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23) 하느님의 의지(意志) (로마8,26-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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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1-12 | 조회수5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4. 1. 12. (금요일) 로마서23) 하느님의 의지(意志) (로마8,26-30) 26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27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 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9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30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하느님과 화목(和睦)을 이루고 우리의 이해와 경험으로는 예수를 믿고 하느님의 영광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하는 그 과정이 고난(苦難)으로 준비되어 있다’ 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리하셨듯이 우리 모두에게 예수를 믿고 하느님의 영광된 승리의 자리까지의 과정을 고난이라는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 고난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돌아보면~ (로마8,20) 20 피조물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것은 제 본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22절에 그 창조 세계가 모두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말하고 있고 23절에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탄식하며 몸의 속량을 기다리고 있고, 그리고 26절에 보듯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어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앞에 두 가지 탄식이 우리의 고통의 깊이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성령의 탄식은 하느님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대강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게 겁이 납니다. 예수를 믿으면, 안 믿을 때보단 뭐가 좀 나아져야지 믿어서 더 힘들다면 가능한 한 늦게 믿는 게 나을 거 아닙니까? 또 우리들이 믿으면서 확인했듯이 "내가 뭘 잘못했는가?" 이게 뭔가 싶죠. 뭔가 싶은 생각이 당연히 들 것 아닙니까? 거기에 대하여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분명한 하느님의 일하심에 어떤 이해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로마8,28) 28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굉장히 중요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부추겨 채찍질하여 노력하고 전진하여 도달하는 결국을 얘기하고 있지 않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표현 속에는 분명히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책임의 한도를 벗어난 어떤 운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모든 것은 다만 최선을 다하면 이라든가, 열심히 기도하면 이라든가, 가치와 의미에 관한 우리의 진정성이나 우리의 성의 같은 것들을 조건으로 삼는 것과는 다른 그런 범위를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이 모든 것 속에는 우리가 미처 이해하지 못한 것, 미처 살아내지 못한 것까지 포함해야 모든 것이라는 말을 성립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로마8,29-30) 29 하느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택하신 사람들이 당신의 아들과 같은 모습을 가지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30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미리’라는 것은 우리의 이해, 결단, 노력, 우리의 어떤 업적보다 앞서는 이라는 뜻이지요? 우리가 다만 우리가 한 일에 보상을 받고, 우리가 한 일에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앞서는 하느님의 의지라는 것이 언제나 강조되어 있죠. 시간상으로도 언제나 앞서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죽으신 예수, 이렇게 복음의 크기를, 그 운명적 승리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미리 정하신 사람들이란 무슨 뜻일까요? 속속들이 안다구요? 어떻게? 하느님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아시는 겁니다. 널 내가, 내 뜻과, 내 목적을 가지고 만들었다. "내가 안다." 그 뜻이죠. 그가 우리를 정하십니다. 의지의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의지가 우선합니다. 그들을 부르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모든 믿는 자들은 현실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의롭게 된 자리에 와 있죠.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느님 없는 것’ 이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하느님의 가족으로 편입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지위와 신분이 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된 것은 하느님과의 관계의 정상화입니다. 우린 다 거기에 와 있습니다. 어디로 갈 것입니까?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승리, 영광된 자리를 갈 것입니다. 그것을 완료형으로 얘기합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완료형입니다. 그건 이루어진 운명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불러 의롭게 하신 우리의 현실, 우리 모두 이 현실, 이 고백 때문에 여기 있습니다. 거기서 부터 영화롭게 하신 그 자리를 시간 속에서 살게 하십니다. 성경(聖經)이 말하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푼 구원의 신비입니다. ‘프렌시스 쉐퍼’라는 사람이 자신의 주제를 그의 책에서 이렇게 제목을 썼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영어 번역본으로는 “How Should We Then Live?”입니다. 지금 딱 그 얘기 앞에 섰죠.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시작됐고 완성되어야만 하느님의 뜻과 작전과 의지와 약속 속에서 우리의 생은 어떤 식으로 바쳐져야 할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 과정을 성화라고 부릅니다. 성화라고 하면 말 그대로 거룩할 성(聖), 될 화(化), 해서 이렇게 어떤 도덕적, 종교적 진전으로 맨 처음 그 이해가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현 주소는 언제나 성화(聖化)입니다. 구원은 받고, 그리고 승리와 완성은 미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모두가 완만한 상승 곡선, 어떤 진전으로 목적지를 가기보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부침이 심한 굴곡진 인생을 삽니다. 진전보다 퇴보가 더 많고 비관적인 상태인 때가 더 많은 그런 삶을 사는데, 성경은 분명히 목적지는 변경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 하느님이 타협하시지 않는다 라고 못을 받고, 아까 28절에서 예를 든 바와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라고 못 박아 놓고 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추락해 있어도 그 추락한 자리에서 목적지를 이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이 잇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묻는 것이죠. 그러니 그 과정에 일어나는 그 성화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그 과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개혁주의(改革主義)란 크게는, 로마 천주교에 대하여 반대한 신학적 쇄신을 가르치고, 좁고 분명한 의미로 할 때는 칼빈주의 또는 장로교를 의미합니다. 이 성화에 대한 이해를 그래서 이 싱클레어 퍼거슨이 다섯 가지 교리 속에 개혁주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루터교의 성화관, 웨슬레이안의 성화관, 웨슬레이안이라는 것은 웨슬레이의 신앙 모범을 하나의 교리와 모범으로 따르는, 우리가 아는 이해로는 감리교의 교리입니다. 그 다음에 오순절 성령파의 이해, 그리고 신비주의의 이해가 있고, 개혁주의의 이해가 있습니다. 개혁주의의 이해를 설명하기 위하여 다른 교리들을 먼저 설명하면, 아주 간단히, 루터교는 성화가 구원을 더 깊이 이해가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구원에 다 들어있는데 그 깊이를 더 이해해 가는 것을 루터교의 성화 교리로 이해를 합니다. 웨슬레이안은 헌신, 최선을 다하여 하느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생애가 되는 것을 성화라고 이해를 합니다. 오순절 성령파는 확인, 성령께서 함께 하시어 분명하게 해주시는 신자의 존재와 삶에 대한 확인, 신비주의는 더 깊은, 더 깊은 내적 성찰과 명상을 통한 하느님을 만나는 신비하고 환상적인 영적 체험. 다 이해가 가시죠? 그런 부분이 다 있습니다. 뜻밖에 개혁주의 성화관은 차원이 다르고 이해하기 만만치 않은데 정작 개혁주의 내에서는 대부분 무지합니다. 개혁주의의 성화는 이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좀 만만치 않죠? 다른 네 개의 교리가 어떤 확인과 이해, 진전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는데 비해서 개혁주의는 그런 게 없습니다. 진전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 점 특별하게 이해해야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런 생각이 드실 겁니다.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은 새로운 삶, 새로운 차원이라고 성화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 가면 로마서에서 이 일을 어떻게 소개했는가 만날 수 있습니다. (로마6,4) 4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어떻게 됐느냐? 죄에 대하여 죽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에 우리도 죽어서 죄로 살던 존재, 신분, 지위를 죽고 소멸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죽은 것 같이 그의 부활에 우리가 연합되어 새로운 삶을 산다. 이건 새 삶이다. 예를 들어, 악역을 맡았던 드라마 끝내고 훌륭한 주인공이 된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입니다. 뭐가 진전됐느냐 뭐가? 성취되었느냐가 아니라 배역이 다르고 지위가 다르고 신분이 다른 새 드라마에 참여하게 됐다. 그런 뜻입니다. 성화란 혼자 살고 죽음이 다스리던 결국은 다 망하는 것으로 끝나던 드라마에서, 영광으로 가고 가치가 있고 신비롭고 명예로운 드라마로 이동했다. 그런 뜻입니다. (로마6,5-11) 5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6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 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7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8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9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 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0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새 삶을 산다는 건 더러웠던 인생을 깨끗한 인생으로 산다. 이런 도덕적, 어떤 종교적 차원에서 대비하지 말고, 존재와 지위에서 대비할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건 마치 매우 약한 비유일 수밖에 없죠. 누구 딸이었다가 누구 아내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굉장히 다른 신분이 되는 거죠. 출가외인입니다. 남편 잘 만나야 됩니다. 누구 아내가 되는 겁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아야 돼요.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한다.” 우리는 그의 아내입니다. 그의 신부입니다. 지위가 다르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잘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내내 도덕적, 종교적으로 밖에는 판단하지 못하니까 진전이 없고 결국은 다 지워내지 못하는 흠으로 인하여 늘 자책하느라고 새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필리4,13) 1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을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필리피 교회가 감옥에 갇힌 바오로를 위문을 오죠. “고맙다. 너희 사랑이 고맙다.” 그리고 이렇게 붙입니다. “11 내가 궁핍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13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뭐든지 해결할 수 있다고 그랬어요? 아니 무슨 꼴이든지 당할 수 있다. 하느님이 그 속에서 동일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안다. 풍부함 속에서 할 수 있는 것, 궁핍한 속에서도 할 수 있다는 거 알아서 그건 하느님 손에 맡긴다. 그건 작가 손에 있다. 내가 주인공이다. 나 뭐든지 할 수 있다. 이렇게 답합니다. 그러니까 역사와 인생은 그냥 공허한 공전이 아닙니다. 공허한 반복이 아닙니다. '토마스'라는 미국 문학 평론가가 있습니다. 미국을 만든 25인 그래서 25명의 작가들을 소개하고 그 작품을 소개하면서 미국이 어떻게 그들의 문학과 정신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만들어졌는지를 소개하는데 그 저자의 후기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문학과 독서의 효과는 발전적이지 않다. 그건 누적적이다.’ 그래요 누적될 뿐이래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된대요. 충만해지는 거래요. 우리가 어디로 가야 되는 것보다 우리한테 주어진 것이 어떻게 충만해지는가, 우리 생애 속에서 자신의 것으로 확인이 되는가를 누리라는 얘기로 제가 인용하고 싶습니다. (에페1,23) 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을 완성하시는 분의 계획이 그 안에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쓰리고 아픈(困苦)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보다 열등해서 고통을 받거나 행복이 없는 게 아니고 모두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에게 충만히 준 것을 각각의 삶 속에서 확인하고 채우고 누리는 싸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부르스라는 거 알죠? 흐느적거리는 댄스, 아시죠? 부르스를 이렇게 했습니다. '낡은 피아노가 멜로디를 신음하게 한다.' 표현이 좋죠. 낡은 피아노가 멜로디를 신음하게 한다. 이 음악은 어떤 특수한 인종의 체험으로부터 나온다. 어떤 인종이죠? 흑인들입니다. 차별사회가 그들에게 주는 삶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그 고통스러운 차별과 모멸 속에서 부르스라는 게 나오죠. 재즈라는 게 나오죠. 그건 흑인이 되어보지 않고는 결단코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얼마나 구체적인 성육신인지 다들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는 자리까지, 하늘에다 쓰지 않고 실제로 채찍에 맞고 못 박혀 죽으심으로 보이신 것이 하느님의 영광이요 성의요 의지라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 살아 확인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로 하고, 주문으로 하고, 그래서 생각 없이 살게 해달라고 합니다. 하느님이 뭐라고 그런다고요? 그렇게 못한다.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각각 어느 만큼 이해하고 믿음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예술이 되기도 하고 푸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분노가 되고 비명이 되는 것은 아직도 멀었다는 뜻입니다. 내가 얼마나 억울한가를 설명하러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기도를 하느님께 주저리 주저리 엮어내지 마십시오. 하느님이 친히 찾아오시고 친히 모욕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감상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그래서 합력(合力)하여 선(善)을 이룬다는 것은 무시무시한 약속입니다. 타협하지 않겠다. 기어코 다 유익이 되게 하겠다. 그런 뜻이죠. 유명했던 ‘대망’이라는 작품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저자가 이런 말을 써놨습니다.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떠나는 것과 같다.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안다면 굳이 불만일 필요가 있는가?' 불교식이죠. 인생은 사실 그렇습니다. 얼마나 적절한 표현이며 분별이겠습니까? 성경은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러니 웃으시오. 명예롭게 사십시오. 얼마나 다릅니까? 복음이 복음인 이유와 십자가가 능력인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 돌아가 다시 확인해봅시다. 로마서 5장, 이미 했던 얘깁니다. 이제 다시 확인합니다. (로마5,1-4) 1 이렇게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졌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현실입니다) 2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지금의 이 은총을 누리게 되었고 또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안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영광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취소되거나 변개되거나 방해받을 수 없습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4 인내를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사이를 하느님이 고난이라는 방법으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6 우리 죄 많은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때가 이르러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7 옳은 사람을 위해서 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혹 착한 사람을 위해서는 죽겠다고 나설 사람이 더러 있을지 모릅니다. 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완료된 과거입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입니다. 시간의 역순, 변개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의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영화롭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방해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묻는 것입니다. ‘잘 살아라.’ 이게 간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잘 살아라는 ‘책임 있게 살아라’. 책임 있게 산다는 건 그리스도교에서는 ‘명예를 알아라’가 되는 거죠. 하느님의 성실하신 손 안에 있다. 넉넉하게 살아라. 걱정 말고 울어라. 그러면 이제 나오죠 여기도. (로마5,9-11) 9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될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던 때에도 그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물며 그분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우리가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모를 때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주셨다면 이제 믿고 아는 차원에서라면 더 할 것 아니냐?) 11 게다가 우리를 하느님과 화해하게 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답이 되지 않으면, 다른 답은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들게 현실을 바꿔주는 답은 성경에는 없습니다. 하느님이 뜻하시고 하느님이 목적하시는 역사와 인생과 존재의 목적지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명예롭지 않고 그것이 감사하지 않다면 다른 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을 했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느님의 은혜고 하느님의 성실한 의지인가를 확인할 수 있고, 그것이 현실이라면 우리의 미래도 현실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위로와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감사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 은혜에 감사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매일마다 자책하고 한숨 쉬는 게 반복되지만, 그러나 헛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는 더 깊어지고, 더 분별과 통찰을 갖게 되며, 하느님의 은혜와 예수 안에서의 약속들을 신뢰하게 되고, 그 크기와 높이와 너비가 자라납니다. 우리가 크고 있습니다. 감사와 믿음의 자랑이, 그 기적이, 우리의 지나가는 햇수 속에 채워지고 있음을 누립니다. 그 힘 가지고 우리가 사는 시대를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복된 명예임을 알게, 이기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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