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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22) 희망(希望)으로 받는 구원(救援) (로마8,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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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11 조회수154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4. 1. 11. (목요일)

 

로마서22) 희망(希望)으로 받는 구원(救援)

 

(로마8,18-27)

18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21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3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24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26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27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 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오늘의 본문들을 보면 이런 중요한 세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는 18절에 보는 바와 같이 고통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고난이 나오고, 이어 나온 것 같이 영광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단어는 18절에는 더 나오고 21절에도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24절에 보듯이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이 세 단어가 오늘 본문에 매우 중요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시작하면서 그것이 17절에 있었던 이 말을 잊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로마8,17)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자녀 이면' 이라는 것은 일꾼이거나 노예거나 하는 신분, 지위와 대조되는 것이죠. 그것이 다만 일꾼에 불과하다면, 일한 보수를 주면 끝이 납니다. 자녀는 보수를 주는 것이 아니라 기업(基業), 상속을 물려주는 것이죠. 우리가 자녀라면 우리가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 지위가 아니고 이 아버지의 기업을 이어받는 유산을 이어받는 그의 상속자(相續者)입니다.

그러려면 고난(苦難)을 받아야 된다. 이렇게 성경이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서 우리 깊이 오늘 본문으로 다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내용들은 이미 앞에 로마서 5장에서 언급이 되었던 것입니다. 한 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로마5,1-4) 1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를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희망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이 의미는 무엇을 바라는 것으로, 무엇을 내다보는 것으로가 아니라 그 목적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구원은 시작부터 완성까지의 시간적 길이가 있습니다. 이 목적을 이루는 방법으로 하느님은 고난과 환란을 정하셨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자기의 자녀를 삼으시고 자기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는 목적을 시작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실 것입니다. 고난으로 하시겠답니다. 그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모르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 인과응보가 대신, 이해의 틀이 되지요. 잘하면 복 받고 못하면 벌 받는다. 이 틀은 하느님의 대원칙(大原則) 중에 하나지만, 하느님의 공의로우심의 중요한 질서이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의 한 속성의 표현, 한 질서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은 그것보다 크십니다. 인과응보에는 없는 것, 가장 쉽게, 용서, 인과응보(因果應報)에는 있을 수 없죠. 용서, 회복, 사랑, 구원, 믿음 같은 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구원은 예수가 이미 인격이라는 걸 기억해야 됩니다. 그거 법칙이 아니고. 그렇죠. 그러니 하느님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가장 대표적인 기뻐하시는 방법도 예수와 십자가였고, 우리를 완성하시며 우리도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는 방법도 고난으로 정하셨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고난을 적극적으로 이해해야 되죠. 고난에도 불구하고가 결단코 아닙니다. ‘고난으로만입니다.

 

(히브2,9-10) 9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께서는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써 잠시 동안 천사들보다 못하게 되셨다가 마침내 영광과 영예의 관을 받아 쓰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겪으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의 소치입니다. 10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물은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많은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많은 자녀들이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로 하여금 고난을 겪게 해서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는 고난을 통하여 그의 구원을 이루시며 하느님의 영광을 완성하십니다. 예수의 고난, 십자가 죽음, 수치와 고통과 그리고 죽음입니다. 죽음을 맛본다는 게 무엇일까요? 죽음은 최악의 상황입니다. 그렇죠? 죽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겁니다.

죽음은 원래 성경식 이해에 있어서, 죄란 하느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없으면 생명과 진리와 승리와 영광의 근거가 없어집니다.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죄는 더 적극적으로 하느님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죽을 자리로 들어간 것이죠.

거기를 하느님은 찾아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예수의 고난입니다. 고난이란 뭐냐? 있어서는 안되는 경우, 우리가 만든 비참한 현실에 들어오시는 것이죠. 우리는 바로 이 문제, 우리가 경험하고 보는 현실과 그 현실에 들어오시는 예수에 관한 이 두 정황과 본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고난(苦難)을 당한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는 모두가 겪는, 보편적인, 예외가 없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과응보(因果應報) 라는 틀 외에는 이것을 이해하는 다른 틀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앙의 신비를 놓치곤 합니다.

그리스도교가 잘못한 자리에 하느님이 예수를 보내요. 잘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을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다. 그게 은총(은혜)이예요. 그게 하느님의 능력이요 사랑이라는 말을 담아내지를 못합니다. 고난을 부정적으로 이해를 해서, 언제나 잘못했을 때만 받는 벌로 이해를 해서, 고난을 당하면 무엇인가 잘못했을 거라고 생각을 하지, 하느님이 그것으로 일한다는 생각은 못하는 것이죠.

고난은 우리들 인생 전반에 걸쳐서 현실이 됩니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고난이라는 걸 언제 깨닫기 시작하느냐면, 사춘기가 되면서 깨닫습니다. 사춘기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 기대와 다르다를 알게 되는 거죠.

아무리 잘해도 안 되고, 잘하려고 해도 잘해지지 않는다. 세상에 대해서 놀라게 되고 자신에 대해서 놀라게 되는 거죠. 그 사춘기입니다. 철이 들려면 이 관문을 통과해야 됩니다. 이 의심의 관문, 불만의 관문을 통과해야 됩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에는 시간을 죽이는 방법 외에 이 문제를 풀 다른 실력이 없습니다. 생각을 하면 고달프기 때문에 시간을 죽여야 됩니다. 야구 구경 가고, 설악산 가고, 싸우고, 악을 쓰고, 시간을 죽이는 겁니다. 자신이 태어난 게 죄라는 걸 알거든요. 태어나서 이 꼴을 당하는, 답이 없는 인생을 태어난 것으로, 아주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겁니다.

하느님은 왜 그렇게 하실까요? 몸체를 키우고 계십니다. 그때 큽니다. 키가 크고 체중이 늘고 지능이 늘고 경험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되고 도망갈 수 없다는 걸 그때 배웁니다. 철학적으로, 사변적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도망갈 수 없는 현실을 너무나 충분히 확인합니다.

내가 어디에 속했는가? 내 한계가 뭔가? 내가 속한 사회가 무엇인가? 를 그때 배우지요. 그리고 거기에 세상은 원망을 놓고, 맘에 안 드는 자를 죽이면 해결이 된다고 보복을 놓고, 권력을 놓고, 예수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를 놓아주시죠.

그러니 따지고 보면 우리가 어느 시대에 태어났고 어느 정치, 경제, 사회의 조건 속에 있었으며 어느 부모 또 어느 유전자를 가졌느냐는 사실은 차이가 없습니다.

그건 컨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컨텍스트는 자기 자신의 정황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각자에게 준 정황. 어떤 유산, 어떤 환경, 어떤 유전 속에서 라는 존재를 만들었는가가 컨텍스트입니다. 그릇이 됩니다. 그런 급한 성격, 뭐 착한 마음, 무지, 경솔의 그릇이 됩니다. 문제는 거기에 무엇이 담기느냐죠.

그릇이 내용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생명을, 진리를, 하느님 아는 지식을,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그건 하느님만 주십니다. 그걸 주지 못하면 우리 시대를 살면서 보다시피, 컨텍스트를 바꾸는 싸움에 목숨을 걸게 됩니다. 정권을 바꾸고 나랑 견해가 다른 놈들은 다 죽이고 고함을 지르고 화을 내고, 외에는 텍스트의 싸움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시처는 그의 하느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자기가 당했던 사고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20년 전에 당했던 그 사고, 잊을 수 없는 사고, 교통사고로, 만취한 운전자가 자기 차를 중앙선을 넘어 들이받아 이 말은 다 100퍼센트 상대방의 잘못으로 이 사람이 씻을 수 없는 사고를 당합니다. 어머니와 아내와 딸이 죽습니다. 잊을 수 없는 사고고 넘어설 수 없는 충격이었죠.

20년을 지내고 그 책을 쓰면서 이렇게 얘기했죠. “이제 와서 보니 그 사고는 소품에 불과했다.” 소품이라는 건 얼마나 작은 건지 아시죠. 한 장면에 한 무대에 한 배치,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책 한권 같이 볼펜 하나같이 화분 하나같이 그렇게, 그렇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거지요. 왜 그게 소품이죠?

거기서 무얼 만들었는가, 그 안에 하느님이 뭘 담으셨는가에 비하면 그런 사고는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이 우리가 인생 전반에 걸쳐서 배우는, 태어나면서부터 고난 속에 있는 우리 환경이 나빠서도 아니요 무력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그 속에 보낸, 그래서 뭘 하시는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수 믿는 건 빨리 죽는 것 외에 보일 게 없습니다.

예수의 오심은 그런 의미에서 히브리서 2장에서 얘기하는 죽음을 맛보신다는 것은 하느님 없는, 하느님 거부한, 그래서 파멸로 밖에 갈 수 없는, 하느님 없는, 아무것도 가치가 없는 그 자리를 주께서 들어오시므로 거기에 아무것도 없는 컨텍스트(정황)에 본문을 담으시겠다는 겁니다.

요즘은 별로 못 봅니다만, 저 어렸을 땐 길거리에 그 가짜 장신구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신문지 위에 반짝반짝하는 목걸이와 귀걸이와 반지를 놓고 팔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당연히 가짜지!" 신문지 위에 진품을 올려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아무 보안장치도 없이 그 수많은 귀금속을 늘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하느님이 거길 들어오시면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 그게 부활 아닌가요? 우리가 겪은 그 고난들이 우리가 뭘 만들 수 없고 억울하고 장애인 모든 정황이 그 자체로의 문제가 아니라, 거기에 하느님이 본문을 넣을 수 있다면 우리들이 가지는 고난들은 오히려 우리들을 보낸 자리가 아닐까요?

예수께서 죽음까지 오셔서 본문을 넣으실 수 있다면 그것보다 못한 정황은 없거든요. 십자가(十字架)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악의 경우지요. 배신, 무지로 만든 수치거든요. 우리를 만들고 우리를 복 주러 오신 이를 팔아먹고 비난하고 뒤집어 씌운 자리 였잖아요.

거기를 하느님이 본문으로 그 정황을 쓰실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의 고난이라는 것은 결국 예수께서 그리하신 것 같이 우리를 보내는 모든 자리, 본문을 만들 수 없다고 느끼는 자리에 보내는 하느님의 복음이 아니겠냐? 이겁니다. 고린도후서 4장을 보십시오.

(2코린4,5-7) 5 우리가 선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고 우리는 예수를 위해서 일하는 여러분의 종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6 '어둠에서 빛이 비쳐 오너라' 고 말씀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 속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7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질그릇이 그릇이죠. 우리라는 존재와 우리 의(). 의역을 하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같은 삶에 가졌으니그 우리의 정황이 보잘 것 없죠. 우리의 지위나 우리의 능력이나 영향력이나 보잘 것 없죠. 거기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죠. 다시 말하면 질 그릇에 보냅니다. 뒤에 나오는 표현들을 제가 이렇게 의역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답답한 일을 당한다. 박해를 받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한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 이런 일을 당해도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거기에 보내졌다는 걸 알라.” 거기에 보내졌다구요. 거꾸로 뜨림을 당하는 자들에게 보내지고 있습니다. 동일한 컨텍스트를 가짐으로 그들이 우리를 이웃으로 받아줄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는 예수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컨텍스트 자체가 유능하고 흠 없고 진실하고 헌신적이어야만 내용을 담는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멋있는 그릇 만들다가 보내진 자리를 외면하죠. 보내진 자리 이거 말고 어디를 가고 싶으세요? 모두를 위하여 발언할 수 있는 자리? 이미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모두를, 우리가 없는 자리가 없게 하시는 자리로 보냄을 받죠.

그 모든 곳에서 뭘 하죠? 우겨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않고 답답함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왜요? 우린 본문이 있죠. 누구? 예수 그리스도. 오늘 본문에 와보세요. 로마서로 와보면 이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 고난이 있느냐?

 

(로마8,18-23) 18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보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20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21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 것입니다. 22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오늘날까지 다 함께 신음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3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속량)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아직 시간을 가지고 있고 하느님은 우리 개개인을 구원하는 정도를 넘어, 창조 세계 전체를 회복하시려고 합니다. 모든 피조물의 회복을 목적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겁니다. 예수를 믿고 나면 어떤 보상을 받느냐? 하느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합니다. 우리가 보내지는 곳? 시간과 장소와 이웃들 앞으로 보내집니다. 그땐 어떻게 보내지죠? 그들과 동일한 조건 속에 들어가죠. 같은 정황(컨텍스트) 속에 억울한 자리, 무능한 자리, 무명한 자리에 들어갑니다.

그러니 우리가 겪는 인생 속에서 잘 됐는지 못 됐는지는 겉을 보고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됐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본문이 없으면 허망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정황에서 본문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는 복된 것입니다. 이 일들을 희망이라는 시간적인 거리, 지금이 시작이고 완성이라는 자리까지 일하시겠다 라는 하느님의 크기에 대한 이해로써, 우리의 자리를 지켜야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 라는 존재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어제를 살 수 없고 내일을 살 수 없습니다. 오늘을 살아야 된다. 매일 하느님의 손길로 그 경우에서, 그 정황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발휘하시오. 오늘을 잊기 위해서 종말을 끌어당겨 쓰지 말고, 어저께를 후회하여 오늘을 핑계 대지 말고, 지나간 건 지나간 것이고, 오늘은 오늘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크기 속에서 나 하나가 온 우주를 다시 회복하시려는 하느님의 일하심의 한 자리다라는 이해를 갖지 않으면 억울해서 못살죠. 해답이 다 되지 않는 일 투성입니다. 해결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습니다. 우는 자리에 들어가라는 겁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께 웃는 것은 교황쯤 되어야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가 하는 것입니다.

두 개를 동시에 할 수는 없습니다. 가진 자는 가진 자리에서 같은 가진 자 속에서 본문을 가지는 가진 자가 되고, 빼앗긴 자거든 빼앗긴 자의 자리에서 본문을 가져 하느님의 일하심을 누리시오. 증언하시오. 어디가 더 나은 거냐? 예수는 가진 자로 오지 않았다만 기억하십시오.

가진 것은 죄가 아닙니다. 가졌기 때문에 놓칠 수 있습니다. 유능한 것은 큰 은사입니다. 그러나 그래서 놓칠 수 있습니다. 너무 그릇이 이뻐서 아끼고 아껴뒀다가 이사하는 날 깨뜨린 크리스탈 잔이 되지 마십시오. 고린도전서 1장에 가면 이 문제를 이렇게 분명하게 못을 박아놓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1코린1,17-31)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 18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19 성서에도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 버리고 똑똑하다 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리라' 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20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까?

21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이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23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24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이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25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26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27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 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셨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28 또 유력한 자를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29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 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31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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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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