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역사는 반복되는가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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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3-12-28 | 조회수146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날마다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삽시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 님한테서.”(시편121,1-2)
답답할 때 저절로 나오는 시편 성구입니다. 요즘 자주 “길은 어디에? 빛은 어디에? 과연 인류에게 희망은 있는가? 역사는 반복되는가? 악순환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가?” 묻게 됩니다. 오늘 복음중 이집트로 피신하는 요셉의 가정을 통해서, 또 헤로데의 무죄한 아기들의 학살을 통해서도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계속 뇌리에 남아있는 두가지 내용들입니다.
“전두광의 ‘절대적 악마화’가 우리를 구원할까. ‘서울의 봄’은 절대적 악마의 현존, 혹은 재림을 경고하고, 그 절멸을 다시 염원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일까. 영화 속 이태신이 절대적 선이라고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물을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난 이태신에게서 그 어떤 씻김의 느낌도 갖지 못했다. 그 역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키워줬을 뿐이다.”
양극단의 분노와 증오, 대결만 있지 구원의 빛은 없습니다. 이러면 악순환의 반복에서 못 벗어납니다. 저절로 구원은 어디에? 묻게 되는 내용입니다. 절대적인 선도 절대적인 악도 없습니다. 양쪽 다 상대적일 뿐이요 이를 깨닫는 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내가 절대 선인양 착각하여 절대 악의 괴물과 싸우다가는 본의 아니게 나도 모르는 사이 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가 되어 싸워야 합니다. 어제 “네번째 잔의 비밀”이란 책 마지막 부분도 잊지 못합니다.
“회심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회심은 계속되며 더욱 깊어진다. 베드로 사도도, 바오로 사도도 그러했다. 오직 죽음에 이르러서야 우리의 파스카가 이루어진다. 바로 그때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 이루어졌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말마디는 저의 지론이기도 합니다. 답은 단 하나 사랑이자 생명이요 빛이신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며,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는 그날까지 주님의 전사가 되어 회심의 여정에, 파스카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보면 알 수 없는 원인 불명, 정체 불명의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일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곧장 오늘 지금 여기서 새롭게 시작하는 회심의 여정, 탈출의 여정, 파스카의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내적혁명, 자아초월(自我超越)의 겸손한 비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오늘 여기이지 내일도 어제도 아닙니다. 이래야 어두운 과거와 결별합니다. 악순환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말그대로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그만의 색깔, 향기, 크기, 모양으로 평생 세상 떠날 그날까지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사람은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 사랑의 꽃이다”-2022.6.9.
오늘의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도 각별한 느낌입니다. 폭군 헤로데에 의한 살해된 정말 무죄한 아기들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입니다. 당시 베들레헴의 인구는 1000명 정도에 약 20명의 아기들이 살해됐을 것으로 추산됩니다. 헤로데는 말 그대로 악의 화신같은 폭군입니다. 자기 권좌를 지키기 위해 아내와 자식들은 물론 일체의 의심되는 정적들은 가차없이 제거했습니다. 권력욕이 인간을 악마로 만든 것이지요. 그러니 장차 자기의 안위를 위해 의심되는 아기들의 살해는 헤로데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인 주님을 떠날 때, 주님을 잊을 때 누구나 괴물이 악마가 될 수 있습니다. 악의 화신인 헤로데는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방심하면, 과거를 잊어버리면 반드시 또 출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의 현실에서도 겪지 않습니까? 모세로 인해 파라오에 의해 살해됐던 탈출기의 상황이 오늘 복음에서 아기 예수님으로 인한 헤로데의 무죄한 아기들의 살해가 반복되며 이는 빌라도에 의한 예수님의 죽음으로 또 반복됩니다. 아니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후로도 지금까지 반복되는 폭력과 전쟁의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정말 인류에게 구원은 가능한지, 희망은 있는지 묻게 됩니다. 새삼 인간의 무지의 죄가 악이, 얼마나 고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정말 믿음의 시련이자 위기입니다.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에 대해, 반복되는 악순환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파스카의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오늘 아침 성무일도중 1.초대송 후렴이, 2.시편 후렴이, 3.찬미가가 답을 줍니다.
-1.“무죄한 어린 순교자들의 화관이신 그리스도 나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2.“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출되어 하느님과 어린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이며, 아무런 흠없이 하느님의 옥좌 앞에 서 있는도다.” 3..“깨끗한 아기들의 죄없는 죽음, 주님을 위하여서 빛을 발하니 천사는 두 살아래 모든 아기를, 하늘로 옹위하여 데려 갔도다.-
아. 궁극의 희망은, 궁극의 위로와 구원은 하느님과 파스카의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구원의 삶은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주님 은총의 빛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요셉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흡사 요셉과 헤로데의 싸움같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하느님과 헤로데의 싸움입니다. 빛이신 주님의 인도따라 빛속의 삶을 살아간 주님의 전사, 빛의 전사 요셉은 성가정을 안전하게 이끕니다. 결코 악의 화신인 헤로데도 요셉을 다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악마의 준동도 멈춥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께서 내 생명의 바위시거늘 내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유비무환입니다. 처방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지난 과거에 아파하는 것은 하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부터 주님의 전사, 믿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 빛의 전사가 되어 주님과 함께 회심의 여정, 파스카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사는 것입니다. 요한 1서 말씀이 위로와 구원의 답을 줍니다.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줍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악순환의 반복에서의 유일한 구원의 탈출구는 바로 주님의 빛 안에서 날마다 영적혁명의 회심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뿐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을 닮아 새롭게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분투의 노력을 다해 파스카의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늘 새로운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해줍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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