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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 영근 신부님의 복음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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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23-12-31 조회수264 추천수2 반대(0) 신고

231231.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5)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사람이 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거룩한 탄생은 하느님께서 “가정”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가정”을 만드시며(이루시며)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엮어지고 꾸며졌기 때문입니다. 곧 공동체를 이루시며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첫 장소는 “가정”이었습니다. 당신의 오심으로 모든 것을 축복하고 새롭게 하시는 당신께서는 맨 먼저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집회서>(3,2-6,12-14)의 말씀과 <화답송>의 <시편>(128,1-5)의 말씀은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경외는 온전한 부모 공경으로 이어지고, 화목한 가정을 이룬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콜로 3,12-21)은 세속적 질서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정,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을 보여줍니다. 곧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감사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공동체와 가정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아들 예수님의 봉헌을 통한 율법에 충실한 마리아와 요셉 가정의 축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가정을 “성 가정”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가정”은 아주 특별한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혈연이나 혈육으로 맺어진 가정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곧 ‘영’으로 맺어진 가족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육신의 남편과 아내 되기를 스스로를 포기함으로 맺어진 부부인 마리아와 요셉이 있고, 아들과 아버지와 어머니로 혈육으로 묶여있지 않는 아들이 있습니다. 그는 잃은 아들을 찾아 성전에 온 부모에게도, 소문을 듣고 말씀의 선포 현장으로 찾아온 어머니와 친척들에게도,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도, 십자가 아래서도 어머니의 아들이 아님을 선언합니다. 오히려 혈육을 떠나 ‘영적인 성가정’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세례를 받은 ‘신앙인의 가정’이라고 해서 모든 가정이 ‘성가정’인 것이 아닌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인 가족’을 이룰 때 모름지기 “성가정”이라 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혈육으로 맺어진 가족에 대한 애착은 때로는 오히려 ‘영적인 가족’을 이루는 데에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가정들이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이익을 도모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에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자애심’과 ‘이기주의’의 또 다른 형태인 배타적인 ‘가족 이기주의’를 불러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가족’은 동시에 벗어나야 할 대상이기도 합니다. 특히 수도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연상시킵니다. 친교와 사랑과 통교를 이루는 일치의 공동체를 연상시켜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가정’은 모든 가정뿐만 아니라 모든 수도공동체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가정’이라고 해서,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은 성모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을 표징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 말씀과 같이, 성모님은 ‘성가정’을 꾸려 나가면서 칼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문제가정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했으며,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 했고,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마리아는 이해할 수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버린 가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을까요?
예수, 마리아, 요셉 사이에 그 어떤 다툼도 불평도 어려움도 없어서 성가정이었을까요?
 
성가정을 단순히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혹은 말썽 부리는 사람이 없는 가정이 아니라,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지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도, 우리가 복 받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시련을 통해서 복을 내려주시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혹 지금 우리의 가정이나 공동체가 비록 어려움과 아픔, 그 어떤 고통이나 시련 중에 있다고 해서 성가정이나, 성수도가정이 될 수없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그분의 뜻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련이나 고통이 없는 것이 성가정이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는 가정이 “성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곧 “성가정”이란 그것은 결코 어려움이나 고통이 없거나 가난하지 않는 가정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가정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기에 성가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구원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구원에 동참하는 성가정의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는 이렇게 드러내줍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입니다.”(루카 2,35)
 
이는 어머니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속죄의 고통에 참여함을 암시해줍니다. 곧 부모가 아들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구원의 길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에 동참하는 가정인 것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가는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영적인 가정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를 구원의 길로 동행하시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주님!
구원을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포대기에 싸인 아기에게서, 알몸으로 매달린 십자가에서,
구원을 보게 하소서.
양팔로 제 삶의 무력함을 쳐들고, 구원과 자비의 찬미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무력함에서 흘러내리는 당신의 구원을 따라 관상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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