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3,20~2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3,21) 는 표현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대의 기본적인 사회구조는 주로 5가지를 주축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겁니다. 그 구조는 바로 ‘명예와 수치’, ‘보호제도’(=후원자), ‘혈연관계’, 개인적 ‘인과관계’ 그리고 ‘정-부정’(깨끗함과 불결함)이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며, 이것들은 상호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친척들의 행동을 지금의 잣대로 이해할 수 없지만, 당대의 문화와 그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충분히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혈연관계(=핵가족 중심이 아닌 가문)에서 한 개인의 명예-수치는 한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혈연을 맺은 가문의 명예-수치와 직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보호자-피보호자의 관련해서 손아랫사람을 지키고 돌봐야 할 의무와 함께 책임도 있는 것이기에, 더더욱 좋은 영이 아닌 더러운 영으로 말미암아 몸도 마음이 불결한 상태라면 자동적으로 격리와 분리를 통해서 당연히 정화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에 대한 이해와 몰이해는 곧 당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느냐 그렇지 않냐에 달려 있습니다. 친척들이 예수를 붙잡으려고 한 것은 그런 문화와 종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행위로 소위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고 먹칠을 한 일원에 대한 제재와 징계를 위한 조치, 곧 감금이나 격리 그리고 정화 예식을 취하려 했던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가출하신 예수님께서 이런 전통을 알고 계셨는데도, 제 발로 고향 집으로 가셨다기보다는 고향에서 가까운 어느 ‘친지 집’에 가셨으며, 이를 듣고서 친척 어르신들이 예수님을 붙들어 잡을 심산으로 몰려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통상적인 관념에서 보면, 결혼도 하지 않고 집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이처럼 다니면서 살아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더욱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삶이 정상 아닌 비정상으로 보였을 것이며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느끼지만 저는 미친 사람입니다. 또 남들도 저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제와 수도자는 본디 사람에게 붙잡히지 않고, ‘하느님께 미친 사람, 하느님께 붙잡힌 사람’입니다.
사실 삶을 제대로 살려면, 예술이나 스포츠는 물론 경제-과학-문학-의학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도 자신들의 분야에서 제대로 살려고 한다면, 자신이 하는 일에 미치지 않고서는 어떤 수준이나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친척들이 본 것은 잘못 본 것이나 틀리게 본 것이 아니라 제대로 보고 있다는 역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제정신이 나간 것, 얼이 빠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에 제대로 미친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생각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밤이고 낮이고 일하시고 기도하셨으니 친척들 눈에는 미친 것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게 당연하다고 보입니다. 그러니까 조금은 저속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미쳐도 제대로 미친 것입니다. 제대로 미쳐야 만이 자신의 분야에서 道人- 藝人-聖人으로 제대로 인정받는 세상이 아니던가요? 의사로 일가를 이룬 이들을 醫聖이라, 시인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을 詩聖이라, 음악으로 일가를 이룬 이를 樂聖이라, 바둑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을 棋聖이라 부르지 않습니까? 자신의 분야에서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어설프게 잘못 미치면 폐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미쳐 중독자가 됩니다. 약물, 도박, 알콜 중독자들처럼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친척들의 행위는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은 세상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파견된 존재로서 자신의 소명과 역할에 그만큼 철저하고 처절하게 사셨음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키십니다. 우리 역시도 그분처럼 자신의 소명과 역할에 미치되 제대로 미쳐야 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도인- 예인-성인 혹 의성-시성-악성-기성과 같은 존재가 되도록 자극하고 호출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우리 한번 제대로 하느님으로 미쳐 볼까요! ‘정민’ 교수가 저술한 「미쳐야 미친다.」는 책 제목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살고 싶은 것을 살 수 없고,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지 못합니다. 암울하고 척박한 조선 시대에 미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몇몇 깨어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어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의문에 길을 찾습니다. 『미쳐야(狂) 미친다(及). 미쳐야 이룰 수 있습니다. 不狂不及.』
“주님, 한편으로 당신을 붙잡으려 했던 친척들처럼 때론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하는 사람인가를 더 잘 깨닫게 해주심에 오히려 감사하게 하여 주시고, 그럼에도 주어진 현실에서 당신 은총에 힘입어 늘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저희에게 맡겨진 일과 당신의 뜻을 충실히 이루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