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주님 세례 축일: 마르코 1, 7 - 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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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 작성일2024-01-07 | 조회수17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지난 제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새삼 확신하는 점은, 저의 회심의 길(=호도스),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 살아가는 길은 바로 세례를 받던 순간부터 시작하였으며, 그 길은 이미 목적지에 도달한 여정이었습니다.왜냐하면 여행이란 본디 떠났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기에, 저를 포함한 모든 이의 영적 여행의 끝은 알파요 오메가이며 시작이요 마침인 예수님을 만나고 따르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1968년 12월 22일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기에, 저의 여정은 예수님과 함께 시작(=옛 존재, 거짓 자아: 육의 죽음)하고 예수님과 함께 마침(=새로운 존재, 참 자기: 영의 부활)하는 파스카 여정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받으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로 성탄 시기가 끝나고, 내일부턴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오늘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에서 교회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그리스도께 성령을 보내시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아들로 선포하셨으니,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난 저희도, 언제나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런데 여러분도 저처럼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 왜 죄인이 받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셨을까?’라며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습니까?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때 우리가 받았던 세례에 대한 올바른 은혜를 깨닫게 되고, 주님의 참된 자녀로 충실히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의 사랑받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녀”(1,11참조)임을 자각하면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또 다른 예수살기를 충실히 실행하고자 다짐하는 그 마음이 바로 연중시기를 살아가는 동력이라고 봅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 시대의 세례자 요한의 세례 운동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습니다. 세리나 군인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자신의 그릇된 삶을 뉘우치고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인정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 육화의 신비의 연장선상에서, “예수님께서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9) 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행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몸소 받으심으로 죄 없는 분이 죄인들인 우리와 같은 죄 많은 인간이 되셨으며, 나약한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 사건은 단지 강생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께서 온전히 나약한 우리 중에 한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의미로, 우리와의 아름다운 연대와 일치를 공공연하게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사도 바오로가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해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게 하셨습니다.” (2코8,9) 고 증언한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낮아짐과 비움 덕분에 잃어버린 인간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였고,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세례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세례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의 공현이며,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 경륜의 계시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 사건은 숨겨져 있던 당신의 신적 정체가 계시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1,10참조) 고 합니다. 그 소리는 바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11)하고 말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모습으로 오셨다, 함은 예수님에 의해 펼쳐질 새로운 세상은 곧 평화의 왕국임을 암시해 줍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비둘기는 징벌의 시대를 마감하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가는 동물로 등장합니다. (창8.11참조) 이렇게 예수님의 세례는 나자렛 사람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실 메시아라는 사실을 계시하는 엄청난 성사聖事의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세례 장면은 성서에서 가장 신비롭고 장엄하게 표현됩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고, 하느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인간이 태초에 지은 원죄는 교만이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조물주이신 하느님과 같아지려 하였던 교만이 원죄였던 것입니다. 교만으로 말미암아 닫힌 하늘 문이 구세주 예수님의 낮추심으로 오늘 요르단강에서 열립니다. 하늘 문을 열게 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낮춤과 겸손’의 결과입니다. 이 낮춤과 겸손이 하늘과 땅의 막혔던 장막을 찢어버리고 소통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가장 작은 자로서의 낮아지심의 표지입니다. 또한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세례자 요한 역시 예수님 앞에서는 끊임없이 작은 자로서의 겸손을 보입니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1,7) 우리 또한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이나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 앞에서 그렇게 낮아짐의 삶, 겸손의 삶을 살라는 초대입니다. 중국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루쉰’은 그의 첫 작품인 「광인일기」에서 현대인들의 비극적인 삶에 대하여 이렇게 비판합니다. 『자신은 사람을 잡아먹으려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잡아 먹힐까 두려워 모두들 매우 의심쩍은 눈초리로 서로 얼굴을 훔쳐본다. 그런 생각을 버리고 마음 편히 일하고 길을 걷고 밥 먹고 잠을 잘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그건 단지 문지방 하나, 작은 고비 하나 넘는 일인데, 그런데도 그들은 죽어도 그 한 발자국을 넘어서지 않겠단다. 』 사실 한 걸음도 안 되는 문지방을 넘을 수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의 비움이며 낮춤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 같은 비움과 낮춤이 없었기에 인간과 인간 사이, 하늘과 인간 사이의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인간이 도무지 실행하지 않았기에 오늘 하느님께서 스스로 낮추시고 먼저 요르단강에 들어가시어 겸손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각 사람은 주님의 눈에 과연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 마음에 드는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를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만약 그러한 인정을 받을 수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마음에 드는 아들 딸이 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겸손과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마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실행해야 합니다. 아빠 하느님 마음에 드셨던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 또한 주님 마음에 드는 아들과 딸이 되도록 낮아지고 작아지는 삶을 살아갑시다. 『나는 굳게 믿나이다. 진실하온 주님 말씀 성세 때에 맹세 충실하게 지키리다 주께서 나를 택하여 교회로 부르시오니 진심 감사 하나이다.』(가톨릭 성가 1번 1절)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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