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나해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마음의 평화를 원하면 절대 성령을 모독할 수 없다> 복음: 마르코 3,22-30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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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이들을 비판하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파견하신 이유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선물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 선물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결국 성령의 선물을 원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그분을 파견하신 아버지도 원치 않게 됩니다.
제가 며칠 전에 감기인 것 같아서 병원을 찾았습니다. 신자 분이 운영하는 작은 병원입니다. 수액이라도 맞으면 빨리 나을 것 같아서 놓아 달라고 했지만, 그분은 수액은 약을 입으로 먹을 수 없는 상황에서나 맞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린 터라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소화제나 감기약은 그냥 내가 약국 가서 사면 되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뒤에 코가 막히고 목에 가래가 끓었습니다. 열도 없고 몸살기도 없었습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나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주말에 미사를 드릴 때 목소리도 안 나고 콧물도 흐른다면 곤란할 것 같아 다시 병원에 가기로 하였습니다. 다른 병원에 가보라는 말들을 많이 했지만, 사무원님이 예약해주는 바람에 그 병원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진료를 매우 친절하게 다 해 주시고 미리 준비해 놓으신 선물도 주셨습니다. 영양제와 방향제까지 있는 모든 것을 한 꾸러미 주셨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요?”라고 했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께서 저를 믿어주셨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난번에 약간 실망한 눈빛으로 돌아간 것이 그분도 마음에 걸리셨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여기서 삼위일체 신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그리스도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내려준 처방으로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약과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약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떨까요? 병원에 갈 일도 처방전을 받을 일도 없습니다. 약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내가 가서 처방전 없이 구할 수 있는 약들을 살 수는 있습니다. 물론 의사가 처방해 준 것보다 더 좋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약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병을 고칠 희망은 있습니다. 하지만 약에 대한 희망이 믿음이 없다면 처방전도, 의사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습니다.
약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의사를 만나게 되고 처방전도 받게 됩니다.
제가 살면서 바랐던 것은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였습니다. 죽으면 구원될 수 있다는 의로움,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 없이 살고 싶어서 기쁨과 평화를 원했습니다. 행복을 원한 것입니다. 성당을 다니며 어느 정도는 이런 것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사.시.를 읽으며 더 큰 평화를 얻었습니다. 그런 책을 읽을 때 나에게 들어오시는 성령의 힘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성령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신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베푸시는 성령의 맛으로 우리를 당신께 이끄십니다. 그러나 행복이 성령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께 가겠습니까? 약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처방전을 주는 의사도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의사는 욕해도 약은 욕하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뮤지컬 ‘라만차의 기사’에서 돈키호테는 산초를 시켜 자신의 마음을 편지에 담아 알돈자에게 전해줍니다. 알돈자는 사실 둘시네아, 곧 자기 나라의 공주란 내용입니다. 알돈자는 그것을 그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 산초를 믿지 않더라도 그 편지 내용 만이라도 믿는다면 그 편지를 보낸 돈키호테를 믿게 됩니다. 하지만 편지를 믿지 않으면 그것을 가져온 산초도 믿지 않는 것이고 심지어 그 편지를 산초에게 보낸 돈키호테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돈키호테는 하느님 아버지, 산초는 성자, 편지는 성령이 되십니다.
성령을 거부하면 다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마음의 평화를 원합시다. 그러면 성령을 만나게 될 것이고 성령을 만나면 그분께서 오시는 원천인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을 만나지 못하면 그리스도가 의미를 잃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게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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