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성령 모독은 구제 불능 / 연중 제3주간 월요일(마르 3,22-30)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저런 말을 하는 이는 지금까지도 없었다,” 이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매우 궁금해 하면서 한 말이다. 당시 정통성과 권위를 가졌다는 이들에게는 의당 수치스럽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리라. 도대체 그분 자체가 한갓 시골 나자렛 출신인데다, 제자들도 기껏해야 고기나 잡는 어부들이요, 동족들에게는 따돌리는 세리였기에. 더군다나 갈릴래아란, 예로부터 ‘이방인들의 지역’이요, 먼 변방의 멸시받던 곳이었으니까. 사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었고, 그분 기적은 예사롭지가 않았다. 율법 학자들은 그 능력이 아예 하늘에서 왔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자신들의 체면과 권위가 결코 손상되지 않으려면, 사람들에게 뭔가 그 나름으로 답을 주어야만 했을 게다. 그래서 그들이 고작 찾아낸다고 한 그 답이, 예수님은 베엘제불이라는 마귀 들린 이이고, 이 마귀 두목의 힘으로 기적을 행한다는 것이었다. 예수님 구원 활동을 악마의 짓거리로 몰아세우는 저들의 위선을 보라. 그 말대로라면 예수님은 어둠을 통해 어둠을 쫓는다는 것인데, 이는 불가능하리라. 어둠에 어둠이 겹치면 암흑 천국이리라. 어둠을 사라지게 하는 건 ‘빛’이다. 유독 그 빛만이 어둠을 물리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이르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더냐?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기 어렵다. 또 집안이 갈라서면 그도 버티기 어려울 게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그러시고는 예수님께서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꺼내신다. “너희들이 짓는 죄와 나를 모독하는 것은 용서받는다. 그러나 성령 모독은 용서는커녕 영원한 죄에 매인다.” 이는 그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했기에.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신성 모독을 포함한 그 어떠한 죄도 용서받을 테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한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성령 모독은 구제 불능이란다. 성부와 일체인 신성 모독은 관두고도, 어찌 이 성령 모독죄만큼은 용서가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결국은 어떤 것일까? 사실 자비의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와 함께하는 그분 자비를 의심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가 될 것이다. 하느님 자비를 거부하는 게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기에. 결국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그 용서마저 거부하는 거다. 모든 이를 용서하시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자비를 저버리고 모독한다면, 스스로 믿는 이임을 포기한 거다. 어쩌면 예수님 시대에는 신성 모독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내뱉는 죄스러운 말들에 대해서는 그리 단죄하지 않으셨다. 다만 그분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수행하는 것에 대해, 감히 입에 담기 어려운 사탄의 행위로 단정하는 것은 죄라 분명히 이르셨다. 교회가 수행하는 선한 일들을 철두철미하게 부정적으로 귀결 짓는 이들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거다. 그들은 결국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용서의 손길을 거부한다. 하느님 숨결인 성령의 도움마저 저버리고 성령께서 하시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하는 자야말로 어둠의 자식이다. 그들은 어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게다. 우리 모두 이 어둠에서 벗어나 빛과 함께 나아가자. 그것도 큰 빛을 찾아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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