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아픔을 겪어야만 새 삶을 / 연중 제3주일[나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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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 작성일2024-01-21 | 조회수228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아픔을 겪어야만 새 삶을 / 연중 제3주일[나해](마르 1,14-20)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시며 이르셨다. “때가 차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그리고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가시다가, 그물 던지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를 따라라. 내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따랐다. 그분께서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둘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도 아버지를 버려두고는 따라나섰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형제와 제베대오의 아들들을 부르신다. 이렇게 복음이 선포되기 시작할 때에, 이미 네 제자가 부름을 받았단다. 이들은 훗날 장차 열두 명으로 이루어지는 제자단의 구성원으로서, 예수님에게서 파견을 받고 그분의 사도가 된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도로 전도를 시작하시면서,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부르셨다. 부름에 응답하는 순종은 참 아름답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이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생전에 하신 설교만이 아닌, 그분 부활 이후에도 교회에서 계속되는 설교까지 종합하는 표현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은 회개와 믿음의 촉구다.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따라 나선다. 무엇이 그들을 선뜻 나서게 했을까? 아마도 그 부르심에서, ‘삶의 답’을 발견한 것일 게다. 세상이 주는 온갖 혜택은 편리하고 달콤하다. 그러한 것들을 어느 누가 감히 마다할까? 그런데도 그들은 끝내 포기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어부 생활을 청산했다. 이는 인간적 갈등 없이 가능한 일일까? 그들이라 해서 미련이 없었던 게 아니니라. 그랬더라면 모자라는 이일수도. 예수님 이끄심에 마음 비우고는 자신들보다는 그분 힘으로 살 것을 결심했다. 세속의 행복만 찾는 이에게는 결코 오지 않는 결단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부모 처자식을 버리고, 따라나섰다. 본당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싶지만, 인정해 주지 않거나 상처 준 신부 수녀님이 있기도 하다. 그래서 맘에 들지도 않는 그들이, 나를 알고 인정해 줄 때를 기다리는 이를 종종 본다. 그렇지만 그 때는 자신이 생각하는 조급한 때와는 좀 다르다. 하느님께서는 지나가는 우리 때가 아닌, 당신 충만함을 보이실 그 때를 물색한다. 물론 그 날 그 시간은 우리는 잘 모른다. 그래서 주님께서 섭리하시는 그 때를 기다리며, 믿고 맡기고 사랑해야 할 지혜가 필요할 뿐이리라. 사실 돈과 출세가 삶의 유일한 목표일 때는, 예수님을 선뜻 따라나설 수가 없다. 아무 조건 없이 이웃 사랑과 세상을 위해 봉사하라는 예수님의 그 가르침은,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들어도 너무나도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수 있기에. 그러나 현실이 그렇다고 하여 우리 신앙인들마저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세상은 어떤 희망도 없는 이기주의자들의 전쟁터가 될 게다. 누가 좀 더 갖고, 누가 더 많이 누리느냐가 삶의 유일한 목적이 될 수 있기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진리와 사랑이 승리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그 출발은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 모두가 속죄로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는 나에서 이웃 중심으로 옮기는 것이고, 삶의 방향을 당장 하느님 쪽으로 옮기는 것일 게다. 지금 나의 삶의 방향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또 살피자. 사실 저 은총이 함께하지 않으면, 사는 것조차 의당 힘들 수밖에. 삶의 방향전환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긴 아픔을 거친 결단이 있었을 게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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