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11) 믿음으로 '올바른 사람‘ 인정 (로마4,13-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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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3-12-31 | 조회수13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3. 12. 31. (일요일)
로마서11) 믿음으로 '올바른 사람‘ 인정
(로마4,13-22)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물려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14 만일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상속자가 될 수 있다면 믿음은 무의미하게 되고 그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15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법을 어기게 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마련입니다. 16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상속자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곧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에게 그 약속을 보장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성서에 '내가 너를 만민의 조상으로 삼았다' 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18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고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 이 되었습니다. 19 그의 나이가 백 세에 가까와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또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도 이제는 아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끝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 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로마서 4장은 온통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을 알고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어 그것이 의로 여겨졌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로마서 4장에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고 아브라함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 앞에 의로 여김을 받았다는 것, 그 사실은 앞에 있는 3장의 결론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있는데 그래서 연결시키지 않으면, 이렇게 독립적으로 그리스고교 신앙에 가장 중요한 모범이 되고 맙니다. 성경에,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을 신앙의 모범으로 세우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잠시 앞을 다시 한 번 크게 개괄 해봅시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복음을 너희가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이다.” 라고 격려하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증언합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이다. 구원이 왜 필요하냐? 그게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 계속되는 내용이었죠.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모두가 깨닫지도 않고 하느님을 찾지도 않고 치우쳐 다 무익하게 되었다.’ 그게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의 진술이었습니다. 인류 역사에 대한 진술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알아도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며, 율법을 가졌어도 지키지 않는다. 선을 알며 도덕이 있을지라도 하느님을 찾지 않는다. 모두를 하느님의 심판 아래 다 묻었다 예외 없이. ‘의인은 없다 하나도 없다. 하느님의 진노와 심판에 묶였다’ 라고 뚜껑을 딱 닫아놓은 것이 3장 19절에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은 그 율법이 명령하는 모든 것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은 말문이 막히게 되고 온 세상은 하느님의 심판에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 라고 뚜껑을 닫았습니다. 하나도 나오지 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합리적인 방법을 말합니다. 결과를 얻기 위해서 원인을 제공해야 되는 방식을 대표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당연히 도덕성을 가지지만, 그러나 그 이치 자체는 합리적인 것이죠. 그것으로는 원인을 제공할 능력, 도덕성을 지킬 능력에 있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능력에 있어서, 인류는 무능(無能), 무지(無知)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하느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하나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리고 21절에, '그러나 이제는' 이었습니다. 복음을 설명하는데 앞에 아무도 도망갈 수 없는 예외가 없는 심판 아래에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그러나’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느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예언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 내용이 뭐였느냐 다시 반복되죠.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느님의 의로움이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느님의 의(義)’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인데, 그것은 이미 21절에 있듯이 율법과 예언서에서 증거 된 거랍니다 구약에서. 그래서 구약에 어떻게 이 모두 심판 아래 있는 인류에게 하느님이 은혜를 베풀어 그의 능력으로 구원을 가능케 했는지를 구약에서 이미 다 예시하고 있었는데, 그 대표자가 아브라함이다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모두가 틀렸는데 누군가는 믿음을 가졌더라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모두를 심판아래 묶어놓은 세상, 멸망 외에 다른 희망이 없는 인류에게,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구원의 길을 여셨다. 하느님이 우리와 당신의 관계를 해결하셨다. 구약에서도 이미 그것을 증거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이 얘기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남과 다른 사람과 다른 믿음을 가졌고 경건했느냐가 아니라, 희망이 없는 세상에,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구원과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지키기로 작정하고 이 필멸의 인류에게 개입하시고 역사에 개입하여 그 멸망의 길을 뒤집어 엎어, 승리와 그의 신실하신 약속을 성취하기로 하셨다에 대표자란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자인가, 하느님이 자기가 하시려는 일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의 대표자이지 그는 남과 달랐다라는 일로 대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아브라함, 할 때마다 조심해야 되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걸 본문에서는 어떻게 얘기하나 보죠.
(로마4,1-2) 1 우리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2 만일 아브라함이 자기 공로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다면 과연 자랑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자기가 이루었다 하리요, 자기가 이룬 것이 있으면 자랑할 것이, 그렇죠. 자기가 만든 건 다 자랑이죠. 내가 했다니까. 하느님 앞에서는 없습니다. 그는 믿었잖아요. 그딴 소리 하지 말래니까. 아브라함은 지금 그렇게 등장하고 있지 않다니까. 바오로가 아브라함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그러나 ‘이제는 율법에 하느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곧 율법과 예언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아브라함을 봐라.’ 이렇게 등장시킨 거라구요. 그는 누구였는데? 그는 우리와 같은, 비슷한 자였다. 그가 특별해서 특별 대접을 받은 것 아니었다. 이렇게 등장하고 있다고요. 조금 더 볼까요.
(로마4,13-22)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세상을 물려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다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기 때문에 하신 약속이었습니다. 14 만일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만이 상속자가 될 수 있다면 믿음은 무의미하게 되고 그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15 법이 없으면 법을 어기는 일도 없게 됩니다. 법이 있으면 법을 어기게 되어 하느님의 진노를 사게 마련입니다. 16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상속자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곧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에게 그 약속을 보장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17 성서에 '내가 너를 만민의 조상으로 삼았다' 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느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18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고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 이 되었습니다. 19 그의 나이가 백 세에 가까와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또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도 이제는 아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끝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 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하신, 복의 근원이 되며 만국의 아버지가 되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이 약속, 이 특권, 이 구원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여기서 율법과 믿음을 대비시키는 이유는 율법에 속하게 놔두면 그것이 필경 실패할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은총과 믿음으로 묶고 무엇으로도 실패할 수 없게 한 것이다 라고 믿음을 등장시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라는 말은 하느님이 인류에 대하여 법적 차원에서 요구했던 것을 이제 뒤로 하고 새로운 차원, 하느님 자신의 의로움과 신실하심과 그의 자비와 능력으로 우리와 당신의 관계를 정상화시키겠다 라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방법입니다. 요구하는 조건이 아니고, 하느님의 일을 시행하는 방법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원인과 조건과 자격을 요구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면, 믿음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의지와 하느님의 능력과 은총과 자비에 강조점이 있다 라고 둘을 딱 나눕니다. 그래서 지금 하는 식으로 16절에 보는 바와 같이, (로마4,16) 16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상속자로 삼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베푸시며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까지, 곧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에게 그 약속을 보장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실패할 수 없게 하려고 이 방법으로 합니다. 우리는 믿어야만 이라는 것이 얼마나 조건으로 쫓아다녀서 믿느냐 안 믿느냐가 갈라서잖아요. 그때는 우리가 주인이 되죠. 그리스도교 신앙에 우리가 책임지는 일들, 믿는다, 안 믿는다, 열심히 있다, 없다. 아브라함을 봐라 가 됐잖아요. 그게 아니고 로마서 4장이 하고 싶은 얘기는,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아닌, 우리와 동등한 자를 불러 다시는 우리의 잘못과 부족함으로 실패할 수 없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의지로 묶은 관계를 보라. 그래서 하느님으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약속을 누구도 실패할 수 없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의지와 자비와 진실함으로 묶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총에 속하기 위해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고 그렇게 했는데,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을 부르는 것 같이 우리도 다 불러내는 거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17절이,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다. 아브라함이 믿어서가 아니고, “내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거야? 그리스도교 신앙의 주인과 모든 것은 하느님이시라고요.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불렀듯이 우리를 부르고 있고, 아브라함의 생애를 책임지고 “나는 너희 조상의 하느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 라는 말로 우리를 지금도 붙들고 계세요. 우리 자식들에게 “나는 니 아비, 누구의 하느님이었다. 세상들을 향하여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다. 너희는 다 얘 때문에 복 받는다. 얘를 부른 식으로 너희들한테 내가 복을 줄 거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 내가 복을 내리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내가 너희 저주할 거다.” 이렇게 불러 세운 하느님이 주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이어지나요? “그가 믿으니”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얘기하지 않고, 믿음의 대상,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자시다. 그는 창조의 하느님이고 부활의 하느님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모두가 전전긍긍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가 믿음이 적은 탓이다 라는 자책감이고, 둘째는 하느님이 내 말을 안 들어준다는 거죠. 그죠? 아브라함도요, 전전긍긍하고 삽니다. 쩔쩔 매고 삽니다. 뒤에 나오는 얘기가 그거죠.
(로마4,18-22) 18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 고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 이 되었습니다. 19 그의 나이가 백 세에 가까와서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되었고 또 그의 아내 사라의 몸에서도 이제는 아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20 그는 끝내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굳게 믿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21 그리고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능히 이루어 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22 하느님께서는 이런 믿음을 보시고 아브라함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이것 어려운 말입니다. 자, 하느님은 창조의 하느님이고 부활의 하느님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너는 복의 근원이 되고 너는 만국에 아비가 되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 같고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어쨌느냐? ‘그는 자식이 하나도 없었다’ 이겁니다. 자식이 하나도 없었다. 백세나 되어 아이를 생산할 수 없게 됐고, 부인 사라도 그랬습니다. 둘이 다 아이를 생산할 수 없는데 하느님은 오셔서 너는 아브라함이다 그러신다는 겁니다. 그가 믿은 하느님은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이었다 그겁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은 이유는 대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뭘 하란 말입니까? 뭘? 아브라함이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새장가를 가겠습니까? 무슨, 뭘 하겠습니까?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하시겠어요. 믿음으로, 하느님의 일하심으로 붙들려 있지요. 도망도 못가고 보이는 것은 없고,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었다는 것은 하느님에게 붙들려 있었다는 말 이외에 다른 표현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어느 시대에나 하느님이 그의 백성을 부르실 때 그렇듯이 내가 왜 예수를 믿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원하게 믿어지지도 않고, 안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죠?. 그걸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보십시오. 그야말로 꼭 그랬지요. 얼마나 말이 안 됐겠습니까? 본토 친척 아비 집에서 끌어내어 가나안 땅에 들어와 나그네로 살고 있습니다. 무슨 요즘 잘 쓰는 말로, 무슨 아무 데나 가치를 부여해서, 그는 진정한 보헤미안이었다. 이런 개수작들을 다. 노숙자였죠. 노숙자. 한심하게 사는 게, 예수 믿고 제일 넋이 빠지는 게 이겁니다. 그 많은 약속과 축복 속에 있는데, 우리가 현실이 한심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한심한 것이 하느님이 일하시는 믿음이라는 거 아시겠습니까? 율법으로 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는 하느님의 방식이라는 것. 그것이 복으로 가고 그의 진실하심의 손길이라는 걸 아시겠습니까? 그걸 못 읽어내면 성경은 아무리 읽어도 답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갈까요. 이 사실에 더 기가 막힌 증언을 보죠. (히브11,17-19) 17 아브라함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시험하시려고 이사악을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기꺼이 바쳤습니다. 이사악은 외아들이었고 그를 두고 하느님께서 약속까지 해 주신 아들이었지만 그를 기꺼이 바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18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에게서 너의 후손이 퍼져 나가리라' 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었던 사람들까지 살리실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는 이를테면 죽었던 이사악을 되찾은 셈이 되었습니다.
이사악을 바치는 사건, 창세기 22장에 나와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십시오. 거기에 이 내용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기가 막혀 있는지, 얼마나 눈물로 기도를 했는지, 그리고 모든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고 어떻게 결심을 했는지, 그딴 얘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마치 기계같이 움직입니다. ‘아브라함아, 너 백살에 난 네 아들, 모리야산에 데려와서 제물로 바쳐라.’ 그래서 무슨 신나는 일처럼, 하인 하나 데리고, 이사악 데리고, 번제를 드릴 장작 쌓아가지고, 모리야산으로 가서 뭐 그냥 아무 생각 없는 사람같이 척척 올라와서 단을 쌓고 장작을 벌여놓고 애를 묶고 칼을 들어 찌르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천사가 내려와 말리죠. 그리고 “됐다. 내가 네 믿음을 보았다.” 그리고 옆에 뿔이 걸린 숫양을 대신하여 바치고 이사악을 데리고 내려오죠. 우리는 아브라함이, ‘백살에 난 아들도 바치라’ 그러면 바치는 믿음이었다 라고 생각을 하죠.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쓰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아브라함은 만국의 아버지입니다. 모든 인류의 아버지가 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부른 식으로 인류를 부를 것의 대표자입니다. ‘니 후손이 이와 같으리라’를 제대로 실천하려면 후사가 있어야 됩니다. 이사악을 백 살에 줬습니다. ‘니가 만들지 않았다’ 그런 뜻입니다. 그 ‘이사악을 죽이라고 함으로써, 이 이사악은 원래 없어도 되는 거였다’ 라고 다시 성경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때쯤 알았던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이사악은 없는 것입니다. 이사악이 없어도 합니다. 내가 낳을 수 없는 아이를 낳은 겁니다. 그걸 확인시키는 사건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탄생을 합니다. 처녀가 낳지요. 그러니까 낳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없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이 그렇게 예수를 보내므로 ‘너희가 낳지 않았다. 너희가 만들지 않았다’ 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내가 세상에 뛰어들었다. 너희가 만들거나 너희가 요청하지 않았다. 너희가 요구한 일에 보상이 아니다. 똑같은 얘기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뛰어 들어오시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운명에, 역사에, 세상의 운명에 뛰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등장시키는 이유입니다. 이제는 율법의 하느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예언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아브라함을 봐라. 이 얘기죠. 아브라함, 아브라함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 우리와 같다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곧 아브라함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시편 105편으로 가죠. (시편105,17-20) 17 그러나 사람 하나를 먼저 보내셨으니 곧, 종으로 팔려 간 요셉이다. 18 요셉은 거기에서 발에 차꼬를 차고 목에는 쇠칼을 쓰고 고생을 하였으나 19 마침내 해몽한 것이 들어 맞아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신분이 밝혀지자 20 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의 사슬을 풀어 주었으니 여러 족속을 다스리는 자가 요셉을 놓아 주었다.
요셉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시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아들입니다. 아버지가 편애를 해서 형들이 시기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양치는 형들을 찾아간 요셉을, 형들이 죽이기로 합니다. 큰 형이 말려서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리고 아버지에게는 짐승 피를 묻힌 겉옷을 가지고 와서 요셉이 짐승에게 죽었다고 얘기를 합니다. 요셉은 팔려서 종살이를 하다가 무고를 당하여 감옥에 갇힙니다. 지금 그 장면입니다. ‘그는 옥중에 갇혀 그 발이 차꼬를 찼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야곱에게 요셉은 죽은 거죠. 그쵸? 아들들이 와서 죽었다 그랬으니까. 이렇게 어딘가 가있는 줄 모르죠. 야곱에게 요셉은 죽어 있습니다. 우리는 요셉의 이 사건을 하나도 비극적으로 읽지 않습니다. 왜? 총리가 될 거니까. 그죠? 끝을 알고 있잖아요. 그거 아무리 힘들다 그래도 우리는 웃으면서 괜찮아, 그럴 겁니다. 여러분 힘드세요? 괜찮아요. 난? 괜찮아요. 아니까. 그는 알았을까요? 몰랐죠. 그는 죽을 맛이었죠. 여기 그 몸이 쇠사슬에 묶였다, 매였다를 직역하면 쇠사슬이 그의 혼을 뚫었다 라는 표현이라고 그랬습니다. 혼비백산했다. 넋이 나갔다 입니다. 그는 그것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걸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무고를 당하여 억울하게, 이 험한 꼴을 당하고 있는데, 그게 하느님의 일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물론 간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꿈엔들 하느님의 일이, 이 일을 만들었으리라고 상상을 할 수 없이, 둘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의 현실 아닙니까? “하느님 제게 요거 하나 더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소원 아닙니까? ‘요거 하나 더,’ ‘그러면 그게 하느님의 일이고 그러면 그게 자신의 믿음의 확인이고 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19절도 이렇게 됐죠. ‘마침내 해몽한 것이 들어 맞아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신분이 밝혀지자’ 형들은 요셉을 잊었습니다. 요셉은 모두에게 잊혔습니다. 꿈을 해몽해준 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도 나가서 잊었습니다. 하느님은 잊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모두를 요셉을 위하여 그 길을 준비하시고 그 일을 실천하십니다. 늦게 깨닫습니다. 요셉이 "형님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를 이리 보낸 건 형님들이 아니라 하느님이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 삶에 제일 힘든 사람이 누구죠? 옆에 있는 사람입니다. 함께 묶여 있으니까요. 우리가 뉴스 틀면, 그래서 좋은 소식 나오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원하는 좋은 소식은 다 이겁니다. 태백산맥이 몽땅 석유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린 다 그거 외에 바랄 게 없습니다. 그렇죠. 아니면 제주도가 한 2천 킬로쯤 내려가서 거기까지 다 우리 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다 그겁니다. 그러면 그 소원 속에 뭐가 들어가 있죠? 지금은 불만(不滿)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불만입니다. 우리의 아슬아슬함은 요셉과 비교해도 적지 않습니다. 요셉은 우리가 결과를 아니까. 우린 우리 결과를 모르죠. 그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 아브라함이 믿은 바. 아브라함이 믿음을 논하자는 게 아니라, 그를 붙든 상대, ‘그 하느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입니다. 우리에게 나타난 어떤 실패도 어떤 절망도 어떤, 어떤 희망이 없는 것도 하느님은 뒤집을 수 있습니다. 그는 진실하시니까요. 그는 우리를 처음 창조하셨을 때의 목적대로 하느님의 영광의 찬양이 되게 하시겠다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자랑인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이 됨입니다.” 믿음은 무슨 뜻이라고요? 로마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말고, 하느님의 의지, 우리 인생을 이 안에서 확인하십시오. 우리가 누구인가를,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를 믿는다, 하느님 아버지라는 그 고백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기억하십시오. 우리들의 삶을 사시오. ‘그 발이 차꼬에 상하고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야훼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까지라. 그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도망갈 수 없어요. 자기 나이에 백살된 것과 자기 아내 태(胎)가 닫힌 것을 보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았다. 하느님이 놓아주지 않았다.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이사악을 기적적으로 주었듯이 그것 없어도 된다. 건강을 줬듯이, 재능을 줬듯이, 없어도 된다. 그 확인을 하라고요. 우리들은 복의 근원이 되어 우리를 축복하는 자를 하느님이 복 주시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하느님이 저주하는 존재입니다. 가슴을 펴고 신자(信者)답게 살아내십시오.
기도합시다.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며 위대함이며 놀라움이며 복이며 영광이며 축복입니다. 우리가 그걸 모르는 것은 믿음이 없는 탓입니다. 더 많이 깨닫고 더 확신을 가지고 더 충성하여 우리 인생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복도 누리도록, 우리의 삶을 책임 있게 사는 영광도 누리도록, 오늘의 말씀을 들은 모든 영혼과 인생을 붙들어 힘 있게 축복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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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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