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정 성화 주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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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3-12-31 | 조회수195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정 성화 주간] 루카 2,22-40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부모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자식을 자기 자랑거리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 “부모의 가장 큰 지혜는 자신의 삶이 자식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사는 것이다.”
세상이 정한 기준에 맞춰 자기 자녀들을 ‘최고’로 키우려고 닥달했다가, 그 자녀들이 자신에게 심하게 반항하며 모든걸 내려놓아버리자 뒤늦게 자기 실수와 잘못을 깨닫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엄마 반성문>이라는 책을 낸 “이유남”씨가 한 말입니다. 가족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감싸주는 ‘울타리’가 되지 못하고, 서로를 내 이익과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려고 들 때, 그 관계는 오해와 상처, 갈등과 원망으로 무너져버리고 말지요. 생각할수록 ‘가족’이라는 관계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누구나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꿈꾸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우리를 너무나 힘들게 만드는 겁니다. 가장 굳건해야할 사랑이 오해와 실망 속에서 쉽사리 허물어지는 모습에 마음이 쓰라립니다. 한 때는 자기 목숨을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는데, 어느 순간에 태세를 바꾸어 자기 편안함과 이익을 먼저 챙기는 모습에 배신감이 듭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존재들, 내 분신이자 전부라고 여겼던 녀석들이 이제 좀 컸다고 자기 생각을 툭툭 내뱉는데,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내 가슴에 박혀 피가 철철 흐릅니다. 내 입장 내 마음은 생각 안하시고 당신 기준에 따라 나를 판단하시고 비난하시며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실 땐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하여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가족들 사이의 화목도, 행복도 그저 드라마에나 나오는 ‘남의 일’로 여겨지지요.
가톨릭 교회는 성탄 대축일이 지난 후 처음 맞는 주일인 오늘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지냅니다. 예루살렘 성가정의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모범적인 모습과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통해 가족 문제로 어려움과 고통을 겪는 우리에게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그 첫번째 비결은 ‘봉헌’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들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자녀를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인간적인 시선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에게 개인적으로 기대하고 바라는게 생깁니다. 그리고 그 기대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원망하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눈으로 가족을 바라보면 그럴 일이 없습니다. 합리와 효율을 내세우지도, 이해타산을 따지지도, 상대가 먼저 주어야 나도 받는 만큼 주겠다고 버티지도 않는 겁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나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먼저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그분 품 안에서 너그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면 받은 게 없어도 기쁘게 줄 수 있고, 사랑의 힘으로 상대방의 잘못과 허물까지 감싸안을 수 있게 되지요.
두번째 비결은 ‘동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시메온이 성모님께 이런 말을 하지요.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아들 예수님이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당신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에 불만을 품은 많은 이들의 반대 때문에 큰 고통과 어려움을 겪으시리라고 예언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이신 성모님 또한 아드님의 고통에 참여하게 될 것을 미리 알려줍니다. 부모와 자식은 사랑이라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완전하게 일치된 ‘운명공동체’이니, 가족이 겪는 어려움, 슬픔, 아픔에 ‘함께’ 하는게 당연하지요. 그렇게 고된 삶의 길을 동반자, 협조자, 반려자로 함께 걸으면서 손 잡아 일으켜주고 등을 토닥여주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겁니다. 그런 동참과 동행을 통해 가족이라는 유대는 더 단단해지고 깊어집니다.
세번째 비결은 ‘배려’입니다. 오늘의 복음 환호송에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다스리게 하여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여라.” 그리스도의 평화가 내 마음을 다스리게 하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면 우리는 자연스레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게 되지요. 그분께서 사람들을 대하시는 그 마음가짐을 우리도 본받고 닮아가는 겁니다. 그분의 마음가짐이란 배려와 공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겪는 슬픔과 아픔에 깊이 공감하셨습니다. 또한 우리의 약점과 부족함을 이해해주시고 배려해주셨습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주님의 그런 모습이 여러 차례에 걸쳐 나타나고 있지요. 우리도 그 마음으로 가족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서로의 ‘다름’을 통해 상대방의 부족함과 약함을 채워줌으로써 성숙되고 완성되어 가는 존재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을 닮은 고유한 모습으로 창조하셨기에,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지요. 그러니 아무리 가까운 가족 사이라고 해도 상대방이 나를 100% 이해하고 100% 맞춰주기를 바라서는 안됩니다. 그런 무리한 요구는 상대방을 숨막히게 만들고 관계를 망가뜨릴 뿐이니, 상대방과 내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용납해야 합니다. 사랑은 공감과 배려를 통해 단단해지고 깊어집니다. 그렇기에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참아주고, 그것을 바로잡을 때까지 인내해주며, 열심히 노력해도 안되는 부분은 인정하고 감싸주어야 합니다. 또한 내 능력만으로는 그러기에 힘이 부친다면 부족한 부분은 하느님께서 채워주시라고, 그리고 우리 가족이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가정의 구성원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서로를 먼저 배려하고 사랑했으며, 무엇보다 하느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아픔과 좌절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먼저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그분 섭리 속에서 살았습니다. 성가정은 단지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톨릭 신앙을 지닌 공동체를 일컫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그분 뜻에 대한 순명 안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용서와 사랑을 통해서 참된 행복을 찾아가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성가정이 되기 위해 세속적인 재물이나 조건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 가운데에 함께 사시는 주님을 우리 마음에, 우리 가정에 모실 수 있다면, 그분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통해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면, 나와 우리 가족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이 길을 걸을 수 있다면, 그런 우리 가족이야말로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은 거룩하고 행복한 ‘성가정’입입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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