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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14) 대표(代表) 원리(原理) (로마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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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03 조회수197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1. 5. 21사도바울

 

 

2024. 1. 3. (수요일)

 

로마서14) 대표(代表) 원리(原理)

 

(로마5,12-21)

12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 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13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 다만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죄가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뿐입니다. 14 그러나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지배하였는데 아담이 지은 것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원형이었습니다. 15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의 경우와 아담이 지은 죄의 경우와는 전연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덕분으로 많은 사람이 풍성한 은총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은총의 힘이 얼마나 더 큽니까! 16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과 아담의 죄는 그 효과에 있어서 서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담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의 심판을 받게 되었지만 은총의 경우에는 죄지은 많은 사람이 은총을 거저 입어 무죄판결을 받았습니다. 17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죽음이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은총의 경우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풍성한 은총을 입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거저 얻은 사람들이 생명의 나라에서 왕노릇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은총의 힘이 얼마나 더 큽니까! 18 그러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20 법이 생겨서 범죄는 늘어났지만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21 그래서 죄는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다 주었지만 은총은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오늘 로마서 512절 이하의 내용을 신학적인 용어로 대표 원리(代表原理)라고 합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행위와 아담의 결정이 모든 그의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 같이 둘째 아담 인류의 대표자로 하느님이 세워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담의 범죄로 온 인류에게 미친 비극과 멸망을 종식(終熄)시키고 그의 부활로 새로운 인류를 시작(始作)하시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대비는 우리의 조상된 아담이 선악과 하나 따먹어 만든 범죄로 인한 죽음을 하느님이 뒤집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서 신()이 인간(人間)이 되어 세상을 살고, 인생을 살고, 배척하는 자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며 실제로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十字架)로 죽습니다. 그리고 아담으로 인하여 생긴 죽음이라는 비극을 뒤집어 역전시킵니다.

비결은 늘 이곳이죠. 우리가, 예수마저도 인간으로 온 이상 죽음을 맞아야 되는 자리로 왔다는 사실로 우리의 현실을 예수로 확인했다면 그리고 그의 죽음이, 죽음 가운데 있는 우리를 역전시키기 위하여 죽음에까지 따라 들어온 하느님의 행위라면, 아담 안에서 일어난 일이 큰 것 같이 죽음에까지 따라 내려와 우리를 역전시킨 하느님의 결정과 능력은 얼마나 큰 것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5장 앞에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으로 하느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그의 살으심으로 인하여는 얼마나 더 구원을 받겠느냐? 이게 대조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문제, 예수로 인한 역전이라는 것을 우리는 제대로 이해를 못합니다.

내가 믿어서 예수가 온 것 같이 생각한다. 믿고 나서 보니까 예수는 2,000년 전에 왔더라고요. 이 시간을 역순으로 사용하시는 하느님을 우리 지난번에 했습니다. 왜 그러신다고요? 결과를 절대 실패케 하지 않으시려고. 결과가 이미 일어났습니다. 예수 안에서의 구원, 예수 안에서의 승리는 이미 과거요, 완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나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로 인하여 허락된 구원을 알게 됩니다. 믿게 됩니다. 내가 믿어서 구원을 얻었죠? 아니요. 내가 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먼저 있었고 보는 것 아닙니까? 내가 이해해서 도()를 깨우친 것이 아니라, 그 질서와 그 약속이 있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모든 구원에는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자랑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랑하고 싶습니다. 가장 크게 나타나는 부작용은 "난 믿어서 천국 간다. 넌 안 믿었으니 지옥 가라." 그건 아직 모릅니다.

우리 잘 아는 요한복음 316, 어떻게 돼 있죠?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우린 나누고 싶습니다. ? 난 믿었걸랑요. "난 믿었고 넌 안 믿잖아." 이렇게 안 하면 어떻게 확인이 되겠어요. 그죠. 우린 그렇게 확인을 하죠. 하느님이 한 개인을 찾아오셔서 각각에게 당신을 나타내시며 관계를 맺으신다는 것은 놀라운 특권입니다.

도매금으로 받지 않습니다. 뭉뚱그려서 전체 속에, 묻어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을 소중하게, 마치 그 사람만 있는 것 같이, 이렇게 하느님이 찾아오십니다.

그걸 잘못 풀면 개인적 구원, 사적 신앙으로 축소됩니다. 하느님은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아담으로 망친 창조를 하느님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지워버리고 다시 만들지 않고 그 망가진 세상에 뛰어들어와 역전을 시키셨습니다.

아담의 생각 없는, 한 행위가 죽음을 불러들였다면, 그를 지은 하느님이 이것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 아들을 인간으로 보내어 무덤에 파 묻었다 뒤집으신 것은 얼마나 더 큰 영향이 있으며, 그 전에 있었던 모든 것을 회복하기에 충분하지 않겠느냐? 라고 얘기하는 것이 로마서에서 소개하는 복음인 것입니다.

역사와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자주, 법과 규칙, 도덕과 윤리 같은 모호한 추상명사의 기댑니다. 옳고 그른 것 같이 말입니다. 믿고 안 믿는 것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하고 싶은 구원에서의 얘기는 이것이 법칙이거나, 이것이 은혜와 사랑과 구원이라는 단어를 썼다고 해서 그게 하나의 개념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어떤 법칙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맨손으로 쫓아오셔서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인류를 구원해 내신다는 사실이죠. 인격이 가지는 구체적이고 피와 눈물과 땀과 한숨과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뛰어온 행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자꾸 놓칩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진실하신가, 하느님이 얼마나 깊이, 빈틈없이 하느님이신가를 보이는 것이 구원입니다.

(2코린5,13-14) 13 우리가 미쳤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미친 것이고 우리가 온전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온전한 것입니다. 14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건 추상명사거나 명분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 그의 진실하심과 두려우심과 그의 간섭하시는 구체적인 깊고 푸른 검(). 그렇죠?

(2코린5,14-15) 14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리스도 한 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15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죽으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말로 설득하지 않습니다. 규칙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명분으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인류를 새로운 길로 끌고 가십니다. 모두를 묶어 죽음 속에 들어가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한 모든 절망을 무덤에 묻고 다시 같이 꺼내 나와 새로운 인류를 시작합니다. 당신이 앞장서서 모두를 끌어안고....

"하느님을 안 믿을 뿐만 아니라 베푸는 은혜에도 불구하고 발버둥치는 나를 하느님이 놓아두지 않아서 구원을 얻게 됐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강 믿고 미꾸라지처럼 살았는데 하느님이 놔두지 않고 소금 묻은 손으로 와서 움켜 잡아서 할 수 없이 신앙생활을 했다. 이렇게 할 겁니다.

그리스도교를 우리의 교양이나 철학이나 명분이나 핑계나 보험 정도로 여기는 건 아닙니까? 하느님의 무시무시 하심을 성경을 읽고 또 읽어도 모른단 말입니까? 우리가 언제 한번 적극적인 이유로 교회에 예배를 참석했단 말입니까? 할 수 없이 하죠, 그걸 하느님이 하시죠.

얘야 다른 데 가면 안 된다. 너 도봉산 가면 내가 백운대 아주 엎어버릴 판이다. 할 수 없이 하자, 너 지하철 타고 놀러 가면 지하철 내가 묻어버린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오죠. 할 수 없이 죽겠죠. 하느님 지하철을 엎으실 바에야 현금으로 직접 주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

우리의 변명과 우리의 차마 입으로 말 못한 우리의 실력입니다. 하느님이 타협하지 않아서, 포기하지 않아서 우리가 여기 서 있는 것이죠. 그걸 알려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후서 대단히 재미있는 부분을 16절을 그 다음에 만납니다.

 

(2코린5,16-17)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다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아담이 한 결정에 그 영향 아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 로마서 5장 본문은 이렇게 나옵니다. ‘율법을 범해서 그 벌로 죽은 것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죽었다.’ 뭘 보면 아느냐?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즉 율법을 주기 전에도 사람들은 죽었다.

현재도 애가 태어나서 무슨 행동을 하기 전에도 죽습니다. 죄를 지을 틈이 없었는데 죽습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논리도 설명도 안 되는 사실입니다. 똑같이, 하느님의 구원은 사실인 것입니다. 이를 자꾸 원리화하고 규칙화해서, 이렇게 하신 하느님, 이때 말하는 하느님은 인격자를 의미합니다.

그 하느님을 무정한 법으로 대체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교 신앙을 법으로 대체하는 순간, 어떤 명분으로 대처해 인격자 하느님이 분리되는 순간, 남는 것은 잘한 자와 못한 자만 남습니다. 신앙생활을 잘한 자와 못한 자, 똑똑한 자와 미련한 자만 남습니다.

그렇게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하느님과 그의 사랑을 받는 우리, 인격과 인격에 작용해야 됩니다. 그것이 분리돼서 독립적으로 돌아다니면 무서운 현실이 됩니다. 끊임없이 자책을 해도, 끊임없이 회개를 해도 안심이 되지를 않습니다. 법 앞에 서 있으니까. 생각 없는 것 앞에 서 있으니까.

사랑은 모름지기 편을 들 줄 알아야죠. 편을 들 줄 알아야지. "나 이런 일이 있었어". "너 힘들었겠다." 그래야지요.

"그건 말이야," "그러면 손가락 자른다고. 그랬어? 안 그랬어?" 이건 어디서 나온 걸까요? 그건 말이야는 어디서 나왔을까? 그건 말이야, 말구유에서 나왔을까? 정신들을 차려봐.

예수를 믿는다는 게 뭔지 깊이 생각을 해봐. 하느님은 우리에게 누구야? 그는 창조주야. 창조를 부패시킨 인간의 결정을 얻기 위하여 그 아들을 보내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분, 우리를 용서하기 위하여 당신이 우리가 저지른 모든 것의 결과를 다 뒤집어쓰고 다 껴안고 우리를 안다가 피투성이가 된, 그래서 죽음을 감수하고 쫓아 들어와 역전시키는 하느님은 누구일까?

아담과 그의 행위가 역사의 사실이었듯이 예수와 그의 행위가 역사적 사실이잖아. 그 이후로 계속 교회가 있는 거야.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는 거야. 훌륭한 교인들은 몇 없었어. 못난 신자는 매우 많았어. 그건 성경에 올릴 수가 없었지요. 그죠?. 그러나 훌륭하라 그러지 않아. 사랑한다 그러지.

하느님의 사랑은 약속하신 은혜와 능력의 동기를 얘기하는 것이지, 인격이 그러고 있다, 자격과 조건을 넘어선다를 말하기 위하여 사랑이 있는거야? 은혜니 믿음이니 능력이니를 종교화시켜서 명분화 하려고?. 사랑을 해야지.

사랑은 그렇게 쓰는 거 아니야. 사랑은 오랜 고통이야. 이기심을 가지지 않는 거야, 무례히 행치 않는거야. 기다리는거야. 사랑은 모든 것을 믿고 바라고 참고 견딘다. 하느님이 그리 하셨던 것처럼.

그 결과를 이루시고, 그 결과를 우리에게 적용하여 우리의 눈물과 미련과 반항과 고집과 도망가는 모든 것을 담아서, 그래서 먼저 십자가부터 바꿔 세워. 우리를 얼마든지 풀어놔. 거기서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그 넓이와 깊이와 내용으로. 그게 그리스도교 신앙이요, 신자들이 가지는 무한한 복이야.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어떤 세상? 회복의 세상, 구원의 세상, 사랑의 세상 속에 있도다. 이전 것은 왜? 아담 안에 있던 세상은 지나갔다.

예수 안에 들어오면 누가 그걸 만들었어? 하느님이 만들었지. 우리가 믿어 알게 돼.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그래. 우리는 아무도 육체대로 따지지 않아. 그건 몰라. 하느님이 우주와 역사의 운명을 십자가로 세웠으므로 우리는, 우리는 단죄하지 않아. 우리는 판단하지 않아. 우리는 기다려. 그건 하느님 손에 있어. 우리는 몰라. 믿었다, 안 믿었다 하고 너무 쉽게 나누지 않아. 믿은 건 복이야. 영광이야. 안 믿는 건 하느님이 알아서 하실 거야.

그 믿은 자가 안 믿은 자보단 달라야지. 뭐 해서 달라야 돼? 십자가를 세우신 하느님을 아는 실력으로 달라야지. 감수해야지. 우리는 회복시킬 능력이 없어요. 하느님이 우리를 회복시키셨지. 회복된 자로서의 온유와 겸손이 있어야지. 감수하고 살아야지. 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래.

(2코린6,1-7) 1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마십시오. 2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자비를 베풀 만한 때에 네 말을 들어 주었고 너를 구원해야 할 날에 너를 도와 주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3 우리가 하는 전도사업이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는 일은 조금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4 우리는 무슨 일에나 하느님의 일꾼으로서 일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과 궁핍과 역경도 잘 참아냈고 5 매질과 옥살이와 폭동을 잘 겪어 냈으며 심한 노동을 하고 잠을 못 자고 굶주리면서도 그 고통을 잘 견디어 냈습니다. 6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끈기와 착한 마음을 가지고 성령의 도우심과 꾸밈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고 있습니다.

 

모든 덕목들을 가져야 돼. 모든 신령한 무기들과 실력을 가져야 돼. 그러나 그것을, 영광과 욕됨으로 그렇게. 오해를 받을 수 있어. 우리가 누군지 몰라 세상은.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오해할 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우리가 그래 보여. 하느님이 믿음의 길을 가게 해놓고, 이게 뭔가 싶어. 여기 있는거 다 우리에게 적용이 돼요.

그러니 다시 한번 요약을 해봐요. 그리스도교 신앙은 계시(啓示)종교예요. 다른 모든 종교는 '지성이면 감천'인거야 그리스도교는 계시(啓示). 신이 우리에게 자신을 밝혀. 자신을 설명하고 자신의 일을 우리에게 나타내. 이걸 계시라 그래요. 하느님이 존재를 만드셔. 내용을 채우셔. 그리고 그걸 완성하셔. 하느님이 먼저 하신다는 뜻이야.

우린 나중에 이해를 해. 순종을 하고. 이해해서 존재하거나 알아봐서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이미 있어 그건. 하느님이 언제나 먼저 하신다는 뜻이에요.

창조주 시다. 그가 만드신 거야. 우리가 알아먹는 건 다음 일이야. 하느님이 일을 먼저 하셔. 그걸 제대로 이해하면 무슨 일이 생기느냐면, 인생을 순종(順從)할 수 있어. 신앙생활은 순종이야. 순종이라는 이런 것과 달라. 명분 그렇게 어떤 덕목을 실천하는 게 아니야. 순종은 어떤 이상을 구현하는 게 아니야. 그런 추상명사인 무인격을 구체화하는 게 아니야.

하느님이 창조주이신 걸 믿어서 우리의 인생을 통하여 하느님이 그 기쁘신 뜻을 이룬다는데 나의 생각과 소원을 던져놓고 날 맡기는 거야. 지금 같은 인생이 된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이 된 거야. 그게 순종(順從)이야.

그 다음에 이해가 안가. 하느님이 주도하는 인생이 100번 더 낫다고, 그게 옳다고 믿는 거야. 그래서 가시밭길을 걷는 거야. 하느님이 우리보고 그 길을 가라. 그래서 지금 당신이 처한 그 길. 아무것도 아닌 거. 앞이 깜깜한 거. 답이 없는 거. 이거 하나는 하느님이 창조해 주시고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보내셨다는 건 알잖아.

?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니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담의 후손으로 죽는 것이 사실이듯이 예수를 아는 것이 사실이잖아요. 누가 부추겨서, 누가 거들어서 지금 신앙을 갖고 있어요? 다 자기가 갖고 있는 거야. 불안하니까. 자꾸 물어봐. 어 우리나라는 왜 이 모양 이 꼴일까요? 다른 거 뭐, 하느님은 뭐하고 계실까요? 그래요 어디로 가고 싶어? 호주로 가고 싶어? 어디로 보내줘? 달나라로 가고 싶어? 그 맨 밑바닥에 뭘 걱정하는 거야? 하느님은 왜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일하세요? 좀 미리 보여주시고 하면 안 될까요? 난 뭐예요? 아무도 모르고. 저도 죽겠어요. 그걸 감수하는 거야.

바오로식 고백은 이래. 죽어도 좋다.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어도 유익하니라.” 죽는 것 갖고도 하느님이 뭘 한다. 어떻게 그런 얘기를 해? 예수를 봤잖아. 예수님이 죽어서 인류를 구원하자, 무언들 못 감수하리오? 이렇게 있지.

그래서 결사적인 얼굴을 한다는 뜻이 아니야. 그건 클린트 이스트우드 하나면 족해. 그런 걸로 확인하지. 담담하게 살아. 자기 자리를 도망가지 마.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대. 뭘 해? 하느님의 능력으로 산대. 또 뭘로?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또 뭐라 그래?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죽지도 않어? 그죠. 살아있어야 돼. ? 하느님 일하고 계시거든. 벌써 죽으면 안돼.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하느님이 우리 하나하나를 그 누구보다도 크게, 가깝게, 하느님의 모든 걸 부어 일하는 존재예요. 누가 부러워? 바오로? 징기스칸? 뭐가 부럽다는 거야? “내 은총(恩寵)이 네게 족()하도다.” 난 어디 갔어? 하느님을 얕잡아보는 거야?

 

기도합시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알게 하시고 우리 인생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를 확인하려 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나를 확인 하시어, 예수께서 그리하신 것처럼 늠름하게 우리 인생을 살게 하시고 영광된 인생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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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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