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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18) 율법(律法)과 죄(罪) (로마7,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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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07 조회수198 추천수2 반대(0) 신고

 

2024. 1. 7. (일요일)

로마서18) 율법(律法)과 죄(罪)


(로마7,7-13)

7 그러면 율법이 곧 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없었던들 나는 죄를 몰랐을 것입니다. 탐내지 말라는 율법이 없었더라면 탐욕이 죄라는 것을 나는 몰랐을 것입니다. 8 죄는 이 계명을 기화로 내 속에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다면 죄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9 나는 전에 율법이 없을 때에는 살았었는데 계명이 들어 오자 죄는 살아나고 10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가져다 주어야 할 그 계명이 나에게 오히려 죽음을 가져 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1 다시 말하면 죄가 계명을 기화로 나를 속이고 그 계명으로 나를 죽인 것입니다. 12 그러나 율법은 어디까지나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정당하고 좋은 것입니다. 13 그러면 그 좋은 것이 나에게 죽음을 가져 왔다는 말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죄가 그 좋은 것을 매개로 해서 나에게 죽음을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죄는 죄로서 드러나게 되고 계명으로 말미암아 그 죄가 얼마나 악독한 것인지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율법(律法)에 관한 것입니다. 율법에 관한 이해가 특별히 필요한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신앙 그리고 구원과 연결해서, 아주 필요한 이해가 죄(罪), 율법(律法), 은혜(恩惠)입니다.

영생, 구원에 대한 것은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쉽고, 이 죄와 율법과 은혜에 대한 이해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기도 하고 많이 왜곡돼 있고 해서, 사도 바오로는 죄, 율법, 은혜를 따로 다루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는 가장 중요한 말씀 10절 보면,

 

(로마7,10) 10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가져다 주어야 할 그 계명이 나에게 오히려 죽음을 가져 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법(法)은, 옳고 그른 것을 분간시켜주는 어떤 경계이고 눈금입니다. 그런데 살면서 경험하다시피 이 옳은 것으로 우리는 늘 사람을 잡지. 그 옳은 것으로 사람을 격려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법이나 옳음은 희한하게도 단죄와 비난으로 쓰이지, 적극적인 것으로 쓰이질 못하는데 우리가 실력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쓸 때는 뭘로 쓰냐 하면 자랑하느라고 씁니다. 그래서 누가 옳다고 자랑을 하면 옆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바보가 되는데 쓰입니다.

이게 무언가를 우리가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법은 혹은 그 비슷한 개념에서 규칙은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경기장과 경기 규칙과 같은 것입니다.

축구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축구장 가로는 60~70, 100~110의 세로로 된 이런 커다란 규모입니다. 이렇게 선을 긋지요. 그래서 공이 나가면 아웃입니다. 공을 다시 안으로 넣어야 경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게 없으면, 태평양에다 대고 공을 쳐버리면, 경기를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경기를 이 안에서 하라는 어떤 의미의 한계이면서 동시에 경기장을 성립시키는 것입니다. 그걸 넘어가버리면 경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선은 다만 제약이고 속박이 아닌 것이, 골대를 보십시오. 골 라인에 공을 차놓는 것은 그 라인을 벗어나는, 엔드라인이라고 할 때는 축구를 모독하는 겁니다.

축구에서 가로는 골 라인, 옆줄은 사이드 라인이 아니라 터치 라인, 축구에서는 규칙이 rule이 아니고 law, 법입니다. 거기다 넣는 겁니다. 경기를 성립시킨다구요. 그런데 줄을 넘었느냐 안 넘었느냐가 다면 경기가 내용이 없어지죠.

조금 더 진전시켜서 테니스 게임을 보십시오. 네트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체, 그 테니스 장을 성립시키는 사이드 라인과 엔드 라인이 있는데 만일 그게 없다면, 네트와 라인이 없다면, 아무 데나 갈긴다면 예술은 성립되지 않는 겁니다.

네트를 넘고 라인 안에 떨어지면서 상대가 못 받게. 우리의 직접적인 표현으로는 악질적으로 쳐야 되는 경기입니다. 그래서 예술이 되는 겁니다.

하나 더 가실래요?. 골프를 보십시오. 골프를 치다가 공이 물에 빠지거나 공을 잃어버리면 벌타를 먹습니다. 벌을 받는 게 아니라 경기를 계속 할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한 점을 먹고 경기를 계속해라 그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잡습니다. 우리 경쟁사회에서는 탈락을 시켜야 되기 때문입니다. 계속 제거해 나가서 홀로 남아야 되는 세상에 매정한 죽음의 법칙이 우리를 내몰고 있어서 하느님이 끌어안고 창조와 약속하신 영광을 누리는 경기는, 개념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그게 죄가 하는 일입니다. 죽은 자가 당면한 현실인 것입니다.

규칙을 위해서 경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규칙이 경기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거를 이해해야 되는데, 율법은 없고 경기자는 죽어버린 겁니다. 경기자가 죽어 있으니 율법을 갖다 쓸 데가 없고 이 시체가 어디 놓여있느냐 하는 검시밖에 없게 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사야 42장에 가면, 그리스도교의 깊이는 이겁니다.

 

(이사42,1-4)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 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 그는 나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인생길을 펴 주리라. 2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아 밖에서 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3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아니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만 펴리라. 4 그는 기가 꺾여 용기를 잃는 일 없이 끝까지 바른 인생길을 세상에 펴리라.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도 그의 가르침을 기다린다.''


메시야를 보내야겠다. 내가 이를 구원하고 그 일을 이루고 말겠다. 근데 그게 그 일을 뭘로 이루죠?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인격이 등장하는 겁니다. 법과 다르죠. 법은 중립이죠. 무정하죠. 나쁜 의미고 좋은 의미고가 없습니다. 그건 무정한, 그냥 규칙이고 법이죠. 어디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 본인에게는 의도가 없죠. 감정도 없고.

하느님의 일하심은 인격으로 일하신다는 거죠. 그 주권자가 그리스도교를 성립시킨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운명, 우주와 역사의 목적을 가지신 이가 인격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 인격의 가장, 가장 대표적인 성품이 “야훼다,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느님이다.” 라는 말입니다.

여기를 놓치면, 그것이 인격과 이 성품에서 벗어나면, 그것은 언제나 무기(武器)가 될 뿐입니다. 사람을 잡지요. 생명을 다루지 못하고 생명에게 늘 장애가 되며 생명을 해치게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사42,5-8) 5 하늘을 창조하여 펼치시고 땅을 밟아 늘이시고 온갖 싹이 돋게 하신 하느님, 그 위에 사는 백성에게 입김을 넣어 주시고 거기 움직이는 것들에게 숨결을 주시는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 내가 너의 손을 잡아 지켜 주고 너를 세워 인류와 계약을 맺으니 너는 만국의 빛이 되어라. 7 소경들의 눈을 열어 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 주어라. 8 나는 야훼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 내가 받을 영광을 뉘게 돌리랴? 내가 받을 찬양을 어떤 우상에게 돌리랴?


내가 만든, 나의 형상을 따라 만든, 나의 백성 나의 자녀 내가 만들고 내가 완성하겠다. 만들 때 가졌던 그 목적을 이룰 것이라. 나는 내버려두지 않는다. 나는 타협하지 않는다. 나는 내 이름을,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우상에게 주지 않을 것이다. 의지를 가지는 겁니다. 법에 무슨 의지가 있습니까? 그냥 종이에 쓴 글에 불과하죠.

그리스도교는 이런 진심, 사랑, 믿음, 의(義)라는 것을 내세워서 거기에 우리가 매달리기 시작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걸로 자신을 표시하신 하느님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아니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약속하시고 우리의 운명을 선언하시는 이가 인격자라는 걸 알아야 되는데, 그 분이 도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 율법이 하는 중요한 계시(啓示)죠.

그리고 그 성품적인 설명은 다만 법칙에 불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만 도덕에 불과하지 않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다만 옳고 그른 것을 나누러 오시는 분이 아니라,

(요한3,16-17) 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17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자, 곧바로 자기 확인이, 안 믿는 것들과 배타적 내분을 가집니다. "넌 안 믿었어. 지옥 가. 난 믿어서 천국 가." 그걸 거기다 써먹으라고 준게 아닙니다. 그거야 맞는 말이지만 거기다 써먹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가실까요.

(1코린15,54-57) 54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55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56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57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죽음은 무엇 때문에 온다고요? 죄(罪) 때문에 옵니다. 죄의 삯은 죽음입니다. 죄는 뭘로 그 성립근거를 가진다고요? 조건을?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맞냐 틀리냐?

‘으악!’ 이렇게 옆에다 써놓으세요. 으악! 율법은 아마도 아까도 얘기한 것 같이 경기 규칙일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패배할 수 있습니다. 게임에서 패배할 수 있습니다. 그럼 승리하면 살아남고 패배하면 죽는 것이 끝이 아니다. 지는 자는 죽이는 것이 아니다.

부모가 와서 등을 두드리며 "잘 싸웠어. 다음번엔 이기면 돼." 그리고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잘잘못에 그 하느님의 통치와 구원과 영광을 가두지 마십시오. 그것보다 큽니다. 진건 진겁니다. 잘못한 건 잘못한 겁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큰, 부모가 자식의 편을 들듯. "너 다시는 그러지 마라. 너 그렇게 하면 결국은 너 손해라는 거 알겠지? 아직도 모르겠다고? 밥 먹고 다시 얘기하자."

"아직도 모른다고? 너 죽을래?" 정말 죽일까요? 성경이 하는 이야기 속에서 하느님이 누구신가를 이런 죄, 율법, 은혜에서 오히려 더 분명하게 깨우치지 못하면, 이것이 하느님을 대신해서 튀어나옵니다. 하느님을 대신해서 헌신, 감격, 사랑, 이런 것들이 마치 자기가 궁극적인 주인인 것 같이 우리를 붙들고 늘어져서 우리의 신앙을 이 넓이, 깊이에서 붙잡아 갑니다.

예수를 믿는 자의 가장 중요한 현상은 넉넉함이어야 됩니다. 집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집에 가면 더러워진 옷을 빨아줄 것이요, 고픈 배를 채울 것이요, 내가 뭘 잘못했다 그러면 부모님이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느님, 만들지 않고 받습니다. 그게 그리스도교지요. 대강 살아도 된다. 그럴 리가 있어요? 히브리서 12장7절에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견책하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당신의 자녀로 여기고 하시는 것이니 잘 참아 내십시오. 자기 아들을 견책하지 않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허클베리 핀이 훨씬 편하게 산다는 건 아시죠? 그는 학교를 갈 수 없어서 톰 소여가 부럽고, 톰 소여는 학교를 안 가는 허클베리가 부럽습니다. '철이 있는가 없는가' 라고 물어야죠. 우리 인생에서 나의 실수, 실패, 경기에서의 패배 같은 것들은 가장 중요하거나 궁극적인 내용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경기에 이겨야 되고 모든 순간의 우위에 서야 한다고 믿는 바람에, 말하자면, 그런 명분이나 명예나 지위나 권력이나 우월함 같은 데 붙잡혀서 하느님이 누구시고 구원이 무엇이고 그 안에 있는 부요함이 무엇인지를 아마 놓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확인이, 매번 우리의 현실을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소원대로 조정하고 싶고 조작하고 싶고 장악하고 싶은 욕심을 낳는 것일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말이죠.

이 일에 대한 역사의 증언은 이렇습니다. '역사는 의식이 없다' 라는 말을 역사학자들은 다 압니다. 그 조건과 그 정황이 왜 이 결과를 낳았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맙니다. 1차 세계대전이 왜 났는지 2차 세계대전이 왜 났는지 결과적으로는 안 그럴 수 있는 이유가 더 많았는데, 그 일이 일어납니다.

야콥 이라는 18세기 독일 역사학자가 '세계 역사의 관찰' 이라는 글을 냅니다.

'세계 역사의 관찰'이라는 거는 ‘역사는 인격이 없다’는 겁니다. 심리적으로 진단할 수 없다 그래서 관찰, 아 그 무생물을 대하듯이 관찰을 한 겁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고, 이런 일이 일어났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만, 중요한 사실들만 나열하며 그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역사는 그걸 쓰는 사람이 과거를 자기 편하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우린 한국 사람이니까 일본이 밉고, 일본은 일본 사람이니까 한국이 우스울 겁니다. 어느 나라에 태어났느냐는 하느님이 정하는데 국력이라든가 무슨 다른 이유들 때문에 우린 억울한 때가 많습니다.

국력이 약하고 경제력이 약하고 국방력이 약하고 민도가 낮고 국민성이 무섭고 이런 모두가 불편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앙생활의 현실 속에서도 어디에서 열등한 자리, 말하자면 중요한 시합에서 졌다든가 억울하다든가 심판이 잘못 봤다든가, 이런 모든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모든 삶에 대한 절망과 회의와 분노라는 커다란 가마솥을 뒤집어쓰는 형국이 되곤 합니다. 거기에 대해 얘기하는 겁니다.

야콥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모든 경우에 성숙이 전부다. 흥했느냐 망했느냐 잘했느냐 못했느냐 이겼느냐 졌느냐, 모든 경우의 성숙이 전부다. 그리하여 어떤 결과를, 외형을 가지게 됐느냐는 역사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 나라가 잘 되면 국민이 모두 잘 되는 것 아니고, 그 나라가 망하면 국민 모두가 망하지 않더라.”

우리가 더 끌어다 쓰면 한 개인 영혼에 필요한 유익들은 외형적인 조건에 결단코 붙잡혀 있지 않더라. 하느님의 은혜를 베푸시면 어느 경우에도 유익을 본다 라는 사실이, 하느님이 다만 보상에 불과하고 심판자에 불구하고 원칙에 불과하면 이런 일들은 불가능해집니다. 그분이 은혜롭고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풍성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다만 원칙을 지켜야 하고 원칙이란 아무래도 좋아 라는 식으로 이해돼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이 의로우시고 거룩하시다는 사실을 우리의 복과 명예로 요구하고 계시고, 그 일을 위하여 하느님이 그의 의지를 동원하여 성실하심과 다정하심과 자비하심과 용서와 이해와 기다림으로 우리 안에 이 일을 만들고야 마는 것이 인생이다, 역사다,’ 이렇게 알아야지, 역사는 다만 순환한다, 인생은 다만 윤회한다, 이렇게 절망하지 않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다만 쳇바퀴를 도는 것 같은, 순환하는 역사, 순환하는 인생 아니죠. 각각이 훈련을 받아서 각각이 이 위대함과 하느님의 약속한 영광의 자리에 가는 것입니다. 각각이 다 구체적인 자기 인생을 살아서 이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엇인가 할 때마다 그 법을 주신 하느님이 얼마나 위대한가로 우리를 인도하여 자비롭고 성실하신 하느님을 만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3장 34절에 그래서 이걸 요구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이란 뭐죠? 사랑이란 이해하고 기다리고 될 때까지 정성을 바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을 하라’는 게 무슨 뜻이죠? 하느님이 우리에 대해서 그러신다는 거죠. ‘너 겁먹지 마라. 너 정단하고 다니지 마라. 너 인상 쓰고 다니지 마라. 네가 가진 자인 줄 알아라. 겁내지 마라.‘ 그게 사랑하라 입니다. 사랑은 불이 타는 게 아니고, 사랑은 너무나 넉넉해서 흘러넘치는 것들입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고통스러울 겁니다. 그걸 알면 패배 속에서도 명예가 있을 것입니다.

진 팀이 이긴 팀에 대하여 박수 치는 것보다 큰 건 없습니다. 그렇죠? 이기고 바보같이 구는 사람을 얼마든지 보면 승리를 감당할 실력이 없어서, 조소나 경멸이나 하고 경박하게 구는 것은 그 승리가 가지는 그 명예를 스스로 감당 못하는 것이죠.

지고 통곡하고 유니폼을 찢어버리는 것이 패배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게 끝이 아니다" 라고 박수를 쳐야죠. "나 이렇게 돌아올 거다." 그리고 "내가 이기면 그렇게 안 할 거다" 그러는 거예요.

우리 현실, 자신의 개인 인생, 조건, 환경,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 속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넉넉한 성숙이 있기를 바래요. 영광과 명예가 있기를 바래요. 질 수 없는 인생이 됐다는 것 기억하고, 한 순간도 필요치 않거나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 없다는 걸 기억해서, 모든 시간, 모든 경우에 이기는, 우리들의 삶이며 믿음이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무엇도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 아들을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않겠느냐? 그거 알고 살게 하소서. 우리의 눈빛을 따뜻하게,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어젖히는 우리 인생을 걸어가, 하느님의 사람이 모든 경우를 어떻게 넉넉히 받아내는가 보이는 위대한 길을 걷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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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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