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그분 곁에 머문 열두 사도 / 연중 제2주간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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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1-19 | 조회수292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그분 곁에 머문 열두 사도 / 연중 제2주간 금요일(마르 3,13-19)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니 그들이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사도라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는 권한을 갖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처럼 사도는 그분 곁에 머물고, 때로는 파견되는 이다. 아무튼 함께 지내는 것이 파견보다 먼저인 게 인상 깊다. 그분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셨다. 만나서 동고동락으로 친교를 나누며, 이르면서 스승을 먼저 알고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리라. 그러고 나서야 나아가서 선포와 마귀를 쫓는단다. 어쩌면 그 열둘의 이 사도는 교회 공동체의 표상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으로부터 말씀 선포와 마귀 쫓는 권한을 받은 그들은 평범한 이들이었다. 뛰어난 학식도 없었고 명문가 출신도 아니었다.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 사제, 등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이는 평범한 이도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아, 예수님 제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거다. 그래서 주위의 힘 좀 쓴다는 자들이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명을 보면서는 다소 의아해 하였으리라. 글도 오르는 어부와 세리, 열혈 당원까지, 그들이 언뜻 보기에도 대부분 천하고 죄인들이라 생각했을 수도. 아마도 ‘오합지졸도 이런 오합지졸을’하고 하찮게 여겼으리라. 그만큼 열둘의 면면은 ‘스펙’다운 게 없었다. 수석 좋아하는 부자가, 어떤 수집가에게서 탐나는 돌을 봤다. 모양새가 너무 마음에 들자, 그는 값은 충분히 줄 테니 팔라고 했다. 그러나 주인은 더 많은 걸 바라며 팔지 않았다. 뒤에도 몇 번이나 찾았지만, 그때마다 주인은 핑계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가격을 올릴 방도로 예쁘게 갈고자 좀은 정성스레 돌을 갈았다나. 그 후 부자가 다시 왔다. 주인은 허세 부리며 그 돌을 내놓았으나, 부자는 한 번 흘끗 보더니 그냥 돌아가 버리고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단다. 사실 열두 제자는 타고난 있는 그 모습 그대로를 지닌 평범한 이들이었다. 꾸밈이 있었다면, 굳이 선택되지도 부름을 받지 않았을 수도. 그러므로 주님 앞에는 언제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야만 할 게다. 감추고 싶어도 감추어질 게 없기에. 꾸미고 싶은 그 마음은 때로는 유혹이리라. 평범한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사도로 만드신 거다. 세상은 점점 지식, 스펙이 꾸며진 이들을 요구한다. 교회 내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이것이 복음적인 순수한 모습만은 아닐 수도.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 선발부터 인간적인 기준을 뛰어넘으셨다. 당신을 배반할 저 유다를 열둘에 포함시킨 것은, 분명 영원으로 가는 구원사의 한 신비라 할 수밖에. 성경은 이 부끄러운 신비조차 들추었지 숨기지 않았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부인하였으나 교회의 반석이 되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당신의 때가 가까이 오자, 원하시는 열둘을 사도로 손수 뽑으셨다. 이처럼 예수님 사명을 따르려면 먼저 함께 머물러야 했다. 그러고 나서 때가 되면 그분께서 파견하실 게다. 스스로가 선포자로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스승님께서 파견하시리라. 이런 과정도 없이, 어디 갑자기 사도가 될 수가! 그분 곁에 없던 이를 어찌 감히 말씀의 선포자가? 이렇게 사도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함께 머물러야만. 그러기에 이 시각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우리도 의로운 예수님 제자로 살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려면 먼저 그분 곁에 머무르는 게 필요하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예수님 곁에 머무르는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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