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1월 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마르 16, 15 ~ 1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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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 작성일2024-01-24 | 조회수458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16,15) 오늘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6,15) 는 주님의 마지막 권고를 자신의 존재 이유로 받아들이고 살았던 복음 선포자 사도 바오로의 회심 축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를 오늘 아침 성무일도 즈카리야 후렴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의 박해자였으나 하느님이 선택한 도구가 되었도다.』그렇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독서 사도행전에 의하면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지만, 이 열성은 하느님을 향함이 아니라 자신이 그릇되게 믿어 온 신념과 그로 인해 독선에서 나온 열성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사람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그리스도인을 지칭)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던” (사224) 인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려던 그 열성이 이제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열성으로 바뀜이 바로 회심의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릇 회심한 사람이며, 그런 점에서 사도 바오로는 모든 회심자인 그리스도인의 원형이며 모델입니다. 그의 회심의 여정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체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체험은 그가 바닥에 쓰러졌을 때,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사22,7~8)라는 대화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습니다. 어둠이 아닌 빛으로, 거짓이 아닌 진리로,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손길과 섭리로 말미암아, 사울에서 바오로로 신적新的 거듭남을 통해서 그는 박해자에서 하느님의 사도로 뽑힌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니아스의 입을 통해 바오로의 회심과 소명의 이유를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22.14 ~ 15) 고 결론짓습니다. 하나니아스는 단지 바오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무엇보다 하느님의 선택과 파견의 뜻을 수용하기 위해 보고 들음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선택에서 파견을 수용하고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증인으로 파견되기 이전에, 무엇보다 먼저 사울이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울을 부르시고 선택하셨다, 는 사실에 대한 자각입니다. 흔히 하느님의 부르심과 선택받기 위해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 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2, 17) 그렇습니다. 사울이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울을 선택했고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았음에 감사하면서 바오로가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우리 역시도 유대인의 고정 관념처럼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으로 우리는 믿음과 사랑의 응답으로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니아스는 사울에게 이렇게 담담하게 권고합니다.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22,16) 이렇게 자신을 선택한 놀라운 은총에 감사하면서, 자신을 선택하시고,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22,15) 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보고 들은 것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깨달은 바를 실행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증거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파견 선포의 핵심입니다. 다만, 파견을 위한 준비 기간, 곧 숙성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 기간 하느님의 말씀을 보고 맛 들여야 합니다. 마침내 바오로는 그렇게 그 기간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듣고 맛본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으로 파견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와 탁월한 선택은 훗날 사도 바오로의 생애를 통한 복음 선포 여정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가 분명 하느님의 훌륭한 도구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다마스쿠스 여정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과 자비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은총 체험으로 바오로는 “이롭던 것들을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기며” (필3,7~9참조) 온 세상을 다니며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우리는 박해자는 아니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을 향해 온전한 회심의 삶으로 우리도 하느님의 도구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나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노라.” (영성체송)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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