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더불어(together) 주님과 만남의 여정_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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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 작성일2024-01-05 | 조회수317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참나의 발견과 실현- “형제를 사랑하라”
"하느님, 내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내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시편51,12)
제가 강론을 쓰기전이든 쓴후든 항상 생각하는 것은 제목입니다. 예전에는 한 줄이었다가 몇 년전부터는 두줄, 또 때로는 세줄일 때도 있습니다. 오늘은 “더불어(together) 주님과 만남의 여정-참나의 발견과 실현-형제를 사랑하라”세줄입니다. 또 제가 2014년, 벌써 10년이 지났네요, 산티아고 순례 여정후 가장 선호한 제목은 “삶의 여정”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삶의 여정은 날로 ‘저물어가는’ ‘노화(老化)의 여정’이 아니라, 날로 사랑의 열매 ‘익어가는’ ‘성화(聖化)의 여정’이라 함이 맞을 것입니다. 피정 강의 때도 참 많이 나눈 주제가 삶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화두처럼 던지는 두 물음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여러분의 일생을 하루로 압축할 때 오전, 오후 어느 시점(時點)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일년사계(一年四季), 여러분의 일생을 일년으로 압축할 때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이렇게 성찰할 때 하루하루, 거품이나 환상이 사라진 본질적 깊이의 사랑을 살 수 있겠습니다. 저로 말하면 수도원 설립 다음해인 1988년 늦여름의 나이 40에 와서 올해 76세가 됐으니 하루로 하면 오후 4:30분, 사계로 하면 초겨울의 시점에 들어서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런 자각이 하루하루의 삶에 올인하게 합니다. 엊그제 피정팀 강의시 맨처음 포문을 연 말마디도 잊지 못합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2024년 새해들어 오늘 최고의 선택을 하셨으니 이 또한 은총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성탄시기,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에, 가장 아름다운 분 주님을 만나러 오셨으니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십시오.”
삶의 여정에, 삶의 행복에 하루하루 날마다의 선택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작년 2023년 한해를 마감하며 한해의 사자성어로 대학교수들은 “이로움을 보자 의로움을 잊다”는 뜻의 “견리망의(見利忘義)”를 꼽았습니다. 논어 헌문편에는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라”는 뜻의 “견리사의(見利思義)” 와는 정반대입니다. “견리망의(見利忘義)”, 직설적으로 말해 “돈을 보자 하느님을 잊다”가 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재앙중의 재앙은, 비극중의 비극은, 불행중의 불행은 희망이자 길이자 빛이신 하느님을 잊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희망을, 길을, 빛을 잃을 때 사람은 저절로 죄짓고 병들기 마련입니다. 새벽에 눈길을 끈 책 제목에다 <공동선1-2월> 특집에 나온 몇몇 사제들의 글 제목들이었습니다.
“오늘도 나아가는 중입니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습니다” “더 세상안으로, 덜 세상적으로” “계속 걸어가겠습니다. 길동무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영원한 현역으로 사랑의 여정을 살겠다는 결의를 다짐한 제목들입니다.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 “사랑의 전사”로, 졸업이 없는 영원한 학생의 주님 “사랑의 학인”으로 살겠다는 결의입니다. 2009년, 그러니 15년전 우리 피델리스 수사가 마르코 수사의 지도하에 심은 수도원 하늘길 메타세콰이어 나무들이 장관입니다. 전지가 끝나니 하늘 높이 키도 훌쩍 커진 듯 합니다. 즉시 떠오른 묵상글입니다.
“하늘 향한 끝없는, 사랑이, 그리움이 저리도 반듯하게, 하늘 높이, 크게, 자라게 했나보다. 수도원 하늘길, 가로수, 메타세콰이어 나무들”
흡사 주님 안에서 사랑의 여정중에 더불어(together) 성장, 성숙해가는 우리 수도공동체의 형제들의 사랑을 상징한다 싶습니다. “사랑한다”라는 명시적 고백없어도 이렇게 함께 살아감이 사랑입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의 여정중에 있는 공동체 도반들입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사도들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장수했던 분으로 기억력이 쇠퇴했던 노년에는 늘 “서로 사랑하라”는 설교에 제자들이 불평했다는 일화도 생각이 납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1서중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들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이며 그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습니다.”
새삼 사랑과 진리는 함께 감을 깨닫습니다. 어제도 나눴다시피 구체적 형제 사랑은 형제를 주님께 인도함으로 실현됨을 봅니다. 오늘 복음의 필립보와 나타나엘이 형제 사랑의 모범입니다. 주님께 불림받은 필립보는 그의 절친인 나타나엘을 집요하게 주님께로 인도하니 이 또한 형제 사랑의 표현입니다.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강권하자 그는 예수님을 향했고 마침내 두분의 감격적 만남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최고의 격찬이자 찬사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찬사는 없습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참나를 발견한 나타나엘입니다. 나타나엘보다 더 나타나엘의 진면목을 안 주님입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 사랑의 여정을 통해 참나의 발견이자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나타나엘의 조건반사적 고백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고백하는 나타나엘입니다. 정말 참사람과 참사람의 운명적 만남입니다. 나타나엘이 주님을 만남으로 새로운 삶의 여정이 시작됐음을 봅니다. 어찌 이 순간을 잊을 수 있을런지요?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나타나엘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 인생들 어떻게 전개됐을까요?
새삼 우리 삶의 여정은 우연이 아닌 하느님 사랑의 섭리였음을 깨닫습니다. 한두번의 만남으로 끝나는 여정이 아니라 주님과의 계속적인 만남을 통해 주님을 닮아감으로 역설적으로 참나의 실현입니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형제들과 더불어 사랑의 여정입니다. 혼자의 구원은 없고 더불어의 구원뿐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72장 마지막 감동적 구절도 이를 입증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님뿐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내려 오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올라 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하느님과 우리 사이 사다리같은 역할을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새삼 파스카 예수님은 우리의 더불어의 사랑의 여정에 유일한 “하늘문”이자 “하늘길”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더불어 하늘길 사랑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주님, 좋으시다, 영원하신 그 사랑, 당신의 진실하심, 세세에 미치리라."(시편100,5).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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