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21) 하느님의 상속자(相續者) (로마8,12-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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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1-10 | 조회수239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4. 1. 10. (수요일) 로마서21) 하느님의 상속자(相續者) (로마8,12-17)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과연 빛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빛을 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 의무는 없습니다. 13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을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 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 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로마서 8장 오늘 본문에 제일 중요한 선언은 16절에 있는 바와 같이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신다.’ 는 구절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로마서 7장이 하느님 없는 죄 가운데 살던 과거를 설명하는 것이라면, 8장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인하여 하느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된 자녀인 현재를 그리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그것이 예수의 오심으로 역사가 둘로 나뉘고, 각 개인에게는 태어나서 구세주를 영접하고 예수를 믿는 것으로 적용이 됩니다. 이에 중요한 두 대조는 7장 24절에 있었던,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라는 과거와 8장 1절에 있는 바와 같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와 대조됩니다. 이 대조를 많이들 분명치 않게 갖고 있습니다. 둘이 대조되지만 살다가 죄를 짓는 문제를 직면하면 다시 7장으로 갔다가 다시 8장으로 왔다가 하는 식으로 이 문제를 오해하곤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단죄가 없는 지위, 운명에 들어와 있다. 그게 로마서 8장 이야기입니다. 단죄는 법을 기준으로 가질 때 생기는 것이고 사랑을 기준으로 가지고 들이대면 거기는 심판이라는 건 없다. 잘못한 것은 있지만 하느님과의 관계가 예수 안에서 정상화된 다음에 그 관계가 깨지는 법은 없다. 우리 일반 성도(聖徒)들이 이해하는 식으로는,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잘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혼난다. 잘못한데 대한 벌을 받는 개념이 아니고,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를, 결과를 보게 한다. 그래서 더러움과 부끄러움과 못난 자리로부터 영광과 명예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심을 받는다. 여기가 중요해서,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 8장 15절에 보듯이,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 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두려워한다는 개념은 요한1서 4장에서 이렇게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구절이라서, 꼭 기억을 해야 됩니다. (1요한4,18)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 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단죄 받을 일이 없다.’ 이걸 기억해야 됩니다. 이런 얘기들이 우리에게는 이렇게 단편적으로 제일 잘 돼 있는 경우가 교리적으로, 그 다음에, 개인에게 있어서는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는 어떤 증거 구절로 남아 있어서, 그 전체적인 문맥에, 전체가 이런 단어들, 이런 선언들로 만들어내는 중요한 전체 이야기는 모두 부족한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서 8장까지 오도록 그 앞을 제가 약간 개관을 하겠습니다. 한번 쫓아와 보십시오. 복음은 이렇게 정의되고 선언됐습니다. 1장 16절이었죠. “나는 그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하느님의 능력, ‘믿는 사람에게’라는 것은 믿어야 된다는 조건이 아니고, 믿음이라는 방식으로 주어진, 믿음의 등장은 율법과 대조되는 자격과 조건을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주는 자의 방식, 은총과 선물로 주는 방식으로 모든 이에게 준 하느님의 권능(權能)입니다. 복음이 왜 필요하냐? 1장 18절부터 3장 20절에 이르기를, "우리가 하느님 없이 살고 그래서 부패하고 있고 왜곡되어 있고 죽고 있다." 라고 선언하죠. (로마3,10-12) 10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하느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비뚤어져 쓸모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 20절에,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자는 없다. 이렇게 인류의 희망을 닫아버립니다. 그리고 이제 복음이 등장하죠. 21절, 그러나 이제는 하느님의 한 의로움이 나타났으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한 의로움은 율법과 예언서에 증거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느님의 의로움이니 차별이 없다. 그때 말하는 차별은 뭐겠어요? 잘잘못, 유무능의 문제가 아닌, 하느님이 주시는 구원이죠. 이렇게 구원이 선언됐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 얻는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은혜, 다른 표현으로, 믿음으로, 주시는 방법이기에 이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4장에서 아브라함을 다시 설명하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단 말인가? 어떻게 그 의(義)를 얻었단 말인가? 하느님이 불러 약속하여 그에게 의로움을 줬을 뿐이다. 그에게 의(義)를 준 것은 아브라함의 실력이 아니고 하느님의 의로움이요, 하느님의 자비였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이길래? 그는 창조의 하느님이며 그는 부활의 하느님이다. 이게 복음이 성립되는, 복음이 구체적으로 힘을 쓰는 방식이 ‘하느님의 은총(은혜)과 자비에 의한 것’이라를 설명하는 4장입니다. 5장에 오면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아이들이 죄 짓기 전에 죽지 않더냐? 다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더냐? 모든 인류가 아담의 후손으로 아담의 범죄에 갇힌 것 같이, 똑같이 그 법칙이 그토록 진지한 것이었다면 예수 안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안에서 일어난 인류에게 일어난 일은 어찌 더 진실이 아니겠느냐? 그게 5장 얘깁니다. 아담 안에서 우리가 모두 죽었던 것 같이 예수 안에서 우리 모든 인류는 살아나리라. 그래서 6장에 오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오? 은혜로 구원을 얻었으니 책임이 없느냐? 아무래도 좋으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죽어가던 인생에서, 못나게 살던 인생에서, 부활과 영광으로 새 생명을 얻었으니 이제는 바로 살아야 될 것 아니냐? 멋지게 해봐야 될 거 아니냐? 이게 6장 얘깁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할 것이다. 그 전에 우리가 속수무책이었던 아담의 후손으로서 죄의 권세에 붙잡혀 있었다면 이제는 로마서 8장식으로 얘기하면,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죽음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다. 이걸 대조하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다, 복음을 믿는다’ 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얼마나 큰 차원에서 인류 역사, 운명에 대하여 하느님이 어떻게 역사에 개입하여 인류를 인류에게 반전을, 부활의 승리를 예수 안에서 이루셨는가를 제대로 이해 못하니까 그 적용의 차원에서 선택, 유지, 자격이라는 것이 늘 우리를 7장으로 갔다 8장으로 갔다, 그렇죠.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로 가서 죽어나다가 또 어느 날 은혜를 입으면 8장에 온 것 같았다가, 8장에 와 있으면 쭉 8장이 유지되는게 아니라, 또 이렇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또 6장쯤 가서 예수 안에 있다는데 무슨 고생을 이렇게 시키세요? 여기 또 갔다가 이 로마서 전체가 하느님이 역사 속에서 모든 인류를 어떻게 다루어 지금 어디에 왔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을 놓치곤 합니다. 우린 못 만날 수 있습니다.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던 것 같이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모두 승리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복잡할지는 그 과정이 우리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각각 다를 겁니다. 그건 로마서가 다루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 과정을 어떻게 진실하게 명예롭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얘기는 다른 데 있고 로마서가 하고 싶은 말은 이 큰 틀입니다. 그래서 6장을 다시 보면, 8장의 얘기들은 이런 배경 없이는 사실은 이해가 잘 안 될 수 있습니다. (로마6,4) 4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린 새로운 생명을 가진 겁니다. 죽음에게 지지 않는 생명을 가집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왕 노릇하지 못합니다. (로마6,14) 14 여러분은 율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지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죽음이 주장하지 못하고 생명이 우리를 주장합니다. 죽음이 위협할 것입니다. 유혹할 것입니다. 우리는 아마 여러 번 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넘어짐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일어서게 만들 것입니다. 그 넘어진 것이 우리를 더 단련하고 더 깊이 있게 할 것입니다. 회개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를 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자뻑과 실패해서 끝내지 않아 붙잡아 일으키는 손길이라는 걸 알아야 회개 기도는 힘이 붙는 겁니다. 회개를 해서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할 수 있다. 일어설 수 있다. 돌이킬 수 있다.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를 모르고 회개 기도를 하면 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왜요? 다음에 또 넘어지니까. 그것이 "몇 번을 넘어져도 좋다. 내가 다시 일으킨다."를 아는 거라면 우리는 회개 기도를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근데 문제는, 이러한 구원이 문제는 오늘 로마서 8장에서 보시다시피 ~ (로마8,17)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복음의 놀라운 점은 하느님이 하느님을 외면한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시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를, 아무런 이해가 없는 우리를, 로마서 5장 8절식으로 얘기해서 우리가 아직 죄인 이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아버지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십니다. 우리가 자격이 없을 때, 이해하지 못할 때, 구하기 전에, 그것은 매우 신비롭고 놀라워서 많은 사람들이 “왜 납니까? 주님!”이라는 표현을 남겼습니다. "왜 저 같은 것을 구원하십니까?" 이제 로마서 8장에서 하는 얘기는 그것만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놀라움이 있는데 예수로 구원해 놓고 구원 받은, 그 하느님의 모든 의지와 성의와 능력을 동원하여, 죄 가운데서 꺼낸 하느님의 백성을 고난으로 집어넣는다는 사실입니다. 이걸 우리가 이해하지 못합니다. 죄인을 하느님의 권능으로 꺼냈다. 은혜와 믿음으로 꺼냈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피로 용서하셨다. 그것만으로도 이해가 가지 않고 엄청난데 그렇게 꺼내가지고 고난으로 보낸다는 것이죠. 고난(苦難)으로. 같은 로마서 5장에는 이렇게 얘기했었습니다. (로마5,1-6) 1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를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 죄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죽음의 자리에서 은혜와 능력으로 불러내신 그 신비로운 하느님의 부르심이 우리를 환란으로 보냅니다. 고난으로 보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로마8,12-14) 12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과연 빛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빛을 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육체를 따라 살 의무는 없습니다. 13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을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슨 보이지 않는 영혼과 이 보이는 육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에서 육신이라고 얘기할 때는 그것은 하느님 없이 사는 존재, 삶. 이것이 육신입니다. 하느님과 긍정적인 관계, 하느님과 화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존재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인생이 된 것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은 체험적인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늘 강조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증언, 이로써 성령입니다. 성령은 예수가 누군가를 증언하러 오시는 분입니다. 성령을 논할 때 예수와 그의 죽으심을 빼어놓고 성령을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런 여러 이유에서 하느님과 긍정적인 관계 아버지와 자녀라는 관계에 들어와 살게 된, 존재하게 된 존재와 삶의 방식 이걸 성령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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