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27)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로마9,30-1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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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1-16 | 조회수82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24. 1. 16. (화요일) 로마서27)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로마9,30-10,4) 30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지 않던 이방인이 오히려 그 올바른 관계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31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법을 추구하였지만 끝내 그 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32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얻으려 하지 않고 공로를 쌓음으로써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그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33 성서에, '자 이제 내가 걸림돌 하나를 시온에 놓으리니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바윗돌이라.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1 형제 여러분, 나는 내 동족이 구원받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며 하느님께 간구합니다. 2 나는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열성만은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바른 지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닙니다. 3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길을 깨닫지 못하고 제나름의 방법을 세우려고 하면서 하느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4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율법은 끝이 났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논(論)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를 거절했고 그 구원을 거부했는데 당연히 이스라엘은 구원에서 제외 됐어야 맞지 않느냐? 또 그렇다면 여태껏 구약 내내 하셨던 하느님의 그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일하신 것이 다 소용없는 짓이었단 말인가? 이제 여기에 이르죠. 이스라엘이 그렇게 된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 자체로는 뭐 아무래도 좋은데, 그러면 구원을 받았다가, 선택을 받았다가 취소가 될 수 있단 말이냐? 우리가 잘못하면 그만이란 말이냐? 여기까지 오기 때문에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율법이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한계가 드러나서 그것을 준 민족을 구원할 수 없었다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주신 예수도 아차 잘못하면 무용지물이 될 수 있지 않느냐? 이렇게 연결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이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었고, 바오로는 당연히 이스라엘은 구원 얻는다. 저들의 거부가 그들을 통하여 증거 될 복음을 가로막지 못했던 것처럼 그들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된 구원이 이방(異邦)에 넘친 것 같이 저들의 배반과 거부가 저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율법 없는 이방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하느님의 은혜가 저들도 마침내 구원하실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9장과 10장과 11장에 걸친 사도 바오로의 복음의 크기에 대한 그의 믿음이요, 하느님의 일하심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러 가지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죠. 율법이 이스라엘로 예수를 믿는 일을 성공시키지 못했다면, 오히려 방해가 됐다면, 율법은 왜 준 것인가? 율법으로가 아니고 예수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얻은 성도들에게 율법의 가치는 무엇인가? 그 소용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 다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을 얘기할라치면, ‘율법이 아닌’이라고 얘기를 하고, 그러나 율법을, 그래서 폐기 처분한다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율법은 지켜야 되지만 그것이 은혜의 수단은 아니라고 하는 그 균형을 우리는 매우 조화시키기가 어렵죠. 본문에 있는 10장 4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율법은 끝이 났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목표를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다가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목표를 완성했다. 그게 뭐냐? 그 율법은 원래 의도와 의미가 뭐냐? 예수가 완성했다는 말로 이제 우리는 하나의 단서를 찾아 율법의 용도를, 목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출애굽기 19장으로 갑니다. (출애19,1-6) 1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 땅에서 나온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나이 광야에 이르렀다. 2 그들은 르비딤을 떠나 시나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진을 쳤다. 이스라엘이 그 곳 산 앞에 진을 친 다음 3 모세는 하느님 계신 곳으로 올라 갔다. 야훼께서 산에서 그를 부르셨다. '너는 야곱 일족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어라. 4 '너희는 내가 에집트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너희를 어떻게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로 데려 왔는지 보지 않았느냐? 5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 온 세계가 나의 것이 아니냐? 6 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 줄 말이다.' 그리고 이제 율법을 받아 내려옵니다. 그러니 순서가 이렇게 돼있죠. 율법을 주고 지키면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된다가 아니고, 구원이 먼저 오죠. ‘내가 애굽에게 행한 행위와 너희를 불러내어 이 자리에까지 온 것을 기억하라. 너희가 내 말을 듣고 지키면’ 이렇게 조건으로 갖다 붙이지 마시오. 이렇게 불러낸 것은 너희를 다만 노예 되었던 애굽 땅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끝이 아니라 너희를 그 노예의 자리에, 세상 더러움에 짓눌려 있던 자리에서 꺼내 거룩한 존재, 거룩한 임무를 주려 함이다. 뒷부분에 나오는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명예인 것입니다. 영광인 것이죠. 허클베리핀의 소원은 학교 가는 것, 학교 안 문으로 들어갔다. 뒷문으로 나오는 걸 학교 가는 것이라고 그러는 사람은 없습니다.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를 학교에 보내려면 누군가와 보호자가 있고 그가 가서 공부하고 돌아오면 밥 먹여주고 잠자리를 줄 그런, 그런 보호자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새 옷 입히고 잠자리 주면 되는 게 아니라 공부를 시켜야 되듯이 하느님은 우리를 죄와 더러움에서 꺼내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모든 지은 죄를 지워버리고 표백하고 뺑끼칠을 해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그림을 그리시겠다고 합니다. 이 부분이 만만치 않죠. 십계명을 보십시오. 율법의 의도가 무엇인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마라. 나를 피조물의 형상으로 만들지 마라.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하느님이 어떻다는 거야? 하느님은 충분하시다는 거예요. 우린 더 이상의 단어가 없어서 그래요. 하느님 홀로 주인이시다. 권력이 집중돼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영광과 생명과 진리와 의(義)와 가치와 승리와 모든 만족이 그분께 있습니다. 그분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이 여러 개 중에 하나를 담당하는 한 과목의 책임자가 아니고, 우리라는 인간과 이 세상을 모두 다스리시기에 충분하시다. 그게 계명의 앞부분이죠. 두 번째 계명은 거짓말 하지 마라. 도둑질 하지 마라. 살인 하지 마라. 내 이웃의 것 탐내지 마라. 무슨 뜻이라 그랬어요? 네 필요를 이웃에서 뺏어와야 되도록 놔두시는 하느님이 아니다. 너와 네 이웃에 쓸 것은 내가 채운다. 넉넉하게 살아라. 예수님이 하나로 모으셨죠. 어느 개명이 제일 큽니까?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개명이며,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는 이 말씀에 모든, 모든 율법이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다고요. 그게 계명입니다. 율법은 지켜서 구원 얻는 조건도 아니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존속시키는 방법도 아니고,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가치를 확인하는 방법도 아닙니다. 그것은 놀라운 부름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율법을 논할 때마다 그것이 나의 노력의 성과였고 지금도 그것을 내가 유지시키고 있고 그리고 하느님이 나를 부르신 이유는, “봐라! 벌써 하느님은 이걸 알고 계셨던 거야. 난 쓸모 있는 존재야. 난 너와 달라.”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하느님을 믿게 만들며 하느님과 화목하게 하며 하느님을 사랑케 하기 위하여 제시된, 하느님이 누구신가, 우리를 무엇을 위하여 불렀는가에 대한 요약입니다. 아주 세밀한, 자상한 설명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끝까지 자기네들의 조건으로 만드는데 썼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생겼는가요? 하느님이 오시자 거절해 버렸죠. 거기가 바로 율법이 의도한 것과 인간이 가진 죄가 그 율법을 어떻게 오용하고 악용했고 왜곡했는지가 드러나는 중요한 장면인 것입니다. 현실로 돌아올까요? 신약시대는 예수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금방 차별화하죠. 저들은 율법이 있었고 우리는 믿음이 있다. 저들은 율법을 고집하는 바람에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 그렇게 간단할까요? 율법이 늘 자기 의(義)를 강조하느라고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목표, 하느님의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그 영광으로의 부름을 우리가 놓쳤던 것 같이, 신약시대에는 끊임없이 믿음이라는 말이 이 율법을 대신합니다. 로마서의 지금 설명은 시간이라는 중요한 하나의 시각을 가지고 구원이 역순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 부르기 전에 필요를 알기 전에, 하느님이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그랬습니다. 율법이 아니고 믿음이라고 얘기했는데, 우리가 예수의 필요성을 알기 전에, 구하기 전에, 준비하기 전에, 알지 못한 때 이루어진 구원을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입니다. 그때 죽었죠. 2,000년 전에, 우리 태어나기 전에, 알고 말고를 떠나서 생겨나기 전에, 뭐가 일어났다고요? 구원이 완료됐다고요. 구원이 완료됐다는 게 무슨 뜻이라 그랬어요?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서 번복시킬 수도, 취소시킬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후에 태어납니다. 여전히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죠. 새삼스럽게 필요를 알죠. 각각에게 적용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결단하고 이해하고 방황하고 의심하고 거부하고 이 모든 과정을 겪어 항복하는, 내가 내 마음으로 항복하는, 그런 과정을 주시지요. 시작이 나한테 있지 않았다는 것, 확인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단어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를 때 우리를 구원한 하느님의 방식이기 때문에 믿음으로라고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의 법칙이 아닌, 우리는 태어나지도 않았는걸요. 믿음은 하느님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는 신적 방법이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은혜, 은총이라고 합니다. 은혜라 그러면 알죠. 그렇게 얻어진 구원, 그걸 우린 어떻게 써먹는가 보십시오. “넌 믿음이 없어.”부터 시작해서 “믿지 않으면 안 돼.” 전부 우리의 조건과 자격으로 돌아와 무기가 되죠. 안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이 율법을 가지고 예수를 거절했던 것처럼 신약성경, 신약시대의 교회들은 믿음이라는 걸 쳐들어서 예수를 거부합니다. 예수를 거부한다는 게 뭐죠? 예수는 모두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는 모든 것을 자기가 행한 대로 갚지 않고 계십니다. 그걸 해야 됩니다. 아무래도 좋다고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비기너들이 교회에 올 수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오해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윤리적으로 못 났을 수 있습니다. 성격의 결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열심을 부려 교회에 손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단죄를 해버리고 죽여 버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아무래도 좋다는 건 당연히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자기가 얻은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은 거기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상대를 위하여 쓰라는 말 아닙니다. 스스로에게 적용하십시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문제에서 늘 와서 걸리는 것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의 회개의 시입니다. (시편51,16-19) 16 주님께서는 제물을 즐기지 아니하시며, 번제를 드려도 받지 아니하십니다. 17 하느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뿐,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당신께서 얕보지 아니하시니, 18 어지신 마음으로 시온을 돌보시어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게 하소서. 19 그 때에는 번제와 제물을 올바른 제사로 기뻐 받으시리니, 송아지를 잡아 당신 제단에 바치리이다. 51편은 늘 오해되는 시죠. '회개의 시'라고 돼 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울고 울고 울고 겸허한 자세에 내려가 무릎 꿇어 용서를 구해서 용서받는 내용 아닙니다. 51편은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하느님 저는 죄 밖에 지을 줄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돌려놓지 않으면 고쳐놓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헌신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시온에 선을 행하소서.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백성에게 선을 행하소서. 예루살렘 성을 하느님이 쌓아주소서. 우리가 쌓는 것은 다 거짓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얼마나 많이 회개가 모든 것을 낱낱이, 진심을 가지고 눈물 바가지를 흘려서, 스스로를 만족시키고 회개했다 그러느냐는 거죠. 뭔지 모르는 거야. 이런 식의 자기 확인을, 꼭 그 확인을, 그래서 그러지 않는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밖에 없다고요.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안 돼요. 정의를 위하여, 평화를 위하여 하면 안 돼요. 예수만이 만들 수 있는 거예요. 그게 교회가 정치와 다른 것입니다. 정치는 증상과 현상을 고치는 일에 힘을 쓰지만, 우리는 근본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게 다 나을 때까지 기침도 콧물이 계속 되겠죠. 감기가, 코를 세멘트로 봉하고 입을 국방색 실로 꾸며놓으면 감기를 고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교회 안에는 이런 현상과 증상을 고쳐 번듯하게 하자는 말이 나오곤 합니다.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 중심 되는 신앙의 핵심이 그걸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려주고 이어지고 알아가는 일이 이것보다 커야 되는 것입니다. 현상을 고치려고 하다가 중심으로 들어오는 일들이 교회에 늘 반복적으로 일어나야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밖에서 교회를, “저기는 다르다. 저기는 보복이 없다. 저기는 단죄가 없다. 저기만 용서가 있고 기다려주더라.”를 보고 하느님을 만나러 오게 됩니다. 그러니 어떤 일도 예수와 무관한 개념은 없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를 십자가에 건 죄목이 '모독죄'입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신이라고 했다’라는 것이죠. 자기네가 믿는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종교심이, 그들의 열심이, 그들의 의로움과 그들의 법이 예수 앞에서 정체가 드러나고 만 겁니다. 그 말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들이 갖는 믿음과 소원과 신앙이 예수라는 이름과 결부되어 있는지, 분리되어서 작용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의로움과 진리와 평화는 예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은 어느 종교에서나 합니다. 감동, 기적, 어디에나 있습니다. 예수가 없습니다. 예수가 없다는 건 무슨 의미죠? 예수만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잇는, 하느님이 그의 백성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이고 문이고 내용입니다. 그가 없이 다만 덕목이라는 이름으로 유용하다는 이름으로 드러나는 어떤 것도 그리스도교 신앙적으로는 죄인 것입니다. 죄(罪)란 하느님 없음이죠. 그러니 자 이 문제를 여기 가면 분명해집니다. 갈라디아서 5장으로 가시죠. (갈라5,22-23) 22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23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 “이걸 맺자.” 그러는 것이 얼마나 틀린 것인가를 알아야 돼요. 성령의 열매를 맺자가 아니고 성령의 열매라니까. 내가 얼마나 신앙이 좋은지 이런 열매가 보상됐다가 아니라, 성령만이 맺는 열매가 나에게 열리는 거예요. 요한복음 15장 기억하시죠.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임하면 열매가 열리는 겁니다. 그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포도나무의 열매입니다. 가지가 줄기와 분리되거나 구별되거나 경쟁하거나 가지가 열매를 가져 줄기에 대하여 자신의 가치를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그 나무의 열매가 가지에 달리듯이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린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신앙의 열매를 맺습니다. 여기가 무서운데 입니다. “기도했더니” 그 중요한 간증입니다. ‘하느님이 들어주셨다’는 거죠. 그러나 내가 해서라는 거죠. 어디에 강조점이 있는가 보십시오. 감사가 있는가, 자랑이 있는가, 자랑은 어디로 간다? 꼭 단죄로 갑니다. “넌 안해서 그래.” 난 해서 받았고, 쟤는 안해도 받고 있습니다. 불만이십니까? 포도원 비유, 아침 7시에 들어온 자와 오후 5시에 들어온 자에게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을 줬더니 아침에 온 놈이 화냈다.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입니다. 그래서 이걸 오늘 우리 본문에서 뭐라고 얘기를 하느냐 하면 잘 보십시오. (로마9,32-33) 32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믿음을 통해서 얻으려 하지 않고 공로를 쌓음으로써 얻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그 걸림돌에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33 성서에, '자 이제 내가 걸림돌 하나를 시온에 놓으리니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바윗돌이라.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누구에게 걸림돌이 됐습니까? 자기 증명을 하려는 자들에게는 예수가 걸림돌이 됩니다. 아침에 온 자와 오후에 온 자가 똑같다는게 넘어가지지 않습니다. 내 인생을 바꾼 한마디였나? 무슨 그런 책에 또 인용을 해서 "은혜보다 교회 안에서 더 분노를 사는 것은 없다." 그렇지요. 열심히 한 나하고 여태껏 논 놈하고 똑같이 주는 거를 견딜 수가 없죠. 그럴 수는 없죠. 탕자비유이기도 합니다. 전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이놈 아들한테는 소를 잡고, 나는 집도 안 나가고 매일 일했는데 해준 게 뭐 있어요? 라고 얘기를 한다는 거야. 자신의 지위가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모른다니까. 율법은 뭐냐? 하느님이 우리를 어떤 지위와 명예로 불렀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데려가지 못했죠. 어느학교 교칙에, 크리스천 스쿨입니다. "웨이트리스와 싸우면 퇴학이다." 멋지죠? "같은 학교 학생이 데이트 신청을 하는 걸 거절하면 퇴학이다." 퇴학까지는 제가 과장했는데, 그게 무슨 말일까요? 이 학교를 다니면 데이트 상대로서 손색이 없다. 넌 그걸 거절하면 학교를 무시하는 거다. 그런 뜻입니다. 잘난 척은 그렇게 하는 겁니다. 명예롭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든 믿음이든 우리는 사람을 잡는데 쓰죠. 살리는데 써보십시오. 스스로의 인생을 밖에서 보상을 받아 명예를 유지하려고 하지 말고, 누구를 잡아 명예를 유지하지 말고, 살려서 삼켜서 멋진 일을 해서 스스로의 명예를 확인하지 않으면 율법도 예수도 걸림돌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예수 믿는다는게 다만 힘들고 억울할 뿐이죠. 돌아보십시오. 하느님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자신의 영광을 증언하십니다. 우리 지난번엔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았다. 내게 있는 건 다 네 거 아니냐?" 이렇게 제가 했어요. "우리 아버지가 이런 아버지였으면 좋겠다." 그렇죠. 그 아버지가 뭘 하셨다고요? 당신의 영광을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밖는 방식으로 영광을 증언하시는 분이랍니다. 더 이상 무슨 명예와 욕심이 필요하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믿음이 무엇인지 아는 인생이요 자랑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게 얼마나 큰 것인지, 굉장한 것인지 우리의 인생 하나로 쩔쩔매는, 그럴 일이 아니라는 걸 배웁니다. 고난의 길을 걸을 수 있고 억울한 길을 걸을 수 있으나 그 어느 자리에도 하느님의 자녀이며 영원한 영광과 승리가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우리의 고난이 우리로 섬기는 길을 가게하고 누구를 품는 길을 가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멋진 인생을 사는 우리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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