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3,1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열둘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사도라 부르시며, 열두 사도의 이름을 불러 세우십니다. 예전 초등부 피정을 할 때, 저나 다른 봉사자들이 아이들의 이름을 잘못 부르면 정색하고, 자신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정정해 주는 아이의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린아이에게도 이름은 중요하고, 그 이름은 자신의 존재며 신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느껴집니다. 몇 년 전 K팝 오디션에서 ‘이설아’라는 친구가 불러 많은 엄마뿐만 아니라 엄마를 그리워하는 많은 이들에게 엄마란 어떤 존재인가를 회상하게 한 노래, 「엄마로 산다는 것은」에 이런 노랫말이 나옵니다. 『엄마도 소녀일 때가 엄마도 나만한 때가 엄마도 아리따웠던 때가 있었겠지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사셨던 엄마』 그런데 정작 더 마음 아픈 것은 엄마에게는 이름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엄마에게도 분명 엄마의 아름다운 이름이 있었지만, 언제부턴가 아마도 엄마가 되고 나서부터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 채 사셨던 분이십니다. 제 엄마는 제 아버지의 성을 따서 ‘긴상댁’, ‘민자 엄마’ 그리고 제가 신부가 되고 난 뒤에는 아오스딩신부 엄마로 불리면서 인간으로서나 여성으로써 이름없는 세월을 사셨고, 지금도 엄마의 이름보다는 전 아직도 ‘엄마’라는 호칭을 마치 제 엄마의 진짜 이름처럼 부르고 있습니다. 누가 제 엄마의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아 줄 수 있나요! 사실 이 묵상 글을 쓰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엄마가 보고 싶고, 엄마하고 불러 보고 싶은 마음에서 이렇게 늦게나마 제 엄마의 이름, 조규옥 모니카를 조용하게 혼자 불렀는데도 참았던 그리움의 눈물이 쏟아지네요. 제가 참 주책이지요! 자식이 나이 들어가도 엄마는 엄마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시어 기도하신 다음 마음에 새겨둔 열둘을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 부르셨습니다. 사도란 ‘아포스톨로스, 즉 파견받은 자’란 뜻입니다. 당신께서 세상에 파견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비록 부족하고 나약한 그들이지만 그들을 불러 당신의 사람으로 선택하시고 파견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당신과 함께 머무는 존재이며,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로 파견되기 이전에 그들은 먼저 주님의 제자로 주님과 함께 살면서 듣고 배움을 통해 주님이 누구시며, 주님의 꿈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가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친교를 통해 파견(=선교)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기에, 친교를 전제로 하지 않은 파견은 그 힘을 잃게 될 것이며 아울러 파견이 없는 친교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파견된 사도들은 자신들을 부르시고 보내시는 예수님의 정신, 얼, 영과 일치하는 만큼 자신들의 일, 곧 사람의 일이 아닌 하느님의 일만을 생각하고 실행할 것입니다. (마태16,23참조)
오늘 예수님은 주님의 영으로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당신의 마음에 담아 두었던 제자들 열두 사람의 이름을 불러 당신 곁에 세우십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불러 주는 그 순간부터 그들의 이름은 사라질 세상에서 사라질 이름이 아니라 영원히 교회가 존속하는 한 남겨질 이름, 하늘에 새겨질 이름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들은 참으로 지금 여기에 늘 살아 있는 존재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까지 그들의 이름(=존재)은 세상에서 사라질 이름이며 존재였었는데, 이 순간부터 영원히 호명할 것입니다. 그들의 이름처럼 우리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개개인을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고 불러 주시리라 믿게 되었습니다. 저처럼 아이의 이름을 잘못 부르지 않으시고 우리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리라 희망합니다. 아무튼 이 세상에선 당신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사셨던 모든 엄마 또한 저세상에서 주님께서 다정스럽게 부르셔서 당신과 함께 머물도록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세상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 기억해 준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며 거룩한 일입니다. 예전 ‘동상이몽’이란 프로에 보면, 최수종이 자기 아내를 ‘하희라 씨’ 하며 불러 주는 게 참 좋더라고요. 우리 모두 호칭보다는 오늘 하루만큼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예수님을 대신해서 이름을 불러 주도록 합시다. 끝으로 제가 좋아하기에 자주 인용하는 ‘김춘수’님의 「꽃」이란 시를 함께 음미하면서 이름이 지닌 깊은 뜻을 다시 마음에 되새기는 하루 보내길 바랍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