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26) 하느님의 자비(慈悲) (로마9,14-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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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1-15 | 조회수94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4. 1. 15. (월요일) 로마서26) 하느님의 자비(慈悲) (로마9,14-29) 14 그렇다고 하느님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15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자비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하고 싶은 사람에게 동정한다' 고 말씀하셨듯이 16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17 성서에는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내가 너를 왕으로 내세운 것은 너를 시켜서 내 힘을 드러내고 내 이름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하려는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8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도 하십니다. 19 '그렇다면 어찌하여 하느님께서 사람을 책망하십니까? 누가 능히 하느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20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감히 하느님께 따지고 드는 것입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만든 사람한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1 옹기장이가 같은 진흙덩이를 가지고 하나는 귀하게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어낼 권리가 없겠습니까? 22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진노와 권능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당장 부수어 버려야 할 진노의 그릇을 부수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참아 주셨습니다. 23 그것은 하느님께서 자비의 그릇에 베푸실 당신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비의 그릇은 후에 영광을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만드신 것인데 24 그 자비의 그릇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우리들 가운데는 유다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있습니다. 25 호세아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백성이 아니었던 사람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겠고 내 사랑을 받지 못하던 백성을 내 사랑하는 백성이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바로 그 곳에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자녀라고 불리리라.' 27 그리고 이사야는 이스라엘에 관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을지라도 남은 자만이 구원을 얻으리라. 28 주께서는 약속하신 말씀을 신속히 그리고 엄격히 이 세상에서 다 이루시리라.' 29 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전능하신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주시지 않았던들 우리는 소돔처럼 되었을 것이요 고모라와 같이 되었으리라.' 로마서 9장에서 11장은 이스라엘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그 자체로 이방인들이 보는 관심에서와 또는 유대인 스스로의 관심에서 다 외면할 수 없는 커다란 역사의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를 거절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되는가, 예수를 믿은 이방인들에겐 어떤 본보기가 되는가 하는 것을 넘어서 복음의 본질이 뭐냐 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담대히 이스라엘이 구원 받을 거다 라고 얘기하는 것은 복음의 본질이 그렇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9장에 들어오면서 계속 얘기해 오고 있는 선택에 관한 문제에서, 선택이라는 말이 배타적 구별이냐 하는 문제를 우리에게 성경적으로 이해하도록 돕기 위하여 인용되고 있습니다. 선택에 관한 커다란 오해는 누가 은혜를 받았다면 그렇지 않은 자는 못 받은 자로 차별이 된다는 것이죠. 누구는 호의를 받았고 누구는 호의를 받지 못했다. 누구는 선택을 받았고 누구는 버려졌다. 라고 우리는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얘기를 9장 서두에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을 들어서 이야기합니다. 한 번 정리하죠.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버지 집에서 구별됩니다. 아브라함이 그 가문 중에서 제일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은 것들과 차별이 없는 존재였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어도 됐고, 아브라함의 동생이어도 됐고, 그 친구였어도 됐고, 삼촌이었어도 되는, 그중에 하나, 그게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버지 집에서 부름을 받는 겁니다. 본토 친척 아버지가 없는 알에서 태어난, 하늘에서 떨어짐이 아닌, 하느님이 구별했을 때, 구별하지 않은 자와 동일한 조건과 자격, 가치, 라는 것이 아브라함이고, 이사악은 정실 부인이 낳고 이스마엘은 종이 난 차별이 아니라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을만한 젊음이 있었고 이사악은 사라가 애를 낳을 수 없을 때 낳은 자임으로서, 하느님이 함께하여 본인이 가진 자격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닌 씨를 품고 있는 자인 것입니다. 야곱에게 오면 에사우하고는 쌍둥입니다. 그 사주팔자까지 똑같은 거죠. 뒷발꿈치를 붙잡고 나왔으니 앞뒤가 없는 셈인데 차남은 장자와는 다릅니다. 지위와 권리에서 확연히 다릅니다. 그걸 차남을 택함으로써 태생적으로 갇힌 우월한 조건 따위는 여기에 들어있지 않다. 그게 선택입니다. 그럼 선택은 무얼 차별하느냐? 뭘 대비하느냐? 사울과 다윗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사울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자연인이 만들어내 낼 수 있는 극치를 보여주고 결국은 죽어 끝나는 존재와 운명을 보이는 것이 사울이고, 다윗은 거기에 하느님이 개입하면 영원한 승리가 약속되는 운명이 된다는 걸 보입니다. 다윗은 사울보다 난 자가 아니지만 그는 하느님의 은혜를 깨닫고 성전을 짓겠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나타나셔서 “니가 나를 위해 뭘 한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모든 건 나로부터 나가는 거야. 내가 주고 넌 받는 거야. 내가 네 집에게 복을 내려 네 나라와 네 권세를 내가 영원토록 하겠다.” 어느 장면에서 다윗이 신을 위하여 뭘 할 수 있겠다고 말하자마자 얻어맞고 무릎 꿇리고 배우는 자리가 다윗에게 허락한 약속입니다. 이 자리를 놓치면 우리는 선택이라는 말을 매우 잘못되게 사용할 수 밖에 없지요. 그게 이제 오늘 얘기에는 하느님의 선택이 은혜를 베풀기 위한 찾아오심이다. 라는 걸 하나 더 덧붙이지요. 하느님의 선택은 우열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호불호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를 하느님이 베풀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는 행위다, 그의 의지다, 이겁니다. 그 의지는 어찌나 강한지 인간이 거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걸 주시기 때문에 은총, 은혜라 하는 것입니다. 보상이 아니다. 대가가 아니다. 우리가 만들지 못하는 걸 준다. 로마서 내내 그 얘기를 했습니다. 3장 21절 이하에는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 로마서 5장 8절 이하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이루신 하느님의 구원, 보내신 예수, 완료하신 십자가, 그의 피로 인한 구원, 그래서 그의 살으심으로 인한 더 높고 넓은 은혜를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8장에서는 38절, 39절에,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적극적, 적극적 은혜인 것입니다. 다함이 없는 은혜, 베풀고 주시는 하느님의 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늘 오해돼서, 왜 모세에게는 이 일을 맡기고 파라오는 뭡니까? 하는 식으로 나오죠. (마태20,12-15) 12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13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14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15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무슨 얘긴지 아시죠?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삽니다. 아침 7시에 품꾼들을 샀는데 9시에 나가니까 놀고 있는 자에서도 또 보내고, 12시에 나가서 또 보내고, 3시에 또 보내고, 오후 5시에 또 보냅니다. 그리고 저녁 6시에 이제 품삯을 주는데 오후 5시에 와서 1시간 일한 자에게 한 데나리온을 줍니다. 당연히 먼저 온 자들이 더 기대를 했겠죠. 똑같이 줍니다. 원망하여 이르기를 "하루 종일 일했는데 1시간 밖에 일한 사람과 똑같이 줍니까?" “ 내가 너에게 불공평한 게 뭐냐? 내가 네게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주는데 나를 악하다고 하느냐? 내가 적게 일한 자에게 더 주는 것이 나의 은혜이고 나의 의로움이지, 명예지, 어찌 그게 불공정한 것이겠느냐? 니 것이나 가지고 가라.”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괄세하는 것 아닙니다. 하느님의 크심을 모르죠. 이 비유는 20장 1절에 이렇게 소개됩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습니다. 복된 일을 시키는 이죠. 인간을 가치있게 쓰시죠. 그리고 게다가 은혜를 베푸는 이입니다. 천국(天國), 하느님 나라는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니까 끝없이 잘잘못에 관한 것으로 신앙을 점검합니다. 유능함과 무능함으로 비교하고, 윤리로 밖에는 확인할 다른 방법이 없어서,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난하기 짝이 없게 합니다. 죄를 안 지은 자, 예수를 믿은 자, 그때 예수를 믿었다는 건 안 믿은 자와 차별하는 것입니다. 쫓아다니면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넌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갈 거야.” 입에 이 말을 붙이고 다니죠.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위대한 사람인지를 보이세요. 그들에게 가서 “넌 예수 안 믿어서 이런저런 벌을 받을 거야.” 그러지 말고 예수를 믿으면 뭐가 다른지를 보이세요. (루가15,20-32) 20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 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 가 아들의 목을 끌어 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2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 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25 밭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 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26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27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 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 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 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29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30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 버린 동생이 돌아 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주시다니요'' 하고 투덜거렸다. 31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32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처음에 받는 은혜는 탕자의 회개지요. 두 번째 받는 은혜는 맏아들의 못난 것으로 배우는 신자된 가난함에 관한 것이죠. 오늘 세 번째는 이런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였으면 좋겠다죠. 이 아버지, 둘째가 자기 재산 다 달라 그랬을 때 줘서 들려 보낼 수 있는 아버지,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아버지. 쉽게 생각하면 안 돼요. 따뜻하게 맞아주시는 아버지. 못난 맏아들의 이 말, "나는 열심히 섬겼으나 아무것도 주지 않다가, 이러깁니까?" 예 넌 왜 그러냐? 라고 얘기하지 않는 아버지, “내 것이 다 니 것 아니냐?” 이런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였으면 좋겠다. 그렇지요. 우리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우린 째째하게 굴어 나갔다 돌아온 얘기 밖에 없고, 집 지켜 하느님의 아들로 산 그 영광은 모르고 늘 불평이지요. 하느님 안 믿는 자들이 더 잘 살고 편합니다. 시편 37편과 73편입니다. 생각하십시오. 성경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가? 우리는 이스라엘의 운명에 관한 바오로의 이해 속에서 복음의 본질을 이해하게 됩니다. 복음을 주신 하느님이 누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 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그 얘기의 중요한 내용이죠. 모세와 파라오. 모세에게 하느님이 자비를 베푸셨다면 왜 파라오는 완악하게 하셨습니까? 그건 하느님 마음대로 랍니다. 그러니 우리의 대비는 모세는 좋은 역을 맡기고 파라오는 악역을 맡겼다. 그러면 파라오에게 무슨 책임이 있느냐? 이 얘기를 하고 싶죠. 바로 그 얘기를 오늘 본문이 합니다. 벤허를 기억하죠? 주인공은 찰턴 해스턴입니다. 벤허는 열두 개의 아카데미상을 받습니다.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해, 여우주연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그 유명한 벤허에서 벤허 역을 맡은 사람이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했다는 건 커다란 수치입니다. 남우조연상은 받았죠. 멧살라, 벤허의 내용은 주인공 역보다 조역에게 더 많이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 끝나고 멧살라를 죽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들 마음에 의심이 생기죠. 악역을 하고 악당 일을 해도 안 죽인단 말인가? 그렇게 간단히 가지 말고, 파라오 같이, 하느님도 모르고, 하느님의 일에 대적하고,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졌으나 하느님 일을 훼방하는 것 밖에는 할 줄 모르는, 왜냐하면 무지하니까. 그를 들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셨다. 이렇게 해석을 하지요. 거기서 파라오가 지옥 갔냐 천국 갔냐 얘기가 거기 들어있는 게 아니라, 그래서 10가지 재앙은 파라오와 애굽을 죽이기 위하여 있지 않고 하느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기 위해서 등장해서 파라오는 회개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회개를 하느님이 안 받아주셨죠.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다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파라오에게 뭐라 그러겠습니까? 모세가 한 일은 뭐 밖에 없다구요? 거기도 찰턴 해스톤이 나왔죠. 쩔쩔매는 거죠. 대사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습니다. 율 브린너가 다 했고 찰턴 해스턴은 한 게 없습니다. 하느님이 거기서 하느님의 영광을 그려낸 것에 대하여 놀라고 경외심을 가지시오. 나쁜 놈들 다 죽이면 영화가 안 된다니까요. 내용을 담을 수 없고 하느님의 영광과 일하심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나올 수 없는데, 다 착한 놈 갖고 하면, 착한 님 갖고 하면 어떠냐? 그래도 좋죠. 그럼 시청률이 떨어진다니까요. 택스트를 깊이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택하신 방법입니다. 왜 내가 이 조건, 이 환경 속에 요 모양 요 꼴로, 그게 하느님이 정하신 구체적인 캐릭터입니다. 운명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마음껏 일하십니다.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저는 늘 모래시계를 최고의 작품으로 치는데, 박근형 씨 딸이 대들죠. “아버지가 그랬어.” 아버지가 박태수 잡아가고 아버지가 다 한거야. “얘야, 남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거든 목소리를 낮춰라.” 기억나세요? 요한묵시록 23장 보셨어요? 왜 하느님이 일하시는 깊이와 낮은 목소리를 듣지 못하시죠? 그 무서운 목소리를. 결단코 타협하시지 않고 결단코 포기하시지 않는 하느님. 자신의 현실 전체에서 성경 전체가 묻어나고 녹아나는데 하느님이 가만히 계신다고? ‘편하자’는 거죠. 오직 하나의 소원, 편하자는 거죠. 육체적으로 편하고 심적으로 편하고 영원히 편하고 아무 생각도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는 것 외에 소원이 없죠. 그걸 고쳐야 되니 하느님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내보내실 수 있다니까. 하느님의 무서움. 호세아서의 핵심 메시지죠. 무서운 하느님. 바보인 채로 그렇게 쉽게 끝내지 않겠다. 네가 비명을 지른다고 해서 내가 타협하지 않겠다. 내가 네게 목적한 것을 이루기까지 나는 결코 쉬지 않겠다. 성경 전체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마지막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그 이름이 절대적인 조건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바로 선택된 자들이다. 선택된 자들이라는 건, 하느님이 개입한 자들. 누구는 개입하지 않고 누구는 개입했고의 차별이 아니라, 하느님이 개입하는 자들에게는 그 운명이 하느님의 손에 붙들려 있어 결단코 실패치 않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구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주어진 하느님의 성의와 의지는 포기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중에도 결국 남은 자만 구원받는다. 그것은 다수가 아니고 적은 자라는 개념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하느님의 성의와 하느님의 약속에 관한 것이었다. 저들이 전체로 배신한 것으로 보이냐? 그 속에 하느님이 남기는 자들이 있다. 그건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되지 않았느냐? 우리가 언제 예수를 믿을 우리 역사적 유산이 있느냐? 이방이란 역사적 유산이, 하느님에 대한 지식이, 아무것도 없는 자들인데 구원을 얻지 않았느냐? 하느님이 하시고자 하면 심판해야 되는 자들은 얼마든지 기다려 하느님의 오래 참으심을 드러내실 수 있는, 하느님이 영광을 줄 자들을 가장 나쁜 조건에서 뒤집어 그 영광의 크기를 나타낼 수 있지 않냐? 그 하느님을 기억하라. 그게 남은 자란다. 그렇게 얘기하는 거야. 남은 자는 144,000, 이마에 다윗의 별이 있는 자. 이런 식으로 나누기 시작하자, 그러자, 바보들이 됐죠. 지금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 붙잡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와 누림은 전혀 없고, 그 구별을 왜 하러 다니죠? 그것 외에는 자신을 확인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무엇인지,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이 무엇인지,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는 말이 무엇인지 다 모르게 된 것이죠. 쇼생크 탈출을 얘기했었죠. 쇼생크 리뎀션. 쇼생크는 시삭, 파라오였죠. 무슨 구원을 받는다구요? 오직 공포와 절망밖에 없는 감옥이 앤디로 인하여, 그가 여기 살다가 탈옥을 했기 때문에, 남은 동료들이 앤디 얘기를 하면서 감옥에서 만들 수 없는 내용을 나눕니다. “앤디가 그랬어. 맥주 한병씩 주세요. 그랬지. 음악을 틀었어. 탈옥을 할 줄 누가 알았어?” 웃음과 희망을 내용으로 삼을 수 있게 되므로 더 이상 감옥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과 붙드심이 생기자, 우리라는 감옥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감옥에서부터 낙원으로 변하는게 아니라, 이 감옥이 만들지 못하는 걸 갖게 됐죠. 믿음, 사랑, 웃음, 희생, 섬김 들이 나오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보상을 위한 조건이 아니고, 윤리적 확인이 아니라, 이 세상이 만들지 못하는 걸 가진 자들의 현실적 하느님의 백성 된 증거들인 것입니다. 억지로 하려는 거 아닙니다.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아는데요. 스스로가 알지요. 히브리서 12장은 우리의 자리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히브12,18-20) 18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갔던 그 시나이산은 아닙니다. 그 산은 손으로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검은 구름과 암흑에 싸인 채 폭풍이 일고 19 나팔소리가 울리고 굉장한 음성이 들려 오는 산이었습니다. 그때 그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하느님께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시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까? 20 '비록 짐승이라도 이 산에 닿기만 하면 돌에 맞아 죽을 것이다 라고 하신 하느님의 명령이 견딜 수 없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시나이산 이야기입니다. 출애굽하고, 모세와 함께 시나이산에 이르러 하느님이 율법을 주시는 때입니다. 하느님이 시나이산에 강림하시어 두려움으로 임하셨죠. 빽빽한 구름에 가리고 흑암이 임하고 번개와 천둥 소리에 벌벌 떱니다. “이 산에 가까이 하지 마라. 누구든지 가까이 하면 죽는다.” 어찌나 두려웠든지, 21절,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그 광경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모세까지도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떨린다' 고 말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세에게 부탁을 하여 모세를 보내어 하느님께 듣고, 와서 전해달라고 그럽니다. 하느님이 직접 말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귀가 터질 것 같고 심장이 찢어질 것 같다고. 무섭다고. 율법 앞에 선 모습이죠.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이렇게 나옵니다. (히브12,22-24) 22 그러나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천사들이 있고, 잔치가 벌어져 있고 23 또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교회가 있고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느님이 계시고 완전히 올바른 사람들의 영혼이 있습니다. 24 그리고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가 게시고 아벨의 피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속죄의 피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 서 있는가? 은총의 자리에 서 있다. 두려움의 자리에 서 있지 않다. 예수 안에 있다. 그의 피로 화해한 자리에 서 있다. 겁내지 마라. 우리 아버지가 이런 아버지이면 좋겠다. 예, 그 아버집니다. 아버지가 우리에 대한 자기의 약속과 성의를 어떻게 증명했다고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하는 뿌린 속죄의 피다.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선택, 하느님의 은혜, 하느님의 일하심, 그의 경의로운 경륜을, 인도를, 우리 스스로의 생애에 붙들어 매시오. 자랑할 것이 우리 스스로에게 있을 것입니다. 눈물과 한숨 속에 기쁨과 영광을 채우실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허락한 하느님의 막을 수 없는, 방해할 수 없는, 타협하시지 않고 포기하시지 않는, 지극한 성의, 사랑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느님의 은혜와 하느님의 일하심에 우리는 놀랍니다. 기다리시는 하느님, 복 주시는 하느님, 우리의 못난 것과 무지와 실패와 거절을 뒤집어 하느님의 영광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 우리의 삶의 막막함과 무지함이 손해가 아니게 하시는 하느님, 울 수 있게 하시고 돌아오게 하시고 우리가 하지 않은 것으로 갚으시는 하느님,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는 존재가 되게 하신 하느님, 하느님을 만나게 하셨으니, 이 위대한 믿음 가지고 살게 하소서. 승리하고 자랑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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