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28)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로마10,5-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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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1-17 | 조회수9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4. 1. 17. (수요일) 로마서28)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 (로마10,5-13) 5 모세는 사람이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것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는다' 고 기록하였습니다. 6 그러나 믿음을 통해서 얻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누가 저 높은 하늘까지 올라갈까 하고 속으로 걱정하지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 위해서 하늘까지 올라 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7 또 하느님께서 '누가 저 깊은 땅 속까지 내려 갈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음의 세계에서 모셔 올리기 위하여 땅 속까지 내려 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8 하느님께서 '말씀은 네 바로 곁에 있고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고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9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11 성서에도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12 유다인이나 이방인이나 아무런 구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만민의 주님이 되시고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찾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리십니다. 1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는 가장 감사하고 은혜로운 약속이 있죠. 11절에 보듯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또 13절에 보듯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누구든지’입니다. 이런 말씀이 왜 로마서 10장에 등장하는가? 이것이 우리가 전교지(傳敎紙)를 나눠주듯이, 복음을 증언하듯이, 지금 하는 얘기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 또 그 하느님이 예수로 말미암아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중에 우리가 자주 전도용으로 쓰는 복된 이 말씀이 들어있죠. 그러니 그 깊은 내용을 오늘 풀어나가야 됩니다. 예수는 우리 앞에서 본 바대로 하면 ~ (로마9,33) 33 성서에, '자 이제 내가 걸림돌 하나를 시온에 놓으리니 사람들이 걸려 넘어질 바윗돌이라.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앞뒤가 모순이 돼 있죠. 걸림돌, 부딪히는 바위인데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려면 앞에 걸림돌에, 부딪히는 바위가 아니라 보다 긍정적인 적극적인 표현이 있고 ‘그를 믿는 자는’ 이렇게 나왔어야 맞는데, 왜 걸림돌, 부딪히는 바위가 되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얘기가 연결될까요? 그게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본문 설명에 중요한 내용인 것입니다. 10장 4절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율법은 끝이 났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5절 이하의 모세의 말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로마10,5-7) 5 모세는 사람이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것을 지킴으로써 생명을 얻는다' 고 기록하였습니다. 6 그러나 믿음을 통해서 얻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누가 저 높은 하늘까지 올라 갈까 하고 속으로 걱정하지 말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기 위해서 하늘까지 올라 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7 또 하느님께서 '누가 저 깊은 땅 속까지 내려 갈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죽음의 세계에서 모셔 올리기 위하여 땅 속까지 내려 갈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식 표현은 아니니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하늘에 올라가 모셔 내려올 필요 없고, 그를 부활시키기 위하여 무저갱(坑) 지옥에 내려가서 그를 끌어올릴 필요 없다. 그런 뜻입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 우리가 구하지 않았을 때 예수가 오셨고, 우리가 무능했으나 예수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다. 우리가 예수를 모셔 내려오거나 붙잡아 올라와야 되는 것이 그리스도교 아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 가까이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우리가 전하는 믿음의 말씀이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요거 그대로 신명기 30장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찾아가 보죠. (신명30,11-14) 11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이 법은 너희로서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거나 미치지 못할 일은 아니다. 12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 가서 그 법을 내려다 주지 않으려나? 그러면 우리가 듣고 그대로 할 터인데' 하고 말하지도 말라. 13 바다 건너 저쪽에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이 바다를 건너 가서 그 법을 가져다 주지 않으려나? 그러면 우리가 듣고 그대로 할 터인데' 하고 말하지도 말라. 14 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율법, 그리고 하느님을 순종하는 일은 먼 것 아니다. 깨우침으로 가지거나 수행을 통하여 얻는 것 아니고, 너에게 이미 주어졌다. 네 옆에 있다. 네 앞에 있다. 행하라. 그렇게 됩니다. 율법에서부터 큰 오해가 그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리고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본성적으로 이것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서 어렵습니다. 율법은 당연히 이렇게 하라고 준 조건으로 보입니다.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렇게 들리죠. 그러나 그 말씀은 그것이 조건이 되어 그 보상을, 그 심판을 말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왜냐하면 순서상 율법을 주고, 지켜서 구원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약속한 대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약속하여 ‘너와 네 후손의 하느님이 되리라’를 약속한 걸 이루기 위하여 애굽에 종(노예)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찾아오십니다.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보내지 않으려는 파라오와 애굽을 열 가지 재앙으로, 그리고 홍해를 가르고 광야 길을 걷되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으며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셔, 시나이산에 데리고 옵니다. ‘나는 야훼 네 하느님이니 나에게 순종하라.’ 조건을 줄 상황이 아니고, 이루어져 온 자리에서의 하느님과 하느님의 부르심이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이 알고 있어야 할 정체성, 명예에 관한 이야기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예전에 우리 클 때는 어려운 시절이라서 각 집안의 맏이들은 보통 대학을 못 갔습니다. 고등학교도 못 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동생들은 맏이를 위하여 희생했죠. 평생 소원이 공부해보는 것, 즉 우리 시대에 한 가지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공부를 한다는 게 뭐죠? 그땐 부모님들이 이렇게 자식들한테 얘기하곤 했습니다. “넌 공부나 해.” 무슨 뜻일까요? “너보고 돈 벌어 오라 그러지 않을게. 넌 공부나 잘 해.” 그러면 자식이 이렇게 생각하나요. ‘공부를 못하면 죽는구나. 공부를 잘하면 자식이 될 수 있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식이고, 부모가 그 자식에게 모든 영광을 채우기 위하여, 내가 희생할 테니까 너는 마음껏 훌륭해져라. 그게 공부입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그것 자체가 자랑인 것입니다. 그 전에는 그런 걸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애굽에 종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가 없기 때문에, 명예로운 인생, 존재, 윤리, 명예로운 어떤 내용도 존재도 삶도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주어지죠. 그게 율법입니다. 신명기 30장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라고요? 율법이 내게 왔다. 그게 무슨 얘긴지 알아라. 공부하자고 선생님이 오셨다. 무슨 얘기가 전제돼 있다구요? 껌 팔러 나가지 않아도 되고, 공장에 일하러 가지 않아도 된다. 공부는 왜 시켜요? 훌륭해지라고 시킵니다. 원래 교육의 목적이고 교육의 자랑이죠. 훌륭해지는 것, 그러나 다 실패합니다. 다 실패하죠. 율법에서 다 걸려 넘어졌는데, 그런 의미에서는 율법도 걸림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걸림돌인 것은 어떤 가치와 어떤 덕목도 예수를 통과하지 않고, 예수와 함께 하지 않고 있는 것은 거짓말이랍니다. 우리 자주 쓰는 이런 덕목들 정의, 평화, 진리, 진심, 사랑 그것이 예수와 함께 하지 않으면, 예수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 예수에게 담겨 있지 않으면, 죽음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장례식에 가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가 생전에 얼마나 굉장한 사람이었는가를 얘기하는 것은, 그것은 다 푸념이라는 사실입니다. 슬픔을 완화시키기 위한,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고픈, 살아있는 자들의 공포입니다. 그렇게 얘기해서,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 선 자기를 달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만 괜찮습니다. 천국에 가 있습니다. 우리도 쫓아갈 겁니다. 가서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게 살다 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장례식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죽음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예수를 모르고 예수가 없으면 그가 말하는 사랑이나 그가 말하는 애국이나 그가 말하는 어떤 대의나 그가 말하는 도덕이나 뭐나 다 거짓말입니다. 어떤 거짓말? 그렇게 밖에는 자신을 달랠 다른 방법이 없어서 쩔쩔 매는 비명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는 것은, 그 영광과 그 실체를 그가 이루셨죠. 순종으로, 십자가로, 어떤 명예 어떤 영광을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심으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시죠. 하느님은 그 예수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내어주는 영광, 사랑하여 희생하는 영광, 당신의 거룩하고 우리를 향한 복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용서하는 영광, 율법의 마침이 되십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손해를 봐야 되고 양보를 해야 되고 밑져야 되고 고통스럽다고요?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도 모르시는 거죠.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클래식을 모르면, 기본적인 교양이 없으면 무슨 대화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늘 싸우는 일, 거기 나오는 포로 수용소의 영국군 대령은 데이비드 이븐이 아니고 알렉 기네스입니다. 데이비드 이븐이 무슨 이유에선지 우리나라에선 더 유명했는데 80일간의 세계 일주에 나와서 그랬을 겁니다. 거기에 나온 배우는 비슷하게 생겼으나 훨씬 더 연기력이 좋은 알렉 기네스라는 사람입니다. 일본군 사령관이 이 포로된 영국군들에게 콰이강의 다리를 놓기 위하여 장교들까지 일을 하라고 합니다. 장교들은 일 안한다. 그럼 너 독방이다. 잡아 들여 넣어라. 그래서 양철 지붕 박스에 그 뙤약볕의 양철지붕 속에, 독방에 갇히죠. 그리고 장교들과 사병들이 밖에 차렷 자세로 서있습니다. 무슨 자존심 싸움을 하느냐 하면, 힘으로 우리를 누르고 있지만 우리의 인격적 우월감과 자존심을 꺾을 수는 없다. 이 싸움을 하죠. ‘죽일려면 죽여라’. 그래서 기억으로는 하룻밤쯤 잡아놨다가 견디지 못하고 꺼내줍니다. 들어와서 이틀 밤이었나요. 예수님은 사흘 밤이었으니까. 이 물을 마시고 꺼내주는데 서있을 힘이 없습니다. 부하들이 다 포로수용소 마당에 서서 기다리고 있고 걸어 나가는데 부축을 하고 나오죠. “비켜! 나 혼자 걸을 거야!” 멋진 얼굴로 걸어 나오죠. 예수 믿는다는 게 뭔지 알아야 돼요. 하나가 서서 모두에게, 믿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모두에게 위협하고 도전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뭘 가지고 있는가, 죽음을 이길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든 부끄러움과 모든 욕됨과 모든 고통 속에서 하느님이 그의 신실함과 그의 오래 참으심과 용서와 기적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자로 걸어 나간다는 것은 굉장한 것이죠. 그러니 이 일은 신명기 30장에서는 이어서 이렇게 돼 있습니다. (신명30,15-16) 15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내리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명령을 순종하며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고 그가 지시하신 길을 걸으며 그의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면 너희는 복되게 살며 번성할 것이다. 너희가 들어 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내리시는 복을 누릴 것이다. 생명과 행복과 죽음과 불행을 우리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타협할 수 있습니다. 그게 쉽습니다. 또 내려가면 됩니다. 그걸 에베소서 4장에서는 이렇게 얘기하죠. (에페4,17-19) 17 그러므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고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방인들처럼 살지 마십시오. 그들은 헛된 생각을 하고 18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지 못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고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19 그들은 도덕적인 감각을 잃고 제멋대로 방탕에 빠져서 온갖 더러운 짓을 하고 있습니다. 윤리적 구별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본질은 이겁니다. 허비 된다. 그의 존재와 인생이 다만 낭비되고 소진되어 없어지고 마는 길을 걷고 있다. 그겁니다. 죽음이 뭐죠? 없어지는 것입니다. 썩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한 때 영광, 성공, 깨우침, 어떤 자랑도 다 허비되고 낭비되고 소진되고 멸절되는 것을 죽음(死亡)이라고 합니다. 낭비되죠. 신자들은 달랐습니다. (에페5,18) 18 술취하지 마십시오. 방탕한 생활이 거기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허비되는 것과 채워지는 것, 생명이 없는 것은 썩어져 나갈 수 밖에 없고 바래지고 소멸되지만 생명은 자랍니다. 자랍니다. 채워줍니다. 에페소서 전체가 그 말을 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데만 찾아보죠. 에페소서 1장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거기 영광, 풍성, 부요, 충만, 이런 단어들이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가 보십시오. (에페1,3-1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4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 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6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은총으로 8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을 넘치도록 주셔서 9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시켜 이루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세워 놓으셨던 계획대로 된 것으로서 10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11 모든 것을 뜻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따라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택하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12 그러므로 맨 먼저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복음 곧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14 성령께서는 우리가 받을 상속을 보증해 주시고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살아있는 자, 하느님의 생명 안에 있는 자에게 허락된 것들입니다. 영광이라고 얘기합니다. 3장 하나 더 보죠. (에페3,14-19) 14 나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가족에게 15 이름을 주신 하느님 아버지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드립니다. 16 넘쳐 흐르는 영광의 아버지께서 성령으로 여러분의 힘을 돋구어 내적 인간으로 굳세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17 그리고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 속에 들어 가 사실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사랑을 기초로 하여 살아 감으로써 18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신비가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달아 알고 19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완성되고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빕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영광입니다. 생명으로 나가는 자와 죽음으로 나가는 자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주어졌다는 게 무슨 뜻이었다고요? 너 공부해라. 그런 뜻이었다고요. 예수를 믿는다는 게 무슨 뜻이라고요? 새 생명을 살아라. 우리 로마서 6장 4절에 있었어요. 확인하고 지나가죠. (로마6,4) 4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린 뭘 하느라고 이걸 놓칠까요? 윤리적 완벽을 구하다가 놓치고 있습니다. 나무가 자연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을 뽐내지 않고, 자꾸 직선인지 이등분이 맞는지 판단하고 무흠하고 완벽한 싸움을 하느라고 생명의 부유함을 모르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부유함을 모릅니다. 공부 잘못하면 꾸중도 듣고 매도 맞을지 모르지만 그건 죽이려고 보낸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이 율법에서 그러했듯이 율법이 어쨌다고요? 시나이 산에 와서 봤듯이 예수가 오시고 우리가 지금 믿고 있다고요. 일어난 일이라구요. 뭐가? 오늘 본문으로 와보세요. 이 얘기, (로마10,8-11) 8 하느님께서 '말씀은 네 바로 곁에 있고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고 하셨는데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9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또 하느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0 곧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11 성서에도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수치를 당하지 않으리라' 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이게 뭐예요? 지금 실현돼 있다.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오셨다. 쫓아가서, 어디가서 찾아와야 될 것이냐? 너한테 벌써 왔다. 우리 다 그 증인 아니에요? 예수를 믿잖아요. 오시면 믿기로 한 게 아니라 믿어 여기 나와 있어요. 신자들의 제일 큰 오해, 자기의 믿음을 의심하는 거죠. 아까도 얘기한 거 같이 완벽하려고. 안심하려고. 누리지를 못해. 새 생명 가운데 있다는 게 무슨 뜻이죠? 이젠 달라요. (로마8,1-2)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일어난 거예요. 예수가 오셔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자 새 세상을 열었어요. 우린 그 새 세상에 속한 자들,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현실과 이미 과거를 갖고 있듯이 그의 백성으로 사는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인도하는 자인 것을, 그래서 거듭 얘기하죠.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니가 예수를 알지 않냐? 그를 믿지 않냐? 니 마음에 드냐 안 드냐는 뒀다 생각하고, 그렇지 않냐?’ 이 로마서에서의 주장이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영광인지 우리가 어떻게 자유인이 됐는지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는 결코 할 수 없었던 거야. 하느님이 불러 자유인만이 하는 것, 자발성. 우리 몇 년 전인가 마이클 샌델이라는 사람의 ‘정의란 무엇인가’ 하는 책들이 유행을 한 적이 있었어요. ‘정의를 실현하려면 법이 공정하게 집행돼야 하더라. 그러나 법은 너무 부정적이고 소극적이어서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는 턱없이 모자라더라. 법을 이기적으로 얼마든지 쓸 수 있더라. 그럼 무엇이 있어야 되느냐? 도덕이 있어야 되더라. 왜 도덕은 시행이 어렵냐? 그건 자발성을 가져야 되기 때문이더라.‘ 이렇게 됐습니다. 도덕은, 자발성을 가집니다. 신자가 되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건, 이 자발성을 갖는 것인데, 자발성은 종은 가지지 못합니다. 선택의 기회가 있어야 된다. 자유라는 말을 하면, 선택의 기회가 있다고 하면, 책임 없다는 얘기와 꼭 결부시키는 것이 인간은 본성인데 자유가 있으면 권리만 주장하는데 권리는 책임 위에 선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남의 밑에 종으로 있을 땐 기회 있으면 도망가서 쉬는 게 자유겠지요. 그러나 자기가 자기 인생과 자기 시대에서 자기 책임을 이해한다면, 자유란 책임을 기꺼이 지는 것이 자유입니다. 부모가 되는 것, 시민이 되는 것, 이웃이 되는 것, 그것은 다 권리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책임이 있어야 됩니다. 그 책임을 스스로 지는 것이 명예라고 얘기합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얘기합니다. 오래 참는 것, 이기적이지 않는 것, 무례히 행치 않는 것, 온유한 것, 기다리는 것, 그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가장 고급한 적극적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된 특징이 책임으로 나타난다는 것 기억하해야 되고, 그것이 명예라는 것을 기억하해야 되고, 하느님이 당신의 설명을 십자가로 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고, 율법의 마침이 순종으로, 죽음으로 완성됐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모르면 그리스도교 신앙인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러면 안 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으로서 가장 중요한 명예를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자가 되어 사는 동안에 가지는 모든 억울함들은 따지고 보면 그리스도교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시온에 걸림돌에 부딪히셨을 것입니다. 그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치는, 그래서 늠름하게 살 수 있는 신앙인이 되고 신앙생활이 되어 이 세상 앞에 우리들이 가진 빛과 소금의 역할을 책임과 자랑으로 누리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드디어 명예로워졌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참을 수 없는 영광입니다. 가둘 수 없는 충만입니다. 생수의 강이 우리 배 속에 흘러 넘쳐 큰 강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작고 숨겨진 우리의 인생을 하느님의 영광을 담고 사는 자의 자랑으로 순종할 믿음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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