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주일 나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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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 작성일2024-01-14 | 조회수183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연중 제2주일 나해] 요한 1,35-42 "와서 보아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서 경청이 너무나 중요하며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청을 제대로 실행하기란 참으로 어렵지요.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 이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다른 이들이 어떤 사정을 갖고 있고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그저 마음에서 나오는 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일방적으로 쏟아내기 바쁩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기게 되지요. 그런 우리들에 비해 오늘 제1독서에서 사무엘이 보여주는 경청의 자세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그는 한밤중에 “사무엘아”하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귀기울여 듣습니다. 모두가 잠든 늦은 시간에 굳이 왜 부르는지 이유를 따지지도,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지 않고 이름을 부르기만 하는 상황에 짜증을 내지도 않고 그저 들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내용이 어떤 것이든 자기는 무조건 순명하고 따르겠다는 자세로 겸손하게 답합니다. “저를 부르셨지요? 저 여기 있습니다.” 그런 사무엘을 하느님이 어여삐 여기시는건 당연한 일입니다. 사무엘이 당신 말씀을 귀기울여 들은 만큼, 하느님도 그의 말을 귀기울여 들으십니다. 언제나 그와 함께 하시며 그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의미없이 땅에 떨어져 사라지지 않도록 당신 마음 안에 고이 간직해 주십니다.
제1독서인 사무엘기가 하느님과 사무엘 사이의 대화라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그분을 따라갔던 제자들 사이의 대화입니다. 마치 불교의 선문답처럼 이어지는 그 대화의 내용과 의미를 따라가다보면,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귀기울여 듣고 그에 올바르게 답하는 소통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는 과정이 보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인 안드레아와 필립보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 말을 들은 두 제자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가지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보통 이런 식으로 시작됩니다. 나보다 먼저 주님에 대해 알고 있던 누군가가 나에게 그분을 소개하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아직 주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일단 그분을 따라보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이 ‘친구따라 강남가는 것’처럼 수동적이고 가볍기만 한 게 아닙니다. 아직 주님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일단 주님을 믿고 그분 뜻을 받아들이며 따르겠노라고 자발적으로 그분께 순명하는 능동적이고 진중한 자세가 필요하지요. 주님의 뒤를 따르는 내 발걸음이 묵직하고 진지한만큼, 그분을 따르는 과정에서 어떤 고통과 시련을 겪더라도 흔들리지 않을테니까요.
그런 자세로 주님을 따르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무엇을 찾느냐?” 신자분들께 ‘왜 신앙생활을 하시느냐’고 물으면 우물쭈물 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남들이 말하는대로 ‘마음의 평화’나 ‘구원’을 받기 위해서라고 맹목적으로 답하시기도 하지요. 하지만 ‘무엇을 찾아야’할지를 제대로 모르면, 주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생활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신앙이 지닌 참된 의미와 그 궁극적인 목표를 모르기에, 캄캄한 어둠 속을 헤매는 것처럼 나아갈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당신 뒤를 따르기 시작하려는 두 제자에게 무엇을 찾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마음 속으로 갈망하며 추구하는게 무엇인지, 그들이 주님을 통해 찾고 구하며 얻고자 하는게 무엇인지를 물으신 겁니다. 그 물음을 듣고 두 제자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을 겁니다. 자신이 지금 온 마음으로 갈망하는게 무엇인지, 그것이 구원받기 위해 꼭 필요하고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인지,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월의 흐름 속에 허무하게 사라져 버릴 먼지 같은 것들을 쫓고 있지는 않은지 진지하게 성찰해 보았겠지요.
하지만 그 답은 그리 쉽게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두 제자는 예수님의 물음에 여러가지로 부족한 지금의 상태로 답하는 대신, 일단 그분 곁에 머무르며 그분과 함께 지내보기로 합니다. 지금은 주님을 통해 무엇을 찾아야 할지가 분명하게 보이지 않지만, 그분과 함께 지내며 많은 것들을 배우고 느끼고 체험하다보면 언젠가는 그 답을 찾게 되리라고 기대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디에 묵고 계시는지’를 물은 것이지요. 그 질문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들은 원래 자기들의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관하여 증언한 말을 믿었기에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아직 ‘머리’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다보면,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소통하며 그분과 깊은 친교를 맺게 되면 그들의 믿음은 비로소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팔과 다리를 거쳐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와서 보라’고 하십니다. 자기 삶에 자신이 없는 사람, 스스로의 믿음에 확신을 지니지 못한 사람,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 뒤가 구리고 감출 것이 많은 사람은 결코 입 밖에 낼 수 없는 진실의 언어, 믿음의 언어가 바로 “와서 보아라”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나 추측은 사실과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요. 직접 현장에 찾아가 자기 두 눈으로 확인해봐야 더 많은 사실을, 보다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올바른 판단과 식별을 할 수 있기에, 예수님은 두 제자를 당신 곁으로 부르십니다. 욕망과 집착, 오해와 갈등,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한 세상에서는 당신께서 주고자 하시는 참된 기쁨, 행복, 평화를 누릴 수 없기에, 세상으로부터 잠시 멀어져 당신 가까이에 마치 피정하듯 머무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나 주님 곁에 머무르는데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세상이 주는 편리함과 익숙해진 편안함을 버리고, 주님과 함께 하는 불편과 수고, 불이익과 희생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기꺼이 감수하고 주님 곁에 머무르면 비로소 그분의 참된 모습이, 그분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이,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구원과 하느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가 보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과 함께 묵었던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이 자기를 예수님께 인도했듯, 자기 형 시몬을 예수님께 인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시몬을 눈여겨 보시며 그에게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그냥 아무 이름이나 지어주신게 아닙니다. 시몬이 내면에 지니고 있는 부족함과 약함, 두려움과 우유부단함을 주의깊게 살펴보시고 그가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 즉 바위처럼 굳건하고 단단한 믿음을 지향하며 살아가도록 그에게 ‘반석’이라는 뜻을 지닌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붙여주신 겁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기가 받은 ‘이름 값’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그 이름이 뜻하는 바를 삶 속에서 실현해 나갈 겁니다. 이처럼 누군가를 통해 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과정에서 나의 믿음이 깊어지며, 다른 누군가를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어 줌으로써, 그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거쳐가야 할 신앙의 과정이자 구원의 과정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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