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36) 하느님의 진노(震怒) (로마12,14-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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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1-25 | 조회수36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4. 1. 25. (목요일) 로마서36) 하느님의 진노(震怒) (로마12,14-21)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15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십시오. 16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십시오. 그리고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18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19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20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 21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내용을 로마서라는 전체 서신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 그 말이 갖는 의미를 ‘그러니 이제부터 도덕적인 삶을 살자.’ 그렇게 갖다 붙이면 안 됩니다. 여기에 있는 것들은 당연히 해야 되고 예수 믿는 사람은 더 해야 되는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악한 사람들과 마주쳤을 때 착하게 굴어서 그들을 감동시켜야 된다 그런 얘기도 아닙니다. 이것은 12장에 들어오면서 시작한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시오.’, ‘삶으로 드리라’로부터 출발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이 기뻐하는 산 제물, 삶으로 드리는 제사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다만 이해거나 관념이거나 이상이거나 진심이라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바쳐지는 한 인생이란 말입니다. 이 몸뚱아리를 가지고 살아내는 그런 영광된, 시간과 공간에서 드러나는 구체적인 인격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 얘기들을 하면, 누구 가까운 사이에 하면, 어떤 전제 속에서 얘기를 하느냐 하면, 친한 존재, 친하다는 것은 그와 여러 시간과 경우를 함께 보내서 아는 자이기 때문에 대화가 가능하죠. 그런 걸 제일 많이 누릴 수 있는 대상이 고등학교 친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쟤는 원래 그래.”를 아는, “쟨, 늘 반대야!” 그걸 아는, 그 정도, “저건, 늘 우겨!” 그래도 왜 만나죠? 많은 경우를 같이 섞여 있어서 어지간한 것으로 분리될 수 없는 관계가 성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만 좋은 말을 하고 멋진 말을 해서 친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삶으로 바치라는 것이 갖는 그 의미를 이렇게 말씀드렸죠. 이미 완료된 구원을 내 인생에 적용해보라. 누려보라. 이렇게 했습니다. 절대 실패하지 않고 손해 보지 않을 운명을 구체적으로 살아 누리라. 즐기라. 해보라. 이렇게 권했습니다. 근데 그 문제를 위해서 2절에 당장 이렇게 나왔었죠. 12장 2절이, ‘그러니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시오.’ 가 그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이 어떻게 영광스러운가 살아가면서 거듭거듭 확인하고 즐겨라. 그런 얘기죠. 그리고 3절에 들어오면, 그러니 그 구체성을 알라입니다. 3절은 특별히 읽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 한계가 있다는 거죠.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생각지 말고 우리가 분명하게 아는 건 나밖에 없습니다. 너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나는 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분명한데, 분명하다는 건 다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내가 나 아닌 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땐 미쳤었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까지 나죠. 생각 없었던 나까지 나죠. 그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너는 다릅니다. 너는 왜 그러냐를 우리는 사실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너를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이 유명한 복음성가 아닙니까? 왜 얘기를 할까요? 하느님, 왜 성경이 이 얘기를 우리에게 할까요? ‘네가 작가가 아니다. 너는 배우다. 니 역할을 해라.’ 쭉 이어 나오는 오늘의 얘기입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멧살라 얘기예요. 벤허는 누구 얘기죠? 벤허 얘기죠? 그죠? 아니요. 예수 얘기입니다. 예수 얘기를 벤허 인생에 담아내는 거죠. 어떻게 담죠? 그의 인생을 우리가 공감하는 거죠. 그의 지위, 그의 현실을 보고 그의 억울함을 공감합니다. 거기에 예수가 담기는데, 예수는 등 모습만 한 번 보이고 다 입니다. 벤허를 보지요. 벤허의 인생이 뭘 담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보이는 내용을 담아내려면 공간을 만들어야 됩니다. 컨텍스트(문맥, 배경)라고 할 수 있죠. 거기에 누가 등장해야죠. 그 공간이 화음을 낼, 그 내용을 담을 그릇이 만들어지느냐? 멧살라죠. 촬영하다가 멧살라를 죽여버리면 안 되죠. 그 얘기입니다. 멧살라는 남우조연상을 받습니다. 찰턴 해스턴은요? 주연상 못 받았습니다. 누가 주인공이고요? 찰턴 해스턴이 주인공이죠. 멧살라가 없으면 벤허는 내용을 담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알다시피 멧살라가 죽으면 끝나는 게 아닌 영화라는 것쯤은 알죠? 그 얘기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으악! 아닙니까? 제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는데, 으악! 그거는 양보하고 용서하고 희생하고 신앙적인 그런 거 아니고, 신앙적인 분별인 것입니다. 저 사람과 나로 하느님이 뭘 담는다, 만들어낸다. 난 내 역할 한다. 그거죠. 전부 그 얘기를, 20절에 가서, “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렇죠? 멧살라 나 배고파서 나 촬영 못 하겠다 그러면 빨리 뭐 사줘야죠. 사주고, “자 해~ 빨리, 자, 자, 자, 욕해!” 그래야 되는 거 아니에요?. 생각을 해보세요. 이 못 알아듣는 표정은 왜 한 번도 변화가 없을까요? 그런 차원으로서 인생과 역할을 이해할 수 없으면 그리스도교는 다만 거짓말이 됩니다. 어떤 거짓말? 명분에 매인 추상명사에서 그치고, 자기 인생을 살아낼 수가 없게 됩니다. 인생은 억울합니다. 벤허가 억울하죠. 그런데 멧살라를 죽여 갖고는 답이 안 나오더라는 거 아닙니까?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까 철 없을 땐 멧살라 끝나면 나가요. 멧살라 죽으면 나간다니까. 영화가 안 끝났는데, 왜 계속되는지 이해를 못하죠. “그분의 이 말씀이 내 가슴에 있던 칼을 놓게 했어.” 못 알아듣지요. 광고도 전차 경주고, 보는 것도 전차 경주, 벤허면 전차경주지요. 예수가 담긴 줄 모르죠. 우리 스스로의 인생이 그런 겁니다. 인생을 살아서 제 나이쯤 오면, 두 부류로 나뉩니다. 원망과 분노만 남는 사람과 웃음과 감사가 남는 사람으로 양분됩니다. 이 웃음과 감사로 남는 것은 그리스도교 이외에서는 만들 수가 없습니다. 가장 잘해야 체념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생을 명예로, 영광으로 허락했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그의 인생을 웃을 수 있습니다. 이게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죄와 죽음에서 꺼내어 하느님의 자녀의 자유 곧 영광의 길로 불렀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가 선택권인 줄 알고 있습니다. 선택하는 특권, 실존주의자들이 얘기하는, 인간에게 아무 가치는 없고, 그래서 내가 할 것이냐 말 것이냐가 유일한, 고유한, 특별한 권리라고 그러는데, 인간의 선택은 다 못 난 것입니다. 왜요?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대의니 명분이니 어떤 가치를 갖다 대도 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결국 거짓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하는 거지요. “너희는 부활할 것이다. 내 앞에, 내 나라에서 살 것이다. 예수 안에서 내가 그거를 완성했다. 그는 결단코 취소되거나 번복되지 않는다. 그러니 너 땡겨서, 구체적인 인생이 주어진 자리에서, 그 영광의 인생을 살아 보라.” 그게 자유입니다. 우리가 만들 수 없었던 길, 우리가 알지 못했던 길, 망하고 더러운 길로부터 영광과 명예의 길로 부르신 것 그게 자유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전부 뭐라 그랬어요?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이것은 무슨 정치, 경제, 사회를 다 고쳐서 완벽한 사회를 만드는 기능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각각의 명예로운 덕목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네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에서 명예로운 일과 영광된 일을 해라. 네가 할 수 있는 것 해라. 영광을 택하라.” 그 얘깁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게 당장 이거죠. “분노하지 마라. 보복하려고 하지 마라. 악한 역할을 맡지 마라. 그들에게 보복하기 위하여 니가 맡은 명예로운 길을 포기하지 마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러는 것입니다. 알아들으십니까? 우리가 무슨 인생을 살고 있는지 우리가 맡은 역할은 벤허입니다. 노예선에 있으면 섭섭하겠지만, 그것이 벤허를 만듭니다. 멧살라를 죽여서 얻을 수 없는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 일이 없었으면, 억울한 일이 없었으면, 그저 등 따시고 배부른 것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놔두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사형통하고 자존심 세우는 걸로 끝내지 않는다. 그게 구원이지요. “거짓된 인생 살게 하지 않는다. 일회용으로 놔두지 않는다. 너는 내 창조물이다. 내가 하느님인 것 같이 너희는 내 자녀라는 영광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쳐들어오신 것이죠. 예수입니다. 신명기 28장에 가면, 이런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신명28,1-6) 1 그러나 너희가 만일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어,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그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땅 위에 사는 만백성 위에 너희를 높여 주실 것이다. 2 너희 하느님 야훼의 말씀을 순종하기만 하면 다음과 같은 온갖 복이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 3 너희는 도시에서도 복을 받고 시골에서도 복을 받으리라. 4 너희 몸의 소생과 밭의 소출과 소 새끼나 양 새끼 할 것 없이 너희 가축에게서 난 모든 새끼가 복을 받으리라. 5 너희 광주리와 반죽 그릇이 복을 받으리라. 6 너희는 들어 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리라. 더 길게 있습니다. 집에 가서 읽어보십시오. 그 뒷부분에는 경고가 있습니다. 말을 듣지 아니하면 이런 벌이 내릴 것이다. 제가 말년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원망하고 분노하는 자와 감사하고 기뻐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만이 이걸 만들 수 있다고 했는데, 제가 이제 도달한 이 은혜의 자리에서 돌아보면 과거 모두가 감사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지 않는 인생에는 원망밖에 없습니다. 성공한 것도 저주고, 그때 잘한 것도 그것도 벌입니다. 돌아와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나중에 나이 들어 얼굴에 노기를 띠고 있는 것은 잘못 온 것입니다. 그것은 억지로 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 인생 모두에 복을 줬다는 걸 알게 됩니다. 약한 것, 무지했던 것, 실수했던 것들도 다 오늘의 나를 만들고 하느님이 그 속에서 당신의 영광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예수를 믿으면 첫 번째 감동자가 자기 자신이어야죠. 그게 넘치지 않고, 쥐어짜서 나눌 수는 없습니다. 그 일이 일어납니다. 재밌어서 웃는 것을 코미디라 그럽니다. 넉넉해서 웃는 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가져서 넉넉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십계명에도 나타나듯이, 또 에페소서를 제가 예를 들었듯이,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은 다만 윤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도둑질하지 말라는, ‘내 필요를 옆에 사람 걸 훔쳐와서 채울 필요가 없다.’ 그런 얘기라고 했죠. 그건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을 하느님에게서 받지 못하면, 돌아다니면서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살인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는 말이죠. “악으로 악을 갚지 마라. 그거 할 필요 없다. 넌 네 길 가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 위협과 시험 앞에서 분명하게 확인하시오. 멧살라를 죽이지 마십시오. 당신의 길을 가십시오. 우리가 가진 아무것도 아닌 조건에서 어떤 명예와 어떤 영광과 어떤 위대함을 할 수 있는가를 보시오.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로 소개된 것은 다 성품적인 것 아닙니까?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오래 참음과 성실과 온유와 절제. 그럼 보통, 나쁜 조건 하에서 더 하기 좋지 않나요? 가진 조건 하에서 할 수 있는 것보다 나쁜 조건에서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에게 조건이 부족한 것은 없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돌아와 본문에 와 보십시오. 이게 무슨 이야기들인가 구체적으로 볼 수 있죠. 본문 로마서 12장 15절에 와서,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가 속이 상해서, “아 지금 나라가 이 꼴인데 뭘 웃어?” 그러지 말라구요. 그 사람 웃을 이유가 있다니까. 그 사람을 공감해주고 그 사람의 지위와 그 사람의 형편을 넘겨주라고요. 다 나한테 붙들어 매지 말라고요. 나한테 붙들어매서 이 나라에 태어난 것이 싫고, 지금 이 사건이 싫고, 이 형편이 싫고, ‘그렇게 갖다 떠 넘겨서 분노하고 원망하느라고 자기 삶을 살지 못하는 시험에서 벗어나라’ 그겁니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싱글벙글할까? 좋은 일이 있어서겠지요. 웃어야죠. 저 사람은 왜 울까? 슬픈 일이 있겠죠. 어떻게 다 알겠어요? 그러니 16절에 나오는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십시오. 그리고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네가 작가가 아니다. 너는 배우다. 네 역할을 해라. 아니 이렇게 하다가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이렇게 하면 어떻게 돼? 벤허가 노예선에 쫓겨가면 막 그 역할을 맡은 배우가, “아니 이러면 어떻게 돼? 이러다 죽으면 어떡할라고.” 그래요? 그러냐고? 이걸 알아야죠. 작가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는 전능하시며 거룩하시며 자비를,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뭘 겁을 내는 거죠? 신앙이 없는 거죠? 한꺼번에 생기지 않습니다. 그 기본으로 알고 있어야 됩니다. 이런 성경의 권면들이 갖는 전제를 알고 있지 않으면 이것은 다만 매뉴얼이 되고 맙니다. 그럼 안됩니다. 그러면 얼굴에 웃을 기회가 사라집니다. "스위치 안 올리고 뭐해!" 이렇게 됩니다. "기도 안하고 뭐 해!" 이렇게 됩니다. 그건 아니에요. 이런 신앙적인 권면을 하는데 노기를 띠어서는 못씁니다. 안 그렇습니까? 넉넉해야죠. 충청지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아버지 돌 굴러가요.” 그리스도교 신앙이 뭘 조건으로 하고 있으며 어떤 존재 속에서 이런 말들을 하는지를 깊이 다지지 못하면 그러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이런 말들이 갖는 뜻을 알겠죠? 그건 우린 모릅니다. 저 사람 왜 저런지 모릅니다. 북한이 어떡하려 그러는지 우린 모릅니다. 제가 답답해서 빨리 죽어서 가서 김정은을 만날 작정입니다. 그러니 이건 주제넘은 짓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책임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성경에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결론은 하느님이 내실 것입니다. 잘잘못의 차원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구원의 기적과 신비와 은혜와 자비의 대단원의 막이 내려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네 원수가 굶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하므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악한 일에 시험 받아서 내 역할을 집어 던지고 뛰어들어가 보복하려고 하지 말고, 그래서 니 인생을 집어던지는 일일랑 하지 마라’ 그겁니다. 필리피서 2장에 가면 이 문제를 이렇게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현실 속, 우리 현실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필리2,12-14) 12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함께 있을 때에도 언제나 순종하였거니와 그 때뿐만 아니라 떨어져 있는 지금에 와서는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13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14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을 하거나 다투지 마십시오. 이게 ‘원망과 시비 없이 하고 두려움으로 하라. 하느님의 진정성을 인정하라.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을 인정하라.’ 그겁니다. 쉽게 생각하지 마라.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하느님의 지혜를 놓치지 마라. 하느님의 성실하심을 놓치지 마라. ‘니가 보기에 안 될 것 같으냐? 니가 보기에 이거는 잘못된 것 같으냐? 니가 무슨 조건이 부족해 보이냐? 너 하느님이 예수 보냈다는 사실 잊지 마라.’ 그게 두렵고 떨림으로 옵니다. 공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아느냐? 너 잘 살아라. 너 잘 살아라. 너를 위하여 온 세상과 역사가 있는 셈이란다. 잘 살아라. 상대방도 그렇단다. 너 잘 살아라. 알아들으시겠죠? (필리2,15-16) 15 그리하여 여러분은 나무랄 데 없는 순결한 사람이 되어 이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십시오. 16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키십시오. 그래야 내가 달음질치며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놀랍죠? 아브라함이에요. 이게 아브라함을, 우리 잘 외우는 대로 이렇게 제가 외울게요.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창세12,2-3) 그는 나그네로 인생을 살아요. 그쵸? 나그네 인생이에요. 그러나 그가 복이에요. 그가 거기 가는 게 복이고, 그를 만나는 게 복이에요. 그와 사귀는 게 복이고 그의 존재가 복이에요.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우리는 세상의 빛이에요. 우리를 축복하는 자 하느님이 복 주시는 존재로, 우리를 저주하는 자 하느님이 저주하는 자, 우리를 외면하는 것이 그들에게 벌이에요. 우리를 보고 놀라야 돼요.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나누어야 돼요. 그럼 예수님이 오신 것 같이 감추어져 있어요. 세상이 주장하는 가치들이나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지 않고 속에 감추어져 있어요. 그러나 빛을 감출 수 없듯이 이 거스르는 세대 속에 어두운 세상 속에 한 줄기 빛으로 걸어가는 거래요. 누비고 사는 거래요. 아브라함 같이 말이죠. 남의 얘기 아니고 우리 얘기예요. 그 인생을 사는 거죠.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너 영광된 길을 걸어라. 명예로운 길을 택하라. 악역 맡지 마라. 걔네들하고 싸우느라고 니 길 망치지 마라. 니 명예를 살아라. 너 충분히 가지고 있다. 예수가 널 위해 죽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하며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지 그리고 우리는 심판하거나 단죄하기 위하여 서 있지 않고 영광의 길을 걸어가도록, 펼치도록 되어 있다는 것도 확인합니다. 그러니 이후, 이 시간 이후로 우리의 삶을 과연 믿음을 가지고 이겨나가는 영광의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곳이 복된 곳이며 우리가 복이며 하느님의 임재와 나누어주시는 하느님의 손길인 것을 아는 자의 명예를 안고 사는 참으로 충성된 인생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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