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8) 율법은 죄를 알려 줄 따름 (로마3,9-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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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12-28 | 조회수5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23.12.28. (목요일) 로마서8) 율법은 죄를 알려 줄 따름 (로마3,9-20) 9 그러면 우리 유다인이 나은 점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내가 지적했듯이 유다인들이나 이방인들 이나 다 같이 죄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10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비뚤어져 쓸모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며 그들의 혀는 거짓을 말하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흐르니 14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다. 15 그들의 발은 피 흘리는 일에 날쌔며 16 간 데마다 파괴와 비참을 남긴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18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19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그 율법이 명령하는 모든 것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은 말문이 막히게 되고 온 세상은 하느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아무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 줄 따름입니다. 오늘 말씀은 어렵지요. 인류의 보편적인 죄상을 나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것이 역사요 현실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역사는 이 비극으로 연결되어 있고 인류 역사는 한 걸음도 향상되지 않고 있습니다. 계속 새로운 것에 정신을 팔게 해서 쫓겨가고 있는데 모르고 있습니다. 자동차 타는 맛에, 비행기 타는 맛에, 명품 가방 드는 맛에 잊고, 이 비극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삶을 부정하거나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고 진지하게 연구한 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내놓은 이 결론을 음미하자는 것입니다. ‘역사는 의식이 없다. ’무슨 역사는 정신이 없다보다 더 간 거죠. 정신, 의지, 목적 말고 의식, 감각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고급 경지에 이르면 다 인간이 하는 어떤 업적이든 운이 있어야 된다는 걸 인정합니다. 그렇죠? 정상급 고수가 되면 어떤 승부에서나 어떤 학문적 성취에서나 어떤 발명에서나 어떤 운이 있어야 된답니다. 거북이 등을 보고 발견한 육면체의 유기화학, 그런 어떤 뭐가 우연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목적을 가지지도 않고,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것에 부닥쳐 만들어낸 기적들이죠. 그러니 우연히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 우리가 만드는 것은 이런 성경이 제시하는 역사 내내 증언된 것 같이 오늘날에도 불안과 공포와 혼란과 체념과 후회들로만 묶여 있습니다. 여기 있는 오늘 본문에 가장 중요한 인용들 10절 이하에서부터 18절까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성경이 굳이 이렇게 지적하지 않아도 우리의 삶 속에서 봅니다. 한눈 팔면 뒤통수 맞는다는 걸 다 알고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걸 준비하고 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 체념과 도박과 그 자폭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 수 밖에 없지요. 그러니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이 늘 소원하는 것 같이 ‘세상은 믿을 수 없으나 하느님은 믿을 수 있으니, 하느님 어떻게 좀 해주십시오’ 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요한 관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본질도 아니고 목적지도 아니고 관문이 되었죠. 오늘 본문 같이 의인은 하나도 없고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고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고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고 입술에는 독사의 도끼 그리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르고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고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고, 하느님을 찾지 못하는 이것을 하느님이 해결해 주셔야지, 우리에게 물으시고 우리를 지적하시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라는, 어떤 반발에 부딪쳐야 됩니다. 우리가 이럴 수밖에 없다는, 그럼 하느님이 해결을 해주셔야지. 여기 길이 있다고 얘기를 하셔야지. 이 질문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성경을 읽을 때에는 다 답이 없어서, 무슨 방법이 없어서 마지막 희망으로 성경을 여는 것입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읽지요. 창세기죠. 창세기를 읽으면 그 우리가 감동할 만한 얘기가 없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얘기가 나옵니다. 아주 중요한 얘기가 그저 단 한 절에 불과합니다. ‘한 처음(太初)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만들고 만들고 만들고 인간도 만들었다. 인간이 타락했다. 거짓말하고 저주 받았다. 그 아들들의 하나가 하나를 죽였다. 그런 이야기들로 노아 홍수라는 대로 전멸하는 것이 시작이지, 무슨 위로와 무슨 답을 찾으시겠습니까? 그 동일한 경험, 현실 속에서 찾아간 하느님이 다시 무서운 얘기를 하고 있다면, 그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걸까요? 성경에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예언서들이라는 구약의 마지막 책들이 있습니다. 이사야로부터 시작하여 말라기로 끝나는 여러 예언자 이야기가 있는데, 그 예언자들의 활동 시기는 대략 기원전에 8세기에서 7세기 어간에 활동했습니다. 북 왕조 이스라엘이 망하던 시기, 남 왕조 유다가 망하던 시기, 그 멸망을 예언하고 회개를 촉구하고 받은 바, 심판 속에서 하느님의 회복을 약속하고 회개해야 그 회복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예언자들의 임무였습니다. 가장 독특한 인물은 아마 예레미야였을 겁니다. 예레미야는 ‘너희는 망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치적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이다. 그러니 달게 받으라.’ 그게 그의 사역(使役)이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좋아했겠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미워했죠.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포기한단 말이냐? 그의 크신 이름의 영광을 포기한단 말이냐? 너는 예언자가 되었으면 하느님 앞에 기도하여 이 나라에 복을 다시 끌어들여야지 저주를 하고 있느냐? 너는 매국노에 틀림없다, 라는 대척을 받아 정확한 자료는 안 남아 있지만 그는 아마 빈 통나무 속에 넣고 톱으로 켜서 죽음을 받았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아 어려운 사역을 했겠죠. 아 이러한 일들은 다 예레미야 자신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 증언되어 있는데, 예레미야 7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레7,1-7) 1 야훼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이다. 2 '너는 야훼의 성전 대문에 가 서서, '야훼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 오는 유다 사람은 모두 야훼의 말씀을 들어라' 하고 이렇게 큰 소리로 일러 주어라. 3 '나 만군의 야훼가 이스라엘의 하느님으로서 말한다. 너희는 생활태도를 고쳐라. 그래야 나는 너희를 여기에서 살게 하리라. 4 이것은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 야훼의 성전이다- 한다마는 그런 빈말을 믿어 안심하지 말고 5 너희의 생활태도를 깨끗이 고쳐라. 너희 사이에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여라. 6 유랑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말라. 이곳에서 죄없는 사람을 죽여 피를 흘리지 말라. 다른 신을 따라 가 재앙을 불러 들이지 말라. 7 그래야 한 옛날에 너희 조상에게 길이 살라고 준 이 땅에서 너희를 살게 하리라. 회개하랍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 성전을 짓고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정당한 정의를 행하라. 이웃 앞에 공의를 행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공의를 행하는 것이 성전을 짓는 것보다 낫다. 이렇게 들리지요. 성전을 지은 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의 정상화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공의를 행하는 열매는 당연히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 이전에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 비유를 들어, 포도나무에 붙는 것이 제한이냐?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는 것이 속박이냐? 아니죠. 그러면 거기에 맺히는 열매는 줄기에 붙어있는 현상입니다. 결과이기보다도 줄기에 가지가 붙어 있는 증상, 현상이 뭐냐? 열매가 달리죠.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어 있으면 이웃과의 사랑이라는 것이 그 증상으로 나타난다, 이 뜻입니다. 너희가 이 증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열매가 나타나지 않으면, 너희가 성전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너희 할 책임을 다했다 라고 거짓말 할 수 없다, 이야기입니다. 이걸 오늘 본문에서는 뭐라고 얘기하냐면 율법을 들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가치가 뭐냐? 율법은 하느님의 공정함을 드러낸 하느님의 공의로우심의 한 증거였다. 하느님은 도덕성이 있는 분이요 질서가 있는 분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너희는 그 율법으로 하느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으로 인하여 하느님으로 가는 길을 스스로 차단했는데, 그 법을 지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께 가는 길을 막았다. 나는 법을 지켰다. 학교 다닐 때 밤을 새워서 공부한다 라는 뜻을 아시죠? 저도 밤을 새워봤습니다. 계속 공부를 하진 않았습니다. 밤은 새봤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와서 졸아봤습니다. 너 밤 샜냐? 네. 그런데 왜 성적이 이꼴이냐? 할 말 없음. 그렇게 됐죠. 율법 자체는 의지를 가진 인격이 아닙니다. 그것은 추상적, 규칙, 기준입니다. 성경이 지금 얘기하고 싶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뭐냐? 하느님이라는 창조주 인격자가 그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인격에게 관계를 정상화하자 그러는 것입니다. 인격과 인격의 관계를 회복하자. 그 일을 위하여 하느님이 그 아들을 보냈다라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를 씻음 받고 천국을 간다.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그걸로는 부족한 내용을 얘기합니다. 한 인격이 한 인격을 인격으로 만들고, 인격으로 대접하여 그 인격과 자신을 묶고로 찾아오신 성의에 관한, 의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추상화해서 하느님은 없고 법을 지킨 나와, 법을 지키지 못한 너로 나누어, 지킨 사람이 보상을, 지키지 못한 사람을 비난하고 단죄하는 것으로 끝내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작 찾아야 할 하느님은 찾지 못하고, 정의니 평화니 사랑이니 하는 말은 무성하되 우리는 무서운 현실을 한 번도 개선해보지 못하고 인류 역사가 여기까지 반복적으로 비참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의와 평화와 법을,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서로를 죽였던 가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일은 가장 나쁜 범죄, 부도덕한 부패된 정권에서 일어난 것보다 이상을 추구하는 정부에서 일어난 것이 더 컸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입니다. 인간을 기계공학적으로 재단을 해버렸죠. 그러자 당연한 인간성, 용서, 윤리가 사라졌습니다. 아 눈에 아무런 인격성도 인간성도 없이 법을 집행했죠. 이상을 조작했죠. 그게 성경이 하고 싶어 하는 이야깁니다. ‘너희의 삶에 다른 거 다 그만두고 이렇게 쩔쩔매고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봐라.’ 그리고 모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하는 이 지적과 같이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 공법이 시행되거나 정의가 창출될 수 없다. 너희가 알지 않느냐? 모든 싸움은 도덕적 부패가 아니라 그것은 다시 추상명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기심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만족을 채우기 위하여 이웃을 잡을 수밖에 없는, 이웃을 해(害)할 수밖에 없는 이기심, 그 욕심(慾心)과 그 거짓 그리고 그 두려움 때문입니다. 무섭지. 1등을 하려면 내 앞에 선 자들을 다 죽여야 1등이 됩니다. 실력으로 이기면 좋지만 실력으로 1등이 될 수 있는 사람은 하나고, 전부 줄줄이 뒤에 서야 되는데, 그들이 1등을 회복하고 1등을 획득할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나보다 앞선 자들을 죽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인류 역사를 이렇게 무서운 자리에 몰고 가고 있는데, 우리는 끝없이 추상명사를 난발하고 있습니다. 양보하면 되는데, 자족하면 되는데, 이해시키면 되는데 말이 안 되잖아. 그런 것으로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요? 하느님이 인간을 그 정도로 내버려두지 않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레미야를 통하여 너희 바벨론에 항복해라 이것이 하느님의 심판이다. 그 심판을 감수하라 라고 얘기하자 기절들을 해버렸죠. 우리 삶을 우리들이 하느님 없이 사는 세상이 무엇인가를 감수하는 마음으로 살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인생의 답을 찾을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하느님이 이 무시무시한 현실을 왜 연장하고 계시는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의 오심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뜬금없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 믿고 천국갑시다’ 라는 말은 근거를 잃고 그 이유를 잃게 됩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비유가 씨뿌리는 비유입니다. (마태13,10-15) 10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11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12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사야가 일찌기,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고 말하지 않았더냐?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늘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여 모두 알아듣지 못하게 하신다는 말씀에 대하여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말을 해야 된다는 게 무슨 말일까? 그럼 말씀을 하지 말든가, 했으면 알아듣게 하든가,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하셨답니다. 이게 성경이 지적하고 싶은 어떤 중요한 사실에 대한 성경적 표현입니다. 예레미야의 얘기와 같죠. 이것은 하느님의 심판이니 순종하라는 얘기죠. 이사야는 이렇게 소명을 받습니다. 이사야 6장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고맙다. 가라. 그래 네가 가서 말해도 못 알아들을 것이다. 가라.” ‘못 알아들을 것이다. 가라’가 뭘까요? 예수님이 오심이 그렇잖아요. 그가 누군지 우린 몰랐습니다. 이사야 53장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예수가 그렇게 오십니다. 못 알아보게 오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죠. 예수 믿는 게 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스스로가 그렇지 않습니까? 이거 왜 믿는지 우리가 모르죠. 안 믿을 수는 없는데, 믿어도 모를 바로 그것. 그게 뭘까요? 우리가 기대하고 이해하는 것보다 높은 하느님의 목적, 뜻, 포기하시지 않는 하느님의 의지, 거기 교차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기대하는 것 정도로 내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 나는 너희를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했고 그것을 난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요청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데 하느님은 그의 일을 하고 계신다는 거죠. 그러니 우리가 납득하지 못하는 지금의 지위, 형편, 그 하느님이 일하시는 거라고 성경이 얘기하는 겁니다.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한다.’ 그거를 적용하라구요. 저도 제가 답답해서 그래요. 하느님이 저렇게 딱 째려보면 확 빛이 나고, 기도하면 병이 탁 낫고, 그러면 서로 얼마나 좋아요?. 그걸로는 못 오는 자리다. 그러시는 거예요. 그거 너희가 해결해 달라는 것보다 큰 해결, 더 큰 자리에 가기 위해서 나는 타협하지 않는다. 너희가 만들면 어디까지 밖에 올 수 없는가를 봐라 그게 역사입니다. 역사, 현실, 우리의 실존들입니다. 우리의 기대와 얼마나 다릅니까? 믿으면 다 해결이 될 것 같은 그 감격으로 시작을 다 했는데 실재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된 것은 없고 짐만 하나 더 늘었습니다. 싸우다가 상당히 마지막에 “너 예수 믿는다며?” 그러면 할 말이 없는 짐만 졌지, 얻은 것은 없어 보입니다. 도망갈 수 없게 매일, 주일마다 어려운 얼굴을 하고 오시죠? 오늘은 뭐 기특한 게 있을까? 그럴 리가 없지. 그 교차된 감정이 그냥 얼굴에 이렇게, 그 얼굴을 보고 설교(說敎)해야 되는, 서로 만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각오를 하는 거죠. ‘맞아.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게 끝이라면 난 안 살 거야’를 확인하는 겁니다. 우리가 욕심내는 게 끝이라면 난 인간 안 할 거야. 그런 생각의 자리까지 오는 겁니다. 하느님이 더 큰 거 만드신다니까 내가옵니다. 기다립니다. 그 얘기를 하는 거죠. 율법을 지켰다고 양심을 만족시켰다고 위대했다고 ‘그래서 뭔데?’ 묻는거죠. 그걸 우리 마음에 확인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자면, 예레미야가 하는 성전을 지었느냐? 그러나 너 이웃 앞에 제대로 정의를 실행하지 못하지 않았느냐 라고 묻는 것처럼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와서 물었죠. ‘선생님 계명 중에 가장 큰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첫째는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야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다.”입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첫 번째 것이 깨져 있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결과가 생기거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 첫 번째 게 안됐다는 뜻입니다. 용서(容恕)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용서를 알지 못하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용서를 안 하면 용서를 못 받는 게 아니라, 용서는 받아본 사람만이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해본 사람만 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는가, 신앙이 뭔가‘ 물어 보려면 이걸 물어봐라 그겁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는가?’ 그게 우리 모든 비극이죠. 사랑을 하면요, 억울하지 않습니다. 아시죠? 하느님은 억울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실을 믿으십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계십니까? 하느님은 억울하신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와 타협하지 않으셨고 우리가 모를 때 그 아들을 보내서 그는 비참하고 오해되고 고통과 수모 속에 죽어서 이제껏 인류 역사에 왜곡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심심하면 그리스도교를 욕(慾)합니다. 예수를 비난하고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우리만이 보복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우리가 물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예수가 하느님의 뜻과 방법에 있어 어떻게 기가 막힌지’를 알아야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힘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누구시고 무얼 하시고 그분에게 내가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고 우리는 힘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비명 밖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게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우리의 현실을 보이는 세상에서의 왜곡을, 감추임을, 억울함을, 예수께서 기꺼이 오셨던 것으로 해석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하루인들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누구에게 떠밀어 당신이 대신 답을 달라고 얘기해서는 안 되는 거죠. 왜? 정치가, 교육이, 교회가, 그러지 말고 우리 각자가 답을 얻어야 됩니다. 어떤 제도, 어떤 명분에 우리를 떠넘겨서 보험을 탈 수가 없습니다. 기계적 장치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각각이 위대해져야 되기 때문입니다. 각각이 하느님과 그 사랑을 나눠야 하기 때문입니다. 귀중한 가치와 명예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체로 넘어가고 제도로 넘어가고 법으로 넘어가고 수단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의 정성, 하나의 업적, 하나의 사건, 하나의 임무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전 인격과 생애로 만들어내는, 운명으로 확보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 다시한번 얘기하죠. 고린도후서 5장을 한 줄로 요약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내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앎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는 하느님과 화목(和睦)하라.’ 제가 덧붙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랑이고 영광이며 명예이며 책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족하는 복을 주옵소서. 기쁨과 자랑을 주시어 우리의 인생을 이 세상에서 예수님 같이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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