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 공현 대축일 나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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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1-07 | 조회수251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주님 공현 대축일 나해] 마태 2,1-12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갈 길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우리들, 어둡고 컴컴한 곳에 갇혀 있던 우리들. 하느님이 어딨냐며 대들던 우리들. 알려고만 했을 뿐 느끼지 못했던 우리들. 하느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니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네. 그 사랑 주님께 모두 감사하여라. 우리에게 베푸신 기적들 모두 찬양하리니. 그 사랑 주님께 모두 감사하여라. 기쁜 노래 부르며 감사하여라.]
<그 사랑 주님께 모두 감사하여라>라는 제목의 찬양성가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머리로 알려고만 했을 때에는 그분께서 어떤 존재이시며 어떤 뜻을 품고 계시는지 깨닫지 못했지만,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찬미의 기도를 바침으로써 비로소 그분의 현존을, 그분의 사랑을 마음 깊이 느끼게 되었노라는, 솔직담백한 신앙고백이 담겨있지요.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이라면 한 번쯤은 겪게 되는, 보다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페르시아’라는 대제국에서 종교의례를 주관하던 세 명의 관료가 수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아기 예수님을 경배함으로써, 그분께서 세상을 다스리실 왕이자 ‘주님’이심이 온 세상에 공적으로 드러난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그런데 그들이 이스라엘을 방문하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세상에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도, 만나보지도 못했습니다. ‘메시아’라는 존재에 대해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원동력이자 계기인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성경에서만, 책 속에서만 주님을 찾을 뿐, 삶 속에서 그분을 만나고자 찾아나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모습입니다. 주님께 영광을 드리려고 하지 않고 그 영광을 자신이 누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자기 기득권을 위협하는 경쟁자로 여겨 배척하고 제거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 같은 권력자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따르려고 하지 않고 그분의 능력을 이용하여 자기 목적을 이루려고만 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의 모습입니다. 그랬기에 주님 곁에 살면서도 그분의 참모습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분과 인격적인 친교를 맺지도 못했습니다. 욕망과 편견에 사로잡혀 구원 역사 한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그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구경꾼으로 전락해버린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살던 동방 박사들은 주님의 참모습을 알아보고 그분을 만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머리로 분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 그분과 관계를 맺는 일에서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태하고 안일한 마음으로 뭉그적대지 않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즉시 길을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늘에 상서로운 기운을 내뿜는 유난히 밝은 별이 뜬 것을 보고 주저 없이 그 별이 있는 곳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대제국의 고위관료로서 누리는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고 세상의 참된 주인이신 분을 만나기 위해 멀고도 험한 고생길을 마다하지 않은 겁니다. 그만큼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과 의지가 강했던 것이지요. 목 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갔고 그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먼저 ‘빛’이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상서로운 별이 언제부터 하늘에서 빛나고 있었는지는 모릅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알아봐주기를 바라며 온 힘을 다해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을 겁니다. 아무도 그 별의 존재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 별은 서서히 그 빛이 약해지다가 의미를 잃고 말았겠지요. 하지만 그 별의 특별함을 알아보고 그 별을 따라 길을 나선 박사들이 있었기에, 그 별은 구세주의 강생을 알리는 구원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비춰주시는 계시의 빛은 그것을 알아보고 바라보는 이들에게,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따르는 이들에게만 구원의 ‘표징’이 된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간 것은 그분을 ‘경배’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경배하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프로스퀴네오’인데 이를 직역하면 ‘~ 앞에서 무릎을 꿇다’라는 뜻입니다. 대제국의 관료들이 변방의 작은 나라, 그것도 가축들이 먹고 자는 지저분한 마굿간에서 태어난 작고 약한 아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그들에게, 당신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경배하는 그들에게 당신이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믿을 만한 근거들이 있어야만, 먼저 나를 납득시키고 이해시켜야만 믿겠다는 태도는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먼저 무릎을 꿇어야, 그분보다 낮은 자리에서 경외와 믿음으로 올려다봐야 주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understand)
동방 박사들은 그렇게 알아본 주님께 예물을 바쳤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바쳤기에 예물입니다. 조건을 내걸고 마지못해 바쳤다면 뇌물이 되었을 겁니다. 자발적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소중한 것을 바쳤기에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참된 예물이 되었습니다. 첫번째 예물인 ‘황금’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귀한 보석으로써 그것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기에 ‘권력’을 상징합니다. 그런 황금을 아기 예수님께 바친 것은 그분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이자,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두번째 예물인 유향은 예로부터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릴 때 태우던 향료였습니다. 부족한 인간이 오직 하느님께만 바치는 가장 경건한 봉헌물이 바로 유향이지요. 그런 유향을 바친 것은 아기 예수님이 참된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세번째 예물인 몰약(沒藥)은 시신에 바르는 약품으로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런 몰약을 예수님께 바친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희생하시리라는 믿음을 드러내는 일종의 ‘예언’이었습니다.
그 예물들을 바친 다음, 동방 박사들은 자기 고장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 아기를 찾거든 알려달라’던 헤로데의 부탁을 따르지 않고,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올 때와는 ‘다른 길로’ 돌아서 갑니다. 세상의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며 따르는 참된 순명의 모습입니다. 그 뜻을 따르기 위해 익숙하고 편한 길을 마다하고, 또 어렵고 힘든 길로 돌아서 가는 수고를 마다않는 참된 믿음의 모습입니다. 미사를 마치고 세상으로 파견되는 우리의 모습이 그래야 합니다. 미사 시간에만 거룩한 사람이어서는 안됩니다. 성전 안에서만 열심한 신앙인이서는 안됩니다. 주님을 경배하며 그분을 내 안에 모시고 세상에 파견되는 우리는 세상의 요구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선택해야 합니다. 피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할까 염려하며 자기 신앙을 숨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힘들고 어려워도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 공현 대축일’을 기념하는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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