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시켜 이루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세워 놓으셨던 계획대로 된 것으로서 10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11 모든 것을 뜻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따라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택하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12 그러므로 맨 먼저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복음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 맞습니다. 그걸 더 깊이 이해하시오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하느님이 하시겠다는, 그의 깊으신 뜻을, 그의 거룩하신 목적을 타협하지 않고 포기하시지 않고 방해받지 않고 기어코 이루겠다. 그게 예수를 믿는다.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우리 측면에서만 이해하지 말고 하느님이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구체적으로 일하셨는지를 확인하십시오. 두려워해야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을 제가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는 하느님과 화해하라.”

두렵게 듣고 영광으로 이해하시오. 예수 믿는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하고, 대강 살고, 일이 있을 때마다 아까 같이 합리화해서 슬슬 도망 다니지 마시오.

 

기도합시다. 하느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그 아들을 보내셨고 그의 죽음과 부활로 새 시대를 여셨습니다.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말씀을 주셨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에 그 두려움과 거룩함과 정의와 자비와 용서와 그 복된 약속을 나누게 하셨습니다. 예수의 탄생과 그 생애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이 명예로운 길을 갈 수 있는 믿음과 충성과 기쁨과 순종을 주소서.

헛된 세상에 지지 말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하느님이 함께하시는 인생의 명예를 지키게 하소서. 모두가 사는 것이 힘들다고 희망이 없다고,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교육과 문화와 모든 비겁한 책임 회피를 할 때 하느님이 일하신다고 믿는 신자들로서의 책임을 지켜내어, 우리야말로 진리 안에 있고, 빛으로 사는 사람들인 줄, 이 시대에 일하시는 하느님의 음성과 손길과 간섭으로 우리 자리를 지키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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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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