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31)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司徒) (로마11,13-2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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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1-20 | 조회수14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4. 1. 20. (토요일) 로마서31)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司徒) (로마11,13-24) 13 이제부터는 이방인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나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서 내가 맡은 직책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14 나는 내 동족 유다인들에게 시기심을 불러 일으켜 그들 가운데 일부나마 구해 주고 싶습니다. 15 그들이 버림을 받은 결과로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 졌다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다시 받아 주실 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었던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16 떡 반죽에서 떼낸 첫부분을 하느님께 드리면 그 반죽덩어리 전체도 거룩합니다. 또 나무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도 다 거룩합니다. 17 올리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가지 몇 개가 잘리고 그 자리에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를 접붙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접붙인 가지들은 올리브나무 원 뿌리에서 양분을 받게 됩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이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들입니다. 18 그러니 여러분은 잘려 나간 가지들을 업신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럴 생각이 날 때에는 여러분이 뿌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고 뿌리가 여러분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9 여러분은 '저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그 자리에 우리를 접붙이기 위한 것은 아닙니까?'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20 그것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그들이 믿지 않은 탓이고 여러분이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은 여러분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두려워할지언정 자랑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21 하느님께서 원 가지들도 아낌없이 잘라내셨으니 여러분들도 아낌없이 잘라 버리실 수 있습니다. 22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도 하고 준엄하시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여러분에게는 자비로우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하느님의 자비를 저버리지 않을 때에 한한 일이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여러분도 잘려 나갈 것입니다. 23 믿지 않았던 탓으로 잘려 나갔던 가지들이 믿게 되면 하느님께서는 그 가지들도 접붙여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에 잘라 내셨던 가지들이라도 다시 접붙이실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24 원래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였던 여러분이 잘려서 제 나무가 아닌 딴 좋은 올리브나무에 쉽사리 접붙여졌다면 잘려 나갔던 가지들이 제 올리브나무에 다시 접붙여지는 것이야 얼마나 더 쉬운 일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느님의 은혜로 결국 회복과 구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오로가 로마서 9장과 10장, 11장에 걸쳐서 하는 이야기지요.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문제를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은혜가 결국 이긴다고 해서, 너 은혜를 값싸게 생각지 마라. 은혜라는 이름으로 아무래도 좋다, 그런 마음이 풀어지고 무책임해지고 쉽게 생각하지 마라’ 하는 얘기를 합니다. 무얼로 하죠? 오늘 본 22절같이,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慈悲)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그의 인자(仁慈)가 대단하듯이 준엄(峻嚴)하심도 대단하다.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함이 있으니 하느님이 내칠 때를 봐라.’ 그러는 겁니다. 바벨론 포로를 이스라엘은 보았고, 지금 역사 내내 이스라엘이 흩어져 방황했던 역사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는 거죠. 하느님이 은혜를 베푸신다고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같이 아무 원칙도 없고 기준도 없고 질서도 없이 혼란과 그저 타협만 있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이 본문 속에서 이제 결론에 이르는 은혜 됨과 그 기억해야 할 준엄함이 오늘 본문의 요지죠. 은혜를 이해하기 위해서 제가 세 사람의 예를 들겠습니다. 첫 번째가 야곱입니다. 야곱은 야폭 나루에 서서 하느님을 만나고 복(福)을 구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어 그의 생애에 하나의 결과를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 속에서 얻게 됩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출발했었죠. 형 속이고 아버지 속이고 쫓겨, 외삼촌 집으로 피난 가던 길에서 어느 들판에선가 돌베게 베고 자는 그 자리에 하느님이 찾아오십니다. 꿈에 본즉 하늘의 사다리가 걸리고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중에 하느님이 나타나, “내가 너 누워 있는 땅을 너와 내 자손에게 주리라. 내 자손이 동서남북에 편만(遍滿)할지며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내가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와 함께 할 것이며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야폭 나루까지 이십년이 걸립니다. 그 약속 받고 이십 년을 인생을 살면서 결국 돌아와 야폭 나루에 섰을 때 야곱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기억하죠? 그는 그 많은 재물을 앞서 보내어 형 에사우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고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밤이 맟도록 야폭 나루에 서서 초조하고 불안하고 답이 없는 상황을 맴돌고 있을 때 하느님이 찾아오셔서 그와 씨름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성경적 표현으로 그렇게 돼있죠. 하느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 환도뼈를 칩니다. 많이 오해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하느님이 결국 씨름해서 안 돼서 그의 환도뼈를 쳐 그를 절둑거리게하자 거기서 항복하고 무릎 꿇어 복을 구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무엇에서 항복을 했을까요? 그의 생애를 산 모든 것이 결국은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그 환도뼈를 맞으면서 봤을까요? 아니면 씨름에도 불구하고 버티다가 하느님이 환도뼈를 치자 그 힘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무릎을 꿇었을까요? 그건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가 얻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힌트를 줍니다. 너는 사람으로 하느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겼었느니라. “하느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긴 사람, 이스라엘,” 풀리지 않는 이름이죠. 부모가 되면 풀립니다. 어느 한 사람과 호의적인 관계를 갖고 싶거든 그 자식을 칭찬하십시오. ‘자식이 범상치 않더구만!’ ‘무슨 소리야 공부도 못했는데?’ ‘훌륭한 사람들은 원래 공부를 안 해.’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 그 집에 가서 이렇게 얘기하죠. 아무개가 사람이 괜찮던데, 웬수를 만들고 싶거든 이 한마디 하면 돼요. "근데 왜 아들은 아버지만 못해." 그 사람은 끝이에요. 내 아들과 딸한테 뭐라 그래야 되는지 알았죠. 누구를 칭찬하고 싶으면, 호의적인 관계를 갖고 싶으면, 뭘 하라고요? "어쩌면 그런 아이를 낳았어? 당신 같지가 않아." 부모만이 가지는 마음. 하느님이 야곱에게 주는 이 칭찬입니다. 너는 나보다 낫다. 아무도 그리할 순 없죠. 우리 모두는 누구를 비교해도 불만이죠. 당신은 링컨보다 나. 무슨 소리 하고 있는거야. 링컨 보고 와서 나 닮았다고 그러라 그래. 우리의 자존심은 어느 위인도 어느 대단한 사람도 대등한 비교가 되는 것만으로도 섭섭하지만 자식에 대해서만은 늘 열등하기를 바랍니다. 그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씨름을 하고 환도뼈를 친다는 것은 부모만이 해본 거죠. 그건 아비만이 가지는 사랑입니다. 아비만이 자식을 매질을 할 수도 있고, 자식을 위하여 피 흘릴 수 있습니다. 누가 그 자리까지 내려오겠습니까? 하느님이 피조물에, 반항하는 피조물에 샅바를 잡고 그 살과 뼈를 치는 자리에 손을 넣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그게 은혜지요. 하느님만이 하시는 은혜지요. 야곱은 아마 하느님의 그 집어넣으시는 손길을 이렇게 항복했을 것입니다. ‘이 희망이 없는 인생에 하느님이 그의 거룩한 손을 넣으시다니’ 이것이 환도뼈를 부러뜨리는 하느님과 그 손길 앞에 항복하는 야곱의 성경 이야기입니다. 자신이 살아서 아무 낙이 없고 아무런 자랑이 없는, 정말 거품 같은 허망한 이 인생과 존재, 하느님이 그 거룩한 손을 넣으시다니. 이 환도뼈를 치는 장면이요, 야곱이 무릎 꿇는 장면이요, 하느님이 그의 이름을 묻고 복 주시는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게 은혜지요.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못난, 모두가 우리를 외면하는 자리, 아무도 손댈 수 없는 그 형편에 찾아 들어와 손을 넣으실 수 있는, 그리하여 우리를 그 가슴에 끌어안으실 수 있는, “너는 내 자식이다.” 라는 약속을 주시는 우리 하느님이시죠. 그게 은총입니다. 요셉에게선 어떻게 됐죠?. 요셉에선 기가 막힌 현실을 보았죠. 야곱에게서 인간의 진실이 나온다면 요셉에서는 하느님의 진실이 나오죠. 하느님의 일하심, 하느님의 의지, 우리의 소원과 타협하시지 않는 하느님, 우리가 원하고 우리가 상상하고 우리가 목적하는 것으로 타협하시지 않는 하느님, 그래서 늘 막막한 길을 걷는 것을 참아내시는 하느님, 요셉은 팔립니다. 그는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총리가 됩니다. 그리하여 누구를 구원하던가요? 그의 형들을 구원하고 그의 가족을 구하고 이스라엘을 구하고 스스로를 구하죠. 요셉에게서 우리가 보는 하느님의 은혜는 우리가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하느님의 능력을 봅니다. 야곱이 자신의 허망함과 진토(塵土)에 불과한 곳에 들어오는 하느님의 손길을 보는 인생을 사는 인간의 진실을 걸은 자라면 요셉은 꿈을 꿀 수 없고 뭘 만들어 낼 수 없는 그의 인생 속에 하느님이 그가 약속하시는 그가 목적하시는 영광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보이는 하느님의 진실로서 그의 인생이 존재하고 있죠.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파라오는 하느님을 대적하여 하느님의 일을 이룹니다. 그랬죠. 모세는 하느님의 부름에 쉽게 응하지 않습니다. 그런 가슴 아픈 과거가 있죠. 자기가 떨쳐 일어나 자기 민족을 위하여 분연히 이스라엘 편에 섰을 때 하느님이 외면하셨습니다. 광야로 도망가 40년을 다한 세월을 보내 늙어버렸습니다. 그제서야 하느님이 나타났고 그를 불렀습니다. 모세는 억울했죠. 그동안 뭐 하시다가 이제 와서, 하느님의 답은 뭐였습니까? “내가 내 백성 구원하려고 너 보낸다. 가라.” ‘제가 왜 갑니까? 무슨 수로 합니까?’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지팡입니다.’ “그거면 됐다.” 사목자들 모인 자리에서는 제가 약간 살짝 비틀어서 기가 막힌 예를 들었는데 도움이 될지 모르니까.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마누랍니다.’ “됐다.” 그렇게 했죠. 부부 외에는 교회를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까. 불쌍하냐고요? 아니요. 어렵죠. 불쌍한 게 아니라 어렵죠. 옆에서들 보고 있습니다. ‘저 교회는 아무도 없는데 언제까지 하나’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또 파라오 역을 할 것입니다. 파라오는 쉬운 결말을 못하게 계속 막아서 극을, 드라마를 더 풍성하게 합니다. 한 가지 재앙으로 끝나지 못합니다. 말을 안 들어서 열 가지 재앙까지 가서 하느님이 얼마나 크신가를 보이고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하느님이 이렇게 편을 드는가를 그려내는 데 쓰입니다. 그리함으로 파라오는 구원을 받습니다. 어떤 식으로 그리하여 인류를 붙잡고 있던 최고의 권세와 권력인 애굽이 깨지고 이스라엘이 탈출하자 그들은 최종 권력을 잃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주역이, 권력이 이스라엘에게 넘어감으로써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대로 전 인류를 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파라오는 기껏 자기의 역할을 해서 자신과 자기의 후손들을 구원하게 되는데 역할 자체는 악역입니다. 그러니 요셉에게서 뭘 본다구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래죠. 아는 만큼 하랍니다. 아는 만큼 하십시오. 하느님이 하시면 역전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진실입니다. 하나 더, 은혜에 관한 이해를 위하여 하나 더 예를 들죠. 탕자입니다. 아우는 아버지에게 자기 재산 달래서 나가 허랑방탕합니다. 그는 왜 돌아오지요? 그가 다시 돌아오는 이유가 뭡니까? 현실이 그를 집으로 몹니다. 굶거든요. 돼지먹이, 쥐엄나무열매라도 주는 자가 없어서 주립니다. 무슨 생각을 해요? 아버지께 가면 일꾼들도 풍성했다. 그래서 돌아옵니다. 아버지에게 못할 짓을 했다라든가, 이제 개과천선해야지, 이런 윤리적인 묘사는 없습니다. 현실이 뭡니까? 예수는 왜 믿냐구요? 인생이 답이 없어서 예수를 믿습니다. 가져도, 이겨도, 건강해도 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세상에 답이 없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들이 약속하는 모든 해결책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위하여 있습니다. 거기 자유가 있고 행복이 있고 모험이 있고 성취가 있다고 속입니다. 집에 있는 건 묶여 있는 것이고 억울한 것이라고 속입니다. 다 뛰쳐나갔죠. 거기서 말하는 것을 얻지 못해도 억울하고, 얻어도 허망합니다. 그게 하느님의 진실이죠. 현실 속에서 일하는, 현실은 하느님이 놔둬서 외면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도전이죠. 매일매일이 그렇죠. 외면할 수 없는 현실, 매일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면 살아야 되는 무서운 현실 앞에 쫓깁니다. 굶을 순 없습니다. 가장 쉬운 답은 죽는 겁니다. 죽어버리면 그만인 존재로서는 인간은 가치가 더 큽니다. 없어지는 것으로 답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그 많은 그 복잡한, 그 깊은 고뇌와 갈증과 기대와 욕구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그건 그저 자폭이지요. 하느님이 매일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얻은 것이 뭐냐? 네가 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뭐냐?” 라고 묻습니다. 그 말 앞에 우리들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확실히 알아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저들에겐 답이 있는 모양이야! 그렇게 교회를 찾아오지요. 그렇게 왔다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설교를 듣고 실망하고 가지요. 자기가 히어링이 안 되는 줄 모르고 이해가 안 간다. 그러고 가는 겁니다. 자꾸 들어야 돼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영어는 들어야 깨우친다. 우리가 다른데 답이 없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압니다. 현실의 진실입니다. 하느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답을 주고 안심을 주는 방식으로 일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하느님이 은혜를 베풀고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칩니다. 억울해합니다. 겁을 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겐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이 기본 원칙. (갈라6,7) 7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무서운 원칙입니다. 또 하나 있습니다. 묵시록 2장 23절, 티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 “너희 각자의 행위대로 갚으리라.” 무서운 선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칙으로 삼아, 반전과 기적과 역전을 이루십니다. 씨름 기술의 다른 모든 것은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뭐 쉬운 것 안다리, 바깥다리, 들배지기, 오금 당기기, 그 앞에서 하는 건데, 가장 놀라운 기술이 뭐죠? 뒤집기, 앞이 없고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원칙은 그의 성실(誠實)하심, 공의(公義)입니다. 공의로 그치지 않는다는 거죠. 공의를 무산시키겠다든가 공의를 타협하겠다든가 공의를 포기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공의를 놓고 엮으시죠. 은혜는 그 위에서 추는 춤이며 노래며 고백이며 탄성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로마서 9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런 말씀들이 가진 위력을 알아야지요. (로마9,16-18) 16 하느님의 선택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17 성서에는 하느님께서 파라오에게 '내가 너를 왕으로 내세운 것은 너를 시켜서 내 힘을 드러내고 내 이름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하려는 것이다'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18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또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도 하십니다. 하느님이 선(善)도 만들고 악(惡)도 만들었다. 그런 얘기 아닙니다. 원칙도 만들고 원칙을 풍성하게도 만드십니다. 하느님이 배제되는 경우와 공간과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그걸 우리 식으로 하면 원칙과 파격이 둘을 놓고 선택 사항으로 보입니다. 원칙을 지킬래? 파격을 지킬래? 그렇지 않습니다. 뒤집기는 앞이 있어야 뒤를 한다구요. 전이 있어야 후가 있듯이.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원칙을 무시하는 것이 없습니다. 원칙은 하느님의 신실(信實)하심입니다. 그의 신실하심이 공의를 만들며 정의를 만들며 질서를 만들며 법칙을 만듭니다. 그러나 그는 비인격적 개념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인격자로서 이 모든 일에 자비와 은혜를 베푸실 수 있습니다. 그 문제에서 우리가 자꾸 오해를 사지요. 하느님은 그렇게 만드시는 하느님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로, 그의 은혜라는 하느님의 개입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영광되고 자랑하고 감사하는 자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그 일은 로마서 11장에서 지금 이야기한, 결국 하느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라는 이 대원칙이 은혜의 동일한 주인이라는 것을 아는 그 마음을 가져야 11장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로마11,33-36) 33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심오합니다. 누가 그분의 판단을 헤아릴 수 있으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34 '주님의 생각을 잘 안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주님의 의논 상대가 될 만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35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36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 이 놀라운 고백은 무얼 의미합니까? 동으로 가면 서로부터 멀어지는 게 아니라, 동으로 갔더니 서에 서로 가더라. 지구만 한 바퀴 돌아도 아는 일입니다. 그렇죠. 하느님의 일하심에 그 정연한 신실한 원칙과 그 원칙이 원칙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것을 담는 자비의 무대가 되며 그것으로 하느님이 모두에게 복을 주시려고 한다는 사실 앞에 사도 바오로는 무릎을 꿇습니다. 어떤 원리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 앞에 말이죠. 창세기 22장에 가면 바로 이런 것을 이해하는 데 좋은 또 한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늘 오해되고 있는 사건,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는 사건입니다. (창세22,9-18) 9 하느님께서 일러 주신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거기에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은 다음 아들 이사악을 묶어 제단 장작 더미 위에 올려 놓았다. 10 아브라함이 손에 칼을 잡고 아들을 막 찌르려고 할 때, 11 야훼의 천사가 하늘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어서 말씀하십시오.'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야훼의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12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공경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13 아브라함이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뿔이 덤불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수양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아브라함은 곧 가서 그 수양을 잡아 아들 대신 번제물로 드렸다. 14 아브라함은 그 곳을 야훼이레라고 이름붙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 고들 한다. 15 야훼의 천사가 또다시 큰 소리로 아브라함에게 말하였다. 16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17 나는 너에게 더욱 복을 주어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불어나게 하리라. 네 후손은 원수의 성문을 부수고 그 성을 점령할 것이다. 18 네가 이렇게 내 말을 들었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네 후손의 덕을 입을 것이다.' 이사악을 바치라 하고 아브라함은 바치려고 했기 때문에 하느님이 그를 복을 줬다.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사악은 음미를 해야 됩니다. 백살에 난 아들입니다. 낳을 수 없는 아들, 이사악은 없는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기를 “네 자손이 하늘에 별 같고 땅에 모래 같으리라”고 했는데 자식을 안 줍니다. 네가 육체적으로 낳는 자손이, 네가 약속하는 자손이 아니고, 내가 만들 자손, 내 백성, 그래서 백살에 주죠. 네가 낳지 않았다. 그러나 이사악이 있으므로 또 한 번 더 확인해야 했죠. 기적으로 하느님이 네 후손을 약속한대로 하늘의 별 같게 하기 위해서는 결국 후손이 있어야 된다. 그가 기적으로 태어났지만 그 후손이 있어야 된다. 그 후손 잡으려는 거죠. 이사악을 잡는 거죠. 너에게 약속한 후손은 네가 낳아서 생물학적으로 낳아서 만들어지는 하늘의 별이 아니며 이렇게 이사악을 기적으로 낳기 때문에 그거 하나로 확인되는 거 아니고 이제라도 잡아라. 네 자손은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이사악 잡아라. (창세22,12) 12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경외(敬畏) 하는지 알았다. 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도 서슴지 않고 나에게 바쳤다.' 이 말이 그 말이에요. 이 아브라함이 ‘알아들었다’는, 이건 하느님이 만드는 일이에요. 이사악은 없는 거예요. 이사악은 태어나지도 않은 자일 뿐만 아니라, 태어난 다음에도 죽은 자예요. 이사악으로 인하여 후손이 생기는 것 아니고 하느님이 만들어주는 거예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이 생물학적 후손으로서의 선민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오늘 하는 성경의 증언이 그거죠. 은총이란 뭐냐? 은총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들은 하느님의 신실하심과 하느님의 일하시는 구체적인 증거들, 현실, 소원, 이런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만 그게 결과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만든단다. 야폭 나루에서 야곱의 역할은 뭐였더냐? 못 알아먹은 것 아니었더냐. 총리된 요셉의 역할은 뭐였냐? 억울한 것 아니었더냐. 탕자의 역할은 뭐냐? 배가 고파 몰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거 아니냐. 하느님이 함께 해야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요 아버지가 있어야죠. 훌륭한 아버지가 요셉을 총리로 만드는 아버지 하느님, 할아버지 아버지의 하느님, 하느님의 성실한 의지가 있어야죠. 능력이 있어야죠. 자비롭고 돌아오면 받아줄 아버지가 있어야죠. 그래야 당장 가 돌아오죠. 이사악을 주었으나 이사악이 없으면 일 못하는 하느님이 아닌 것 보는, 이사악이여야죠. 우리 자신이죠. 우리 이 중에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하느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현실이 야곱이든 요셉이든 탕자든 이사악이든 우리들의 결국은 하느님이 우리를 항복과 찬성과 감사로 결국을 이루실 것입니다. 신자(信者)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은혜(恩惠)를 베푸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깊은 감사(感謝) 속에서 우리의 삶을 자랑스레 순종하는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으니 더 이상 다른 표현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의 고단한 인생은 우리를 하느님의 은혜 가운데서 하느님의 영광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 명예를, 그 기적을 사는 줄 아는 자랑과 기쁨으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살아내는 귀한 인생들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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