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사제 김재덕 베드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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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1-22 | 조회수317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2024년 01월 22일 월요일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오늘의 묵상 (사제 김재덕 베드로)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베엘제불이라는 말은 ‘파리들의 주님’ 또는 ‘쓰레기의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악의 실체는 더러움입니다. 더러움을 주님으로 모시게 만드는 것, 이것이 “마귀 우두머리의 힘”이 거두는 열매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결코 영혼을 더럽거나 추악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악의 지배에서 해방시키시어 다시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여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였을까요? 마르코 복음서는 그 이유에 대하여 침묵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한 가지 실마리를 줍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오늘 복음 장면이 있을 때까지 예수님의 활동 무대는 갈릴래아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분에 대한 여러 평가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직접 겪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라는 그들의 말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실제로 알지 못한 채 한 말이었습니다. 직접 겪어 보지도 않고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만 듣고 더 나쁘게 평가하는 마음이 율법 학자들의 생각을 지배하였습니다. 우리도 이따금 이와 같은 유혹을 받습니다. 내가 잘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누군가가 험담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을 겪어 보지도 않고 더 나쁘게 말하고 싶어집니다. 더욱이 험담하는 자리가 교회의 봉사자들을 향한 자리라면, 어쩌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 학자들과 비슷한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봉사자들을 움직이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기 때문입니다. (정말 다 그런가요?)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며, 율법 학자들과 똑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는 슬기로운 신앙인이, 언제나 하느님 편에 서 있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재덕 베드로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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