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29) 전도자로 파견(派遣) (로마10,14-21) | |||
---|---|---|---|---|
이전글 | 엘리사의 매일말씀여행(마르3,7-12/연중 제2주간 목요일(일치 주간)) |1| | |||
다음글 | 예수고난회 박태원 신부님의 [1월 18일] 살아있는 매일의 지혜(완덕과 함께 하는 평화) |1| | |||
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1-18 | 조회수214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24. 1. 18. (목요일) 로마서29) 전도자로 파견(派遣) (로마10,14-21) 14 그러나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어 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15 전도자로서 파견 받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는 말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16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 복음을 받아 들인 것은 아닙니다. '주님, 우리가 일러 준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이사야도 한탄한 일이 있습니다. 17 그러므로 들어야 믿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이 있어야 들을 수 있습니다. 18 나는 묻겠습니다. 그들이 그 말씀을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까? 분명히 들었습니다. 성서의 말씀에도, '그들의 소리가 온 땅에 울려 퍼졌고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 고 하지 않았습니까? 19 나는 다시 묻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말씀을 알아 듣지 못했습니까? 우선 모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나는 너희로 하여금 내 백성이 아닌 자들을 시기하게 하겠고 어리석은 백성을 보고 화나게 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20 또 이사야는 더욱 대담하게, '나를 찾지 않던 사람들이 나를 만났고 나를 구하지 않던 사람들이 나를 보았다' 고 하였습니다. 21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나는 온종일 내 팔을 벌려 이 백성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거역하고 있다' 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의 구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를 거부한, 그러나 하느님이 특별히 선택했던 한 민족의 운명을 다루고 있지요. 이스라엘은 예수를 못 박았고 거부했습니다. 그리하여 희한하게도 복음은 이방으로 넘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의 운명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일하심에 대한 우리의 의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시작하신 일을 포기하실 수 있는가? 우리가 끝까지 반대하면 하느님의 목적은 변개될 수 있는가? 그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운명은 복음의 진정한 성격과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에 대한 중요한 한 이해의 내용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오로의 이야기는 이방에게 넘어간 구원이 그들이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서, 즉 무지한 상태에서 허락받은 은혜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하게 거부한 이스라엘에게도 무지한 자에게 구원이 이른 것 같이 거부한 자에게도 은혜는 승리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그의 확신인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이제 로마서 10장이 말하는 것 같이,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11절에서 보았듯이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리라” 라는 선언과 13절에 있듯이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라는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한 선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누구든지'라는, 나를, 우리가 얼마나 깊이 이해해야 되느냐 하면, 누구든지 라는 것이 누구 아무라도 좋은데 라는 무한히 열어 놓은 조건이면서, 그러나 ‘믿어야 된다’로 묶기 위한 누구든지는 아닙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그 뒤에 나오는 믿음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하여 누구든지'라는 뜻이 됩니다. 그 얘기가 오늘의 본문입니다. ‘누구든지’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며, 우리의 자격에 의한 것이 아니며, 우리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제 누구든지가 됐다’ 그런 뜻이라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지는, 그 복음이 가지는 은혜의 무한함을 얘기하면 은혜를 안 받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다음부터 계급이 생깁니다. “개나 소나 다 구원받는 건 싫다.”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틀리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이제 우리 인생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 열쇠가 됩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이 믿음으로 열려 있는 것 같이 우리가 사는 인생이 어떠하든지 ‘하느님 손 안에 붙잡혀 있다’로 넘어가는 일에 이 문제는 사활이 걸린 자리입니다.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어 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얘기하는 것은 다 우리가 믿은 것들이 자체 안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온 것이다. 라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밖에서 누가 보냈어요? 우리 하느님 아버지가 보냈어요. 예수는 우리가 쫓아가 만난 분이 아니라, 우리가 저 지하에 가서 끌어 올린 분이 아니라,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었듯이 하느님이 시작이라고요. 하느님이 근거고 하느님이 다 시작하신 일이다. 그 얘기를 하려고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를 강조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전도자로서 파견 받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사야 52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얼마나 귀한가. 이 사람들이 귀한 게 아니라 이들을 보내는 하느님은 얼마나 놀라운가 라는 얘기에요. 그리고 금방 이어서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님, 우리가 일러 준 말을 누가 믿었습니까?' 입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야훼의 팔이 뉘에게 나타났습니까? 아무도 못 알아보고 아무도 순종치 않았습니다. 예수는 우리 손에 죽었죠. 우리가 기대하는 신과 달라서 죽였습니다. 우리 마음에 들지 않아서 죽였습니다. 하느님이 보내셨습니다. 보내시고 어떻게 하는가를 봐서 결과가 있는 게 아니라 그를 죽이는 우리의 죽음을, 그 죽음에 감싸 안아서 부활로 반전시켰습니다. 그게 복음(福音)입니다. 예수를 죽이고 구원을 받습니다. 회개하고 구원받지 않습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얻은 다음에 깨우치는 것입니다. 내가 한 짓. 진심이 뭔지, 예수가 무얼 이루어 주셨는지 알아서 통곡하는 겁니다. 자신이 무엇이었으며 이제 누구 품에 안겼는가를 아는 게 회개(悔改)입니다. 그건 강요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결론에 오지 않고는 회개는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 품에 안기기 전에는 무엇을 갖다 대도, 내가 얼마나 못난 놈이며 너 그러면 안 된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아무도 회개하지 못합니다. 생명으로 들어와야 그 첫 열매가 회개로 터지는 겁니다. ‘누구든지’ 라는 말을 오해하고 있어서, ‘아무도 몰라본, 아무도 듣지 않은, 모두가 거부한 그 속에 하느님이 그 일을 하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그 말이 갖는 뜻을 모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이에 대한 복음서에 중요한 예수님의 설명이 있습니다. (마태13,10-15) 10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11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12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사야가 일찌기,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고 말하지 않았더냐? 이스라엘 백성이 왜 말을 안 듣는다구요? 자기들 마음이 변할까 봐, 자기 고집이 무산될까봐, 자기네가 알고 있었던 것이 틀렸을까 봐, 계속 고집을 부린답니다. 그래놓고 이 말이 나오죠. (마태13,16-17)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나는 분명히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거부하는 백성들, 안 듣는 백성들, 자기네들의 고집을 세우기 위하여 기를 쓰고 반대하는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라는 말입니다. 말을 하고 믿나 안 믿나 보는 것이 아니고, 듣나 안 듣나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게 아니고, 안 듣고, 반대하고 고개를 돌리고, 기를 쓰고 반항하는 것들에게 왔다니까요. 그게 복음이에요. 그걸 믿음이라 그래요. 행위가 아닌 것 하느님이 작정, 특정하셔서 은혜와 능력과 성실함으로 밀어붙인 것,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복음,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구원,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하느님의 임재란 말이죠. 싫죠. 못난 것들이에요. 하느님이 성실하고 은혜스러운 게 싫은 거예요. 내가 한대로 갚아 달라 그러죠. 계급장을 붙이자는 거에요. 그게 죄예요. 어디서부터 이렇게 됐을까요? 하느님의 무한하심이 우리들에게 그 은혜가 와 우리들에게 짐이 됐을까요? 모두에게 나눠줘서요? 한국 교회는 그 힘을 잃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아무도 신앙 현실을 살지 않아요. 성적표만 들고 들어와서 석차만 매기는 데가 됐어요. 우리 자신의 인생을 보세요. 신앙인으로 사는 거야? 뭐가 겁나는 거예요? 세상이 교회를 욕하는 게 겁나요? 원래 모두가 다 예수를 붙들어 매고 죽인 곳이에요. 각오를 하고 산다고요? 아니요. 신명기 28장에서 하느님이 모세를 통하여 “나에게 순종하라 그러면 너희 나가도 복 받고 들어와도 복 받는다. 나를 거역하면 나가도 저주를 받고 들어와도 저주를 받는다.” 이 끝자락이에요. 신명기 30장이예요. (신명30,15-20) 15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내리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명령을 순종하며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고 그가 지시하신 길을 걸으며 그의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면 너희는 복되게 살며 번성할 것이다. 너희가 들어 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내리시는 복을 누릴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 마음이 변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느님께 추방당하여 다른 신들 앞에 엎드려 그것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18 오늘 나는 너희에게 일러 둔다. 그리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하리라. 너희가 이제 요르단강을 건너 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20 그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야훼께서 너희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자리잡고 오래 잘 사는 길이다.'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런 얘기가 아니에요. 이스라엘 백성은, 그리고 오늘날 신약시대에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명예라는 것을 알게 됐죠. 그러지 않는 것은 다 저주예요. 세상 사람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생명과 복을 선택할 그 선택이 없어요. 남은 것은 저주와 죽음뿐이에요. 신자(信者)가 되면 비로소 이 선택 앞에 설 수 있어야 자유가 주어지죠. 너는 내 백성이다. 내 백성으로 사는 것이 무슨 복인지 어떤 명예인지 알고 그 인생을 살기를 바란다. 책임이 아니에요. 짐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느님 백성만이 누리는 복(福)이에요.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돌아보세요? 우리가 그토록 매진하고 매달렸던 모든 것 중에 그거 잘했다가 뭐가 있어요? 장례식 가서 그가 ‘예전에 뭐 했던 사람이다’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그랬죠. 되져 버렸잖아요. 왜 몰라? 세상이 거짓이라는 걸. 죽음밖엔 결실할 수 없다는 걸 왜 몰라? 얼마나 헛 돼. 공부를 잘해서 어따 쓸건데? 무슨 이익이 있어? 살아있는 동안 체면 치레에 불과했지. 무슨 낙이 있어? 내 손주들 보면 내가 왜 마음이 안 안타깝겠어? 얼마나 힘든 세상을 살아야 되는지 아니까 안타깝지. 차라리 죽여버리는게 나을 거 같아. 안 그래? 예수를 믿는 명예를 왜 몰라? 왜 그딴 얼굴들을 하고 있어? 뭘 기대하는 거야? ‘발가락 무좀 낫게 해달라고’가 다야? 죽을래? 인간이 뭔지 왜 그렇게 한심하게들 생각하는 거라고 스스로가 한심하지 않아? 인간의 가치가 뭔지. 내가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네 앞에 둔다. 너 까딱 잘못하면 죽는다 그런 협박이 아니에요. 하느님이 그 백성에게 주는 복이야. 나를 따라 이 길을 걸어라. 니가 거절하면 그게 얼마나 큰 손해인지, 비극인지 알아라.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나 없는 길을 가는 데 놔두지 않겠다. 그게 어떤 비극인지, 그게 어떻게 허망한 것이고 손해인지 내가 너한테 꼭 가르쳐준다. 하느님의 우리를 향한 성실하심이죠. 우리의 반응을 뚫고 극복하고 들어오신 하느님의 구원이 우리를 이 자리로 부르는 겁니다. 순서를 혼동하지 마세요. 이걸 걸으면 구원이 나오는 게 아니라 그랬죠. 이게 시나이산 이라고요. 홍해를 건너온 다음이라니까. 자기가 받은 구원을 하느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어떻게 살아내는 것이 자랑인지를 몰라. 거기가 중요해요. 뭐가 되는 거냐? 누구든지가 되는 거야. 누구든지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말해요. 아무것도 아닌 자에게 하느님이 찾아들어와 그의 반응과 이해, 결단 이전에 구원을 부으실 수 있었던 것처럼 아무도 안 믿는 자리, “무리에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야훼 팔이 내게 나타났나이까?” 그게 무슨 소리야? 못 알아봤지. 그리고 나타난 모양도 기대와 달라. 예수님부터 시작해서 그런 모습, 그런 식으로는 메시아일리가 없다고 생각했죠. 죽어버렸으니까. 그게 얼마나 굉장한 길인지 우리는 알잖아요. 누구든지를 위하여 누구든지를 보내. 여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로 하자면, 로마서 10장대로 하자면, (로마10,15) 15 전도자로서 파견 받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는 말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게 무슨 사명에 불타서, 멋진 선교사가 되어서, 그 기쁜 얼굴을 하고 뛰어가는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하지 말아요. 사도행전 8장에 이렇게 기록돼 있어요. 스테파노가 죽어. 모두가 돌을 던져서 죽여. 바오로가 그의 죽임을 마땅히 여겨. 그리고 그날 예루살렘 교회 핍박이 일어나. 다 흩어져. 뭘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야? 쫓겨 가고 목숨 부지하려고 도망가. 그래서 복음이 세계에 퍼져. 우린 다 그게 싫은거야. 아무것도 아닌 거,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 있고 하느님이 일하는 거 같지 않은 나 스스로 실은 떠밀려간, 짓 눌려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분해. 하느님 건강 주세요?. 지위를 주세요. 돈 주세요?. 그렇게 안해. 짓밟아서 보내. 빈대떡 만들듯이 맷돌에 갈아서 보낸다니까. 그게 위대한 인생이라고. 거기서 이 인생을 살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모두에게 누구에게나 하느님 찾아가신다구요, 이걸 볼 줄 모르면 밤낮 떠는 거야. 이러다 한국 교회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이러다 어느 교회는 어떻고 어느 교회는 어떻고 그게 무슨 개뼈다구 같은 비명이야? 하느님을 뭘로 보는 거야? 우리를 다 죽이면 그리스도교가 망할 거 같애? 어디서는 병신 같은 소리를 듣고 와 갖고 와서 벌벌 떠는 거야? 도대체가. 정말 죽을래? 문 닫아 걸고 한번 죽어볼래? 뭘 겁을래? 교회 건물이 이슬람에 넘어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줄면 그리스도교가 망해? 그럼 이슬람이 이겨? 이런 병신 같은 신앙을 누구한테 배웠어? 나가서 나한테 배웠다고 그랬을 거 아니야. 히브리서 5장에 가봐요. (히브5,7-10) 7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당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수 있는 분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마음을 보시고 그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8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겪음으로써 복종하는 것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후에 당신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10 하느님께로부터 멜기세덱의 사제 직분을 잇는 대사제로 임명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그의 일을 이루셨나 봐요. 모두에게 찾아오기 위하여 그가 선택한, 아니 하느님이 요구한 길이 뭐야? 제한되는 거야? 육체가 되어서, 공중에다 삐라를 뿌리고 하늘에다가 글 쓰는 게 아니라, 잡히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에. 갈릴레아에 잡혀. 공간적인 제약과 시간의 제약을 받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제한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만나. 갈릴레아 어부들을 만나. 그들과의 아무것도 아닌 것들. 뭐든지 한다고? 거기서부터 뭘해? 부활을 만들어. 어느 길을 걸어서? 죽어서. 죽는 자리까지 순종하여 거기서 반전을 이루세요. 우리들이 작다고 억울하다고? 그렇게 말하는 것들은 예수 믿는다는 말을 할 자격이 없는 거야. 어디서나 할 수 있어. 어느 조건에서도 할 수 있어. 창조와 부활의 하느님이시니까. 예수님이 이 길을 육체에 계실 때 그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눈물과 통곡으로 기도할 만한 그런 지경을 걸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받은 시험이 뭐예요? 그 시험은 모두 이거야. 시간 속을 걸을 필요는 없지 않냐? 그냥 이렇게 딱 결론을 만들어라. 그런 시험이에요. 돌을 빵떡으로 만들고 성전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받고 내게 절하면 세상 다 줬대. 그게 다가 아니야. 결과가 다가 아니야. 결과가 만들어져 채워져 구체화되는 어떤 내용이어야 되는 거야. 예수님이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신다는 걸 시간과 공간과 인생으로 살아내서 이렇게 역사적 증거와 인생으로 이렇게 사랑을 하는, 상대가 없는 상대와 편지를 주고받고 사랑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누구를 사랑하는 거잖아. 그 누가 이 깻잎 머리 해서 뿅 갔다는 거 아니야. 무슨 깻잎 머리가 멋있겠어? 사랑하면 뭐든지 좋아. 사랑하면 눈이 째졌어도 좋고. 세로로 서도 좋고. 가로로 서도 좋아. 세상에서 제일 이뻐. 한번 꼴 보기 싫으면 눈이 두 개인 것도 보기 싫어. 생각을 해봐. 예수님이 그걸 실제로 걸어오시는 거야. 실제로 지고 가시는 거야.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보고 우리가 걷는 인생이 다만 결심이고, 다만 말이고, 다만 기대고, 다만 설명 아니라고 얘기를 해. 살아버리니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듯이, 등산화를 신고 산을 올라가듯이, 그건 다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야. 올라가는 내내 자연의 경외를 보는 거야. 영혼에 빛이 들어오는 거야.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 알라 라는 거에요. 그래서 필리피서 1장, 바오로는 이런 식으로 권면을 해요. (필리1,27-30)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사람다운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여러분을 찾아 가서 만나게 되든지 이렇게 떨어져 있든지간에 나는 여러분이 복음의 교리를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굳게 서서 분투노력하며 28 반대자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조금도 겁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한 용기가 그들에게는 멸망의 징조가 되고 여러분에게는 구원의 징조가 될 것입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29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을 특권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까지 당하는 특권,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30 여러분은 내가 전에 그리스도를 위해서 싸우는 것을 보았고 또 지금도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듣고 있을 터이지만 지금 여러분도 같은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뭘 보고 뭘 듣죠? 그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이죠. 고난을 당하고 있죠. 복음을 위하여. 복음이 뭔지 모르는 자들, 복음을 거부하고 대항하는 자들에 의하여 붙잡혀 있죠. 그러나 ‘그것 손해 아니다’ 그러는 거죠. 고난은 뭐죠? 하느님의 일하심의 무게입니다. 예전엔 그랬어요. 겨울이 되면 김장 이백 포기 해놓고 연탄 오백 장 쌓아놓고 쌀 두 가마니 있으면 든든하다고. 하느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의 인생에 어떤 짐을 어떤 고난을 겪게 하시는 것은 하느님이 나를 붙잡고 계시며 실제적인 길로 나를 밀어 넣으셨다는 무게입니다. 하느님이 멀리 계시지 않고 구경하고 계시지 않다는 참으로 진실된 그 현상들입니다. 그 길을 걸으세요. 뭐를 하라고요? 두려워하지 말고. 이 두려움이 세상이 주는 위협이 죽음 외에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거라는 걸 기억하세요. 그걸 뒤집는, 그 속에 은혜를 베푸시고 그걸 승리로 만들 수 있는 하느님을 믿는 자 되어 세상의 위협이 다만 우리보고 “너 편안하게 해줄게.” 라는 시험인 줄 알라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끝이, '나를 찾지 않던 사람들이 나를 만났고 나를 구하지 않던 사람들이 나를 보았다'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아세요.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아오시고 내게 묻지 않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하느님이 오늘 나를 거기에 보내고 있는 거죠. 반가워하지 않는 자, 내가 누군가 물어도 안 보는 자 앞에 나를 보내는 것은 하느님이시죠. 그러니 우리 인생이 막막함,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죄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나는 온종일 내 팔을 벌려 이 백성을 기다렸으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거역하고 있다' 고 말하였다. 우리가 그 팔이죠. 그리스도교인들이 되어 사는 시대, 사회, 세상, 그리스도교 국가라는 건 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교인을 낳지 않습니다. 죄인을 낳지요. 죄가 기본으로 세상의 권력입니다. 거기에 하느님이 그의 백성들을 보내시고 부르십니다.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그렇게 우리가 있습니다. 옆에 아무도 없는 것 같고 나 혼자인 것 같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그때마다 생각하라고요. 그 아무것도 아닌 자를 위하여 아무것도 아닌 나를 보내신다. 찾지 않고 묻지 않는 자들에게 하느님이 찾아가시는 그 실제적인 손길이다. 명예롭게 사세요. 하느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생명과 행복임을 아세요. 외면하면 죽음과 저주밖에 남는 게 없습니다. 세상에서 실컷 보는 것입니다. 누구 부러워했던 사람들, 아직도 부러운 자리에 있는가 보십시오. 10년 전에 부러웠던 사람들이 아직도 부러운 자리에 있나. 우리들이 여기까지 붙잡혀온 하느님의 은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스스로에게 손해이기 때문에 오늘 이 말씀 전합니다. 알아들으시고 승리하고 자랑하는 인생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믿는 명예, 복, 자랑, 확인합니다. 우리는 늘 세상 앞에 쪼그라들곤 하지요. 아니요. 그 세상을 위하여 하느님이 그 아들을 주셨고 우리를 보내시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가치를 우리가 알아야죠. 우리의 존재의 의미를 우리가 알아야죠. 스스로 명예롭지 않으면 이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바오로의 말같이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이 실패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웃고 인내하고 용서하고 충성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