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15) 단 한 번 죽으심의 그리스도 (로마6,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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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1-04 | 조회수98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4. 1. 4. (목요일)
로마서15) 단 한 번 죽으심의 그리스도
(로마6,1-14) 1 그러면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 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죽어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3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4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5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6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7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8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9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0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12 그러므로 결국 죽어 버릴 육체의 욕망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죄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13 또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 14 여러분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6장 1절 말씀은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고 하겠느냐? 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5장 20절에 있었던 율법이 생겨서 범죄는 늘어났지만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다. 라는 말을 받아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하는 것이죠. 답은 분명합니다. 말도 안 된다. 이게 답인데 이 질문과 이 답의 연결은 조금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하는 것은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하신 구원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를 충분히 만회하고 회복하고 뒤엎을 만큼 크다.’ 그 얘기를 한 것인데, 무한 리필 같이 됐어요. 먹어서 잔을 비워야 또 갖다 줄 거 아닙니까? 그럼 우리가 죄를 지으면 또 은혜를 받을 거 아니냐? 라는, 이제 고약한 질문이 생기게 됐죠. 사도 바오로는 펄쩍 뛰는 셈입니다. “말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희가 이 ‘은총이 넘친다’라는 말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은총이란 무슨 지우개거나 무엇을 소각해 버리는, 없었던 것으로 하는 그런 장치가 아닙니다. 그것은 훨씬 다른 개념으로 쓰여 있는데 그걸 이해하기 위해서 출애굽기 19장으로 가봅니다. (출애19,1-6) 1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2 그들은 르비딤을 떠나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진을 쳤다. 이스라엘이 그 곳 산 앞에 진을 친 다음 3 모세는 하느님 계신 곳으로 올라 갔다. 야훼께서 산에서 그를 부르셨다. '너는 야곱 일족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어라. 4 '너희는 내가 에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희를 어떻게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로 데려 왔는지 보지 않았느냐? 5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 6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 줄 말이다.'
가장 오해를 많이 사는 것이 5절에 있는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계약을 지키면’ 이라는 조건절 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사제 나라가 되리라’ 입니다. 이건 조건절이 아니고, 이제는 이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근거로요? 이스라엘 자손이 에집트 땅을 떠나 시나이 광야에 들어섰기 때문에, 비로소 지리적으로, 시간적으로 종 되었던 에집트 땅에서 하느님이 꺼내어 하느님의 백성을 삼으려고 그들을 자유롭게 했기 때문에, 이제는 하느님을 순종할 수 있는 자리에 왔다. 라는 선언이며, 시간적으로 종이 되었던 곳에서 벗어난 겁니다. 그 일이 일어나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같은 장소에 놓고, 같은 시간에 놓고, "어떻게 할래?" 라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 순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논할 때, 이 은총에 관한 것도, 그 존재론적 이분법으로 잘하고 있는 사람과 못하고 있는 사람 식으로, 옳은 것과 그른 것 식으로 자꾸 이원화합니다. 은총이라는 것은 지리적으로 볼 때 에집트에서 약속의 땅으로 옮긴 것을 말하며, 시간적으로 볼 때 과거에서 현재로 온 것을 말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왔는데, 이 현재는 어떤 현재냐 하면, 과거가 누적되어 생긴 결과가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있는 것을 정리하여, 끝장을 내어 새롭게 연 현재인 것입니다. 이사야 43장에 의하면, (이사43,1-7) 1 그러나 이제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야훼의 말씀이시다.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야훼의 말씀이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건져 주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2 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 갈 때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 가지 못하리라. 네가 불 속을 걸어가더라도 그 불길에 너는 그을리지도 타버리지도 아니하리라. 3 나, 야훼가 너의 하느님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내가 너를 구원하는 자다. 에집트를 주고 너를 되찾았고 에디오피아와 스바를 주고 너를 찾아 왔다. 4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그러니 어찌 해안지방을 주고라도 너를 찾지 않으며 부족들을 내주고라도 너의 목숨을 건져 내지 않으랴! 5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보살펴 준다. 내가 해뜨는 곳에서 너의 종족을 데려 오고, 해지는 곳에서도 너를 모아 오리라. 6 내가 북쪽을 향해서도 외치리라. '그들을 어서 내놓아라.' 남쪽을 향해서도 외치리라. '그들을 잡아 두지 말라.' 아무리 먼 데서라도 나의 아들들을 데려 오너라. 땅 끝에서라도 나의 딸들을 데려 오너라. 7 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들,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한 내 백성, 내 손으로 빚어 만든 나의 백성이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너는 내 것이다."라고 얘기하는 건, 그들을 사물 취급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 호칭을 보십시오. 야곱아, 이스라엘아, 한 개인의 인격입니다. 내가 너를 창조하였은즉, 내가 너를 사랑함으로, 하느님의 의지가 듬뿍 밴, 무한한 하느님의 성실하심과 창조자로서의 권위와 책임과 능력으로 하시는 말씀들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결과 시킨 것의 크기를, 그것이 그렇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법을 은총이라고 합니다. 잘못된 자리에서 잘한 자리로 나오는 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신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이었죠. 잘 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이죠. 누가 그렇게 했다고요? 집 나간 자식을 쫓아와 붙들어 돌아온 하느님 아버지가 하신 일이죠. 어떻게 했냐고요? 그의 성실하심과 사랑과 능력이 그리 하셨죠. 그게 은총이지요. 붙들어 왔죠. 우린 뭐라 그런다구요? 또 나가면 또 붙들어 돌아오시겠네. 그렇게 말하는 거는 나쁜 놈입니다. 사랑이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다만 개념과 원칙을 논할 때 쓰는 말들입니다. 글 쓰다 틀리면 찍찍 긋고 다시 쓰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실수를 했으면, ‘미안하다’ 그래야 되고, ‘내가 잘못했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된다’ 그래야 되고, ‘야 거기 가지 마라’ 붙들어야 되고, 인격과 인격이 가지는 고급한 관계성이요, 책임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은혜(恩惠)가 자꾸 개념화합니다. 원칙화하고, 말하는 것에 불과해지고, 그것을 행한 그 은혜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크기들, 하느님의 구체적인 간섭이 자꾸 배제됩니다. 뭐라고 질문이 나왔다고요?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다(5,20)’ 죄를 더 지으면 은혜가 더 올 거 아니냐? 그런 말을 한다구요? 그니까 바오로가 뭐라 그랬다구요? ‘그럴 수는 없지.’ 펄쩍 뛸 수 밖에. 그건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식들이 부모 말 안 듣고, 부모가 너 그렇게 살면 어떡할래? 공부는 안 하고 그렇게 밤낮 놀기만 너 그래 갖고... "엄마 누가 낳아 달랬어? 나 죽어버리면 그만이잖아." 하~ 몇 살쯤 되면 철이 드나요? 그렇게 말하는 게 무슨 말인지 그때는 모르죠. 누가 견디죠? 당연히 부모가 견뎌야죠. 거기서 이 말 안 해야 돼요. 너도 너 같은 새끼 하나 낳아서 길러. 그 말 안 해야 돼요. 욕을 먹어야 돼요. 어떤 분이, 자기는 어려워서 어머니가 광주리 장사를 했답니다. 과일도 받아다 팔고 생선도 받아다 팔고. 어느 날 친구들하고 학교에서 그때 교복 입고 다니던 시절에, 이제 하굣길에 어머니를 길에서 만난 겁니다. “아이고 얘 내 딸 누구구나” 반가워 했더니, 딸이 딱 친구들 앞에서 부끄러워하죠. “아주머니 누구세요?” 그 말 한 심정을 아시죠? 안 해본 것 같은 시치미 떼지 마시고. 아주머니 누구세요? “어 그래, 어 그래, 아줌마 간다.” 그러고 어머니가 갔대요. 센 분이죠. 반가워서 내놓은 소리, 딸이 창피하는 거 얼른 묻어 안았죠. 집에 와서 야단치면 안돼요. 커서 그게 뭔지를 배우면, 그도 어머니를 닮은 훌륭한 어머니가 되죠. 본 게 있어야 훌륭해지죠. 밤낮 고함만 지르는 부모만 모셔갖고는 훌륭해지지 못합니다. 우리 하느님이 뭘 하셨는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은혜가 우리를 어디로 끌고 왔느냐를 시간을 직선으로 펼칠 수밖에 없듯이 시간에 어디 정체된 곳이 어디 있어요? 현재가 애매한데. 그렇죠?. 말을 하는 순간 과거가 되는데, 이 무서운 시간. 하느님의 일하심에 빈틈 없음. 그, 그 엄정함이 시간입니다. 매년 나이를 먹잖아요. 보람이 있든 없든. 우리가 나이보다 젊은지 나이보다 괜찮은지는 그거는 다른 문제죠. 나이는 먹는 거지요. 변함없이. 그렇게 하느님이 뭘 하셨는가를 알지 못하면 ‘은혜를 더하기 위하여 죄를 더하자’가 나온다니까요. 우리 로마서 6장으로 와보세요. 본문이 하는 은총이 한 일, 은혜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현재가 뭔가를 얘기합니다. 이렇게 얘기하죠. 5장 1절부터 보죠.
(로마5,1) 1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얻었어요. 완료형이에요. 얻었고 누리자. 지금 누리자. 현재요. 예수로 말미암아 과거가 해결되어 지금은 하느님과의 평화의 자리에요. 그게 현재예요. 그러니까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돌아가자구요?. 불화하는 자리로 돌아가자구요?. 그렇게 할 수 없지요. 서울에서 호주를 가기로 했는데 한잠 자고 깨어서 내다 보니까 제주도에요. 잘 잤네. 돌아가자. 그러진 않겠죠? 여기까지 왔네죠. 더 가야죠. 그 다음엔 뭐가 있어요? 제주도 다음엔? 그런거야 아무러면 어때요.
(로마5,2) 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완료형이에요.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합니다. 지금 들어와 있어요. 이 은총에 들어와 있어요.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자’ 이건 미래예요. 하느님의 영광의 완성은 미래요. 그 현재가 뭔지 알겠죠? 새로 시작된 예수로, 새로 시작된 약속의 백성, 복된 백성이에요. 은총이 무얼 만들었느냐? 어디에서 이 자리를 오게 했느냐? 하느님과 불화(不和)한 자리,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리에서 지금의 자리, 하느님과의 화목(和睦), 그 영광을 약속으로 받은 희망 속에 살 수 있게 된 인생에 들어와 있다. 에페소서에서는 같은 표현을 '새 생명'이라고 얘기해요. 새로운 종족이 된 거예요. 새로운 인생, 새로운 희망 속에 있는 거예요. 절망과 무지와 비참 속에서 벗어나 있어요. 벗어난 것만 얘기할 것이 아니라 그게 현재예요. 그 현재는 그 과거에서 우리를 꺼낸 그 능력으로 하느님이 약속한 것이에요. 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속에 우리가 있고 그 일을 이루시려는 창조와 심판의 하느님이 이 일을 이루었고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돌아가면 어때?"라는 말은 입에 올릴 수도 없다. 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로마서가 이런 부분에 대해 얼마나 정확히 설명을 하느냐 하면~ (로마5,9) 9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완료에요)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건 미래라고요.
어느 선상에 놓여있다? 하느님이 그의 목적을 우리에게 이루시려는 그의 의지와 능력과 약속 속에 놓여있다. 하느님 없이 살던 파멸의 자리에서 벗어났다. 하느님께서 예수 안에서 그러셨다. 지금은 하느님과 화목한 자리다. 그 영광을 희망으로 갖고 있는 자리다. 믿음으로 살자. 지금 우리입니다. 6장에 나오는 식으로 얘기하면, 6장 8절에, 만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이게 그겁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의 과거를 끝내기 위하여 우리를, 어차피 죽을 우리 죽음으로 끝날 우리의 자리에 뛰어들어와 우리와 함께 죽음을 함께 나누셨다면, 우리의 끝장 날 운명을 주께서 함께 들어와 감수하셨다면, 그의 부활에 우리도 묶여 부활할 것 아니냐 이게 그리스도가 하신 일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고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십니다.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자리에 들어오셔서 죽음에 동참하십니다. 왜요? 우리를 당신과 먹기 위해서. 그래서 그의 살아나심에 우리를 일으키시려고. 그가 죽으심은, 8절이 어디갔어요? (로마6,8-10) 8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9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0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어서 죄와의 관계는 없어졌고, 관계를 맺을 수가 없죠. 죽어버렸으니까. 내가 다시 살아나서 예수로 말미암은 새 종족이 되자, 하느님과 화목된 자요, 예수 안에 있으니까 하느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 것이다. 여기가 바로 완료와 현재와 미래가 설명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시간과 같이 과거로부터 현재로. 현재를 저와 약속된 미래를 위하여 만드셨다구요. 이건 되돌릴 수가 없어요.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것 같이. 그러니 이제 우리가 있는 현재는 미래를 향하여 하느님이 일하시는 과정의 현재거든요. 그러니 방심하지 마라. 필리피서에서는 “그러므로 나의 형제들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함써 이뤄라”(2,12). 이런 격려로 나타나게 되는 거예요. 우리의 현재를 알겠어요? 아까 읽은 출애굽기 19장에 의하면, (출애19,6) 6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 줄 말이다.' (로마6,10-11) 10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관계를 말하는 거예요. 죄와의 관계는 없어졌어요. 내가 없어졌기 때문이죠. 죄와의 관계는 없어요.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하여 책임을 지듯이 하느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약속된 것은 영광인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돌아갈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가 불안하죠. ‘잘했다, 못했다’ 밖에 판단하는 기준이 없으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 내내 하는 것이 과거를 추억하는 거예요. ‘그때가 더 낫다’ 이거에요. 성경이 하는 얘기는, ‘좋다, 니가 그렇게 어리석게 말을 해도 좋다. 그래도 시간은 돌릴 수 없다.’ 그러는 거예요. 이게 고마운 말씀이죠. ‘옛날을 추억해라, 회고해라, 후회해라, 원망해라, 그래도 돌아가지 못한다.’ 이게 은혜예요. 시간 속에 이 일이 일어났으므로 돌이킬 수 없어요. 우리의 못난 것으로 시간이 영유(永有)할 수 없어요. 역행할 수 없어요. 다행인 것이죠. 예수 안에서 얻은 구원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늘 원망하고 늘 다른 것으로 자기를 확인하는 바람에 늘 안심과 불안, 자랑과 수치 밖에는 왕복할 내용이 없는 한심한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가듯이 하느님은 일하고 계시다구요. 불평하는 자를 끌고 가시죠. 루이스의 표현에 의하면, “예수를 안 믿을 뿐만 아니라, 끌어안는데도 발버둥친 나를 끌어안고 끌어가셨다”. 얼마나 감사한 은혜인가! 이게 그리스도교에요. 우리가 얼마나 이해했는가, 얼마나 충성했는가, 얼마나 많이 감사하는가는, 다음 얘기라고요. 하느님이 일하고 계시다. 그러면, 난 뭐해요? 이게 6장 1절이에요. 은혜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알아라. 니가 돌아보고 울고 뻗칠 때도 하느님은 널 끌고 가고 계시다는 거 기억해라. 해마다 나이를 먹는다. 나이가 육십 이상 붙어지거든 이제는 그만 칭얼대라. 그러는 것입니다. 성경은 *천주교의 성경(구약46권 신약27권) 73권 *개신교의 성경(구약39권 신약27권) 66권까지 있다. 그 전에는 알아 들어라. 그렇게 말이 되나요? 안된들 알아들어야죠. 이사야 55장에 가면, 60대가 되면 훌륭해지고 건망증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이사55,6-11) 6 야훼를 찾아라. 만나 주실 때가 되었다. 그를 불러라, 옆에 와 계신다. 7 불의한 자는 그 가던 길을 돌이켜라. 허영에 들뜬 자는 생각을 고쳐라. 야훼께 돌아 오너라, 자비롭게 맞아 주시리라.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 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9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10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기가 막히죠. 기억 안 나는 지난 세월, 기억하고 싶은 것은 한 세 개, 나머지는 다 생각하기도 싫고 생각나지도 않는 그 평생을 하느님이 하루도 대강 넘기지 않으셨다고 얘기합니다. 비가 내려서 헛되이 하늘로 돌아오지 않는 것 같이 내 말과 내 일은 하나도 헛된 것이 없다. 내가 쉰 날은 없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데나리온에 팔리는 것 아니냐? 그러나 그 중에 하나도 내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너희는 머리칼까지 다 센바 된 하느님의 자녀다.’ 라는 말들을 기억해야 되는, 이 하느님의 일하심이 어떻게 엄정한가, 진실한가에 대하여 인생으로 확인하지 못한다면 다만 경험이나 어떤 특별한 기적으로가 아닙니다. 살면서 누적되는 인생의 무게, 영혼의 깊은 갈증에 대하여 답하시는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없다면, 이해할 수 없다면, 인생은 정말, 정말 헛된 것이 되죠. 우리의 한숨과 눈물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은 윤회(輪回)론자들에겐 당연한 결론일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쳇바퀴를 도는 것이라면 어떤 깨우침, 어떤 기쁨, 어떤 우연과 해프닝에, 그들의 모든 가치를 부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세계관은, 창조에서 심판까지, 하느님이 지으시고 목적하시고 채우시는 현재가 있습니다.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눈물과 실패를 가지고도 만드시는 하느님, 일하시는 하느님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용서가 있고 회복이 있고 기적이 있고 하느님의 기뻐하심이라는 방점이 찍힐 때까지 놓아두시지 않는 하느님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은, (요한1,14) 14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독생자)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은혜)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이 시간과 공간의 구체적 하느님의 일하심입니다. 오셨던 것이 과거에 번복할 수 없으며, 말구유에서 나서 30세가 되어 공생애를 시작하기까지 아무것도 아닌 자로 살아, 하느님의 종으로 왔으되 그 영광을 벗어 던진 한 인생으로서의 오해와 고난과 질시와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순종을 이루신 것입니다. 죽고 사셨습니다. 그 엄정성을 기억하십시오. 고린도후서 5장에 이 말씀을 우리 스스로를 위하여, 우리 인생을 위하여 오늘의 말씀의 결론으로 꼭 붙들어 매기 바랍니다. (2코린5,13-16) 13 우리가 미쳤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미친 것이고 우리가 온전하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위해서 온전한 것입니다. 14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그토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리스도 한 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15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죽으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예수께서 오셔서 인류와 역사의 구원을 행하셨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죄악(罪惡)된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엎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죗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를 멸절시킵니다. 종자를 없애버리십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인류가 죽음에 다 들어가 더 이상 죄가, 죽음이 권세를 부릴 대상을 없앱니다. 주님께서 다시 부활하시어, 새로운 인종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가.
(2코린5,14ㄴ-15) 14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리스도 한 분이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셨으니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15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죽으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역사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긴 역사 속에 태어나는 각 개인에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린 아직 모릅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대하여, 섣부른 심판은 금물입니다. 언제 그것을 적용할지 모릅니다. 얼마만큼 잘못을 저지르고 있느냐? 도 상관이 없습니다. 신앙에 관한한 그것은 모릅니다. 가장 반대했었던 자가 돌아선 게 바오로입니다.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2코린5,16-17)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세속적인 표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세속적인 표준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였지만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17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를 믿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역사의 분기점을 지나오게 된다고요. 죄악된 과거가 아닌 새로운 세상에 자기가 태어났다는 걸 알게 된다구요. 그러나 아직 그 영광의 완성은 보이는 현실로는 미루어져 있지요. 그러나 그 세상에 들어와 있죠. 거기가 어렵지요.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성육신을 행하셨다는 사실을 우린 연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적용은 시간적으로 끝나 있으면서도 각 개인의 현실과 실존 속에 적용하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구원을 받았고 우리가 그렇게 우리 이웃들 앞에 갑니다. 어떤 이웃? 내가 나된 그 이웃. 성공했으면 성공한 자 옆에, 실패했으면 실패한 자 옆에, 잘난 척하고 있으면 잘난 척 하는 자 옆에, 억울하면 억울한 자 옆에 보내지는 겁니다. 그것 없이는 이웃이 될 수가 없지. 아닌 자가 행하는 것은 대부분은 동정이죠. 혹은 원망이죠. 이웃이 아닙니다. ‘이게 뭔가’ 하는 자리가 하느님이 일하시는 자리고, 예수님이 사셨던 것 같이 오해와 수난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수용해야 됩니다. 로마서 5장이 그거였죠. '그러므로' 어떻게 했어?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은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한다. 그리고 환란이잖아요. 아직 환란 속에 있다고요. 새 나라에 속했으나 환란 속에 있어요. 왜요? 구원을 적용하고 계시죠. 혼란 속에 있어요. 억울하세요? 억울한 자 옆에 간 거예요. 억울해 보지 않고는 억울한 자 이웃이 될 수가 없어요. 그러니 예수를 믿는 게 뭔지 알아야 돼요. 하느님이 어떻게 일하는지 알아야 돼요. 우리가 싫어하는 것, 가치를 두지 않는 것, 모두가 하느님 손에 있다면 그것은 다 기적이 될 수 있어요. 그 하느님의 가장 큰 능력이 될 수 있어요. 각 개인의 소중함을 찾아오시는 구체적인 손길이 될 수 있어요. 내가 선 자리를 수용하세요. 거기서 현재를 사세요.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고 있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아는 자의 늠름함과 넉넉함을 가지세요. ‘무슨’ 소리를 버리고 ‘~떠라면’을 버려야 돼요. '~떠라면'을 버리고, ‘그때는’ 이걸 버리세요. ‘이런 걸 갖고 있으면’ 이라는 가정법을 다 버리고 우리의 구체적인 인격과 생애를 동원하여 하느님의 사람을 사세요. 하느님이 기적을 보이실 겁니다.
하느님의 일하심을 우리 스스로에게서 발견할 수 없고, 다만 원망과 비명 밖에 지를 수 없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신이 인간의 손에 붙잡혀 못 박혀 죽는 자리에서 하느님이 일하신다는 걸 기억하고 거기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이 드러난다는 걸 기억하지 못하면 자신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일하고 계신다.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 ‘이것이 최고의 하느님의 기적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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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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