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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37) 하느님의 권위(權威) (로마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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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26 조회수336 추천수1 반대(0) 신고

로마서 13장 바울의 지혜

 

2024. 1. 26. (금요일)

 

로마서37) 하느님의 권위(權威)

 

(로마13,1-5)

1 누구나 자기를 지배하는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은 권위는 하나도 없고 세상의 모든 권위는 다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3 통치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나 두려운 존재이지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통치자를 두려워하지 안으려거든 선을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에게서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4 통치자는 결국 여러분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는 공연히 칼을 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느님의 벌을 대신 주는 사람입니다. 5 그러므로 하느님의 벌이 무서워서뿐만 아니라 자기 양심을 따르기 위해서도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위들에게 복종하라고 합니다. 권위는 하느님으로부터 나지 않은 것이 없고 하느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위에 있는 권위에 복종하랍니다. 교회사 속에서 늘 등장했던 승자가 진리다. 승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거다.’라는, 그런 이해의 근거처럼 사용되었죠.

그러나 이 말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를 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선을 행한다는 그게 무엇이냐는 우리 다 알고 있습니다. 새 생명이고 진리고 하느님의 뜻이고 그렇습니다. 그걸 어떻게 행할 것이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에서 이제 이 권위가 등장합니다.

승자가 정의가 아니고, 권력이 정의가 아니라면, 그러면 권력이나 통치나 힘 같은 것은 무엇을 위하여 있는 것일까요? 통치자가 국민을 위해서 있어야 된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일입니다만, 그런 경우는 인류 역사에 별로 없습니다. 그럼 엎으면 잘 되냐? 엎고 나면 또 똑같아지곤 했던 게 인류 역사의 반복입니다.

이 문제를 성경은 선을 행하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등장을, 예수님의 성육신을,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 44절에서 이렇게 뜻밖의 관점을 가지고 서술합니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때가 차서란 뭘까요? 전후가 있다는 것이죠. 그걸 뭐라 그러죠? 문맥이라고 합니다. 그가 웃었다. 그러면 알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웃는 그림을 그려라. 그러면 눈이 밑으로 둥그렇고 입이 위로 둥글한 그림을 그려놓는 것이 웃는 것입니다.

문맥을 보면 웃는다는 여러 가지로 쓰입니다. 웃는다. 기뻤다. 맨 먼저 떠오르는 텍스트겠죠. 웃었다. 분노했다. 이게 다른 표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웃는 건 뭐가 있습니까? 문맥이 있어야지요.

예수님의 성육신은 약속됐고 오시기까지 구약 역사가 있습니다. 그거 없고 예수님 오셨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라는 전후가 있듯이, 그 문맥을 형성하듯이, 공간적 틀을 만듭니다. 무대이기도 하고 내용을 담는 그릇이기도 한 것, 구조, 체제, 조직, 관계, 같은 것 말입니다. 그게 여기서 말하는 권위입니다. 모든 컨텍스트(문맥)는 내가 만들었다. 그 안에서 텍스트(이론)를 담아내라. 그런 얘기입니다.

제가 말하는 콘텍스트(문맥)는 전문적으로 쓰는 콘텍스트와 좀 더 다릅니다. 왜요? 성경을 얘기하려니까 문학에서 얘기하는 컨텍스트 갖고는 다 담을 수 없죠. 문맥일 뿐만 아니라 조금 전에 얘기한 것 같이 그릇이 되기도 하고 무대가 되기도 하고 그때 어떤 형태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봤습니다. 이 돌들을 명하여 빵이 되게 하라.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내게 절하라. 그건 다 뭘까요? 컨텍스트 속에 들어오지 말고, 컨텍스트 밖으로 나가라는 요구입니다. 그리 아니하겠다. 무한이라는 내용이 제한인 것 같은 컨텍스트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그의 공생애입니다.

왜 그래야 하죠? 우리는 로마서 12장에서,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로부터 출발한 구체적인 현실적 신앙생활을 권면 받고 있습니다.

산 제물은 뭐라고요? 산 제사는 삶으로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우리는 그 삶을, 그러니까 자꾸 종교화하죠. ‘기도, 성경 읽기, 교회 가기라고 특화되지요. , 24시간, 실전 전체를 바치는 방법은 잘 모릅니다. 교회 갔을 때는 교회에서 하는 일에 참여하고 열심을 내면 그것이 종교 행위인 것 같고 돌아오면 어쩔 줄 모르고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종교 행위에 할애하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얘기합니다. 삶 전체가 하느님께 바쳐져야 되는데, 임무가 그것이 되라는 게 아닙니다. 삶이라는 것, 우리가 하찮게 여기는 모든 것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처럼 그런 삶이라는 콘텍스트 속에 내가 믿고 고백한 텍스트를 담는 구체적인 것이다 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죠.

뭘 구별하라 그래요?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그래요. 컨텍스트를 바꾸는 것이 텍스트를 빛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릇이고 내용을 담아야 됩니다. 우리가 내용입니다. 우리의 몫,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 생명, 이제 알게 된 진리, 우리의 자유들이죠.

3절은 이것이었습니다. 한계 속에 있다는 걸 알아요. 니가 작가가 아니라는 걸 알아라. 너는 말하자면 역할이다. 네가 다 알 수 없고, 그러나 분명한 네 길을 걸어라. 네 자리를, 네 삶을 살아라. 그것은 하나에 불과한 제한이 아니라 분명한 존재다.’ 이렇게 됐죠.

그냥 우리가 태어나서 맞이하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사회, 시대, 관계, 지위 속에 우리가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콘텍스트를 유지하는 게 뭐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것들입니다. 그것이 권력이고 정의고 진리고가 아니고 하느님이 우리를 담아내기 위하여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는, 하느님의 지혜로 허락하시는 컨텍스트라는 말이죠.

그 콘텍스트(상황)가 마음에 안드는 때가 많습니다. 그럼 마음에 안드는 그 역사, 과거는 다 뭐냐? 이런 것들이죠. 문학을 하려면 그걸 글로 표현을 해야 되는데 글로 표현하려면 일단 단어를 알아야 됩니다. 올바른 단어를 써야 됩니다. 그렇죠? 그리고 단어는 개념과 상상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만들어집니다.

문화라는 단어가

그런데 60년 전만 해도 문화라는 단어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그땐 다 문명이라 그랬습니다. 1960년대만 해도 우리가 많이 뒤진 나라였고, 구미 선진국들의 성취와 부요함에 대한 부러움과 경탄을 가지고 뒤쫓던 시기입니다. 그때 보니까 서구는 이미 과학 문명의 한계, 물질의 부작용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때쯤 문명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문화라는 이름이 등장하고, 히피같이 서구화에 앞장을 섰던 근대에 대한 과학 문명에 대한 반발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영성운동이라는 게 일어나고 그걸 현실적인 사건과 묶은 건 반전이었습니다. 그때가 월남전 때니까 월남전 반대였죠. 그래서 그 후로는 서구가 물질문명과 과학 기술의 발전을 자랑하는 것으로 나라들을, 민족들을 평화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그다음부터 문화라는 이름을 만들고 문화 속에서는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보다 낫다고 얘기할 수 없다.”라는 겸손한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한 내용을 담기 위해서 이런 단어가 필요하듯이 문명 갖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인류와 현실에 대하여 문화라는 단어를 만들어야 되는 필요에서 이 단어가 만들어지듯이 단어를 이해하고 단어를 이어 문장을 만들 수 있어야 됩니다.

문장을 만들어야 드디어 사상이 담깁니다. 사상은 그냥 사랑, 진심, 이렇게는 담아지지가 않습니다. 콘텍스트가 없이 텍스트만을 얘기하면 옛날에 서영춘 씨라는 분, 유명한 분이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그때 이미 콘텍스트와 텍스트를 구별했었던 것 같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쉽게 말고 벤허라는 영화를 보면 그게 벤허가 주인공 아닙니까? 유다, 훌의 자손, 유다의 이야기인데 그가 주인공이고 그의 생애입니다. 그러나 텍스트는 예수입니다. 이제 다 아시겠죠?

그러나 그 컨텍스트가 없으면 예수가 담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와서 예수님이 얼마나 정말 굉장한 분인가를 아무리 그려도 그걸로는 이미 믿은 사람들만 확인하지, 안 믿는 사람들은 그거 보고는 절대 회개하지 않습니다. 공유할 컨텍스트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됩니다.

저게 내 친구고 저게 순악질인데, 저게 예수를 믿다니!’ 그 콘텍스트를 가지지 않는 한 그 텍스트가 담겨지지가 않습니다. “성질은 부리고 그러세요.” “글쎄 말이야.” 같은 콘텍스트를 공유하고 있는 겁니다. 조급증? “이것도 모른단 말이야!” 이게 컨텍스트,

그의 억울함, 그의 시대적 시위, 지금 오늘 본문과 똑같이 로마의 통치 아래에 있는 분노한 유대인,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께 특별히 선택된 우월감,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자, 오랜 친구였던 멧살라의 배반, 로마에의 아첨, 의리와 현실에 대한 분노, 그것이 벤허죠.

어디서 절정에 이르러요? 멧살라를 죽여도 생기지 않는 답, 보상되지 않는 영혼의 답, 당신이 멧살라 같아요. 중요한 장면이 되죠. 그리고 끝이 뭡니까? 이 말이 내 가슴에서 칼을 내려놓게 했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게 바로 컨텍스트와 텍스트에요.

사극을 보세요. 그 유명한 정도전 사극은 이런 거예요. 결과를 아는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이성계가 성공할 거냐, 실패할 거냐 조마조마하세요? 그런 사람은 없어요. 무슨 소리에요? 근데 뭘 보라는 거야? 사극은 뭘 보라는 거야? 그때 어떤 유혹이 있었나 어떤 위기가 있었나 어떻게 결정했나를 보자는 거예요. 눈 부릅 뜨고 고함 지르는 게 사극이 아니고, 대표적으로 이런 거예요.

영화 십계에서 찰턴 헤스턴이 모세로 나와요. 파라오의 왕자로 갑니다. 40세가 되기까지 그냥 그게 자기 길인 줄 알고 잘 살고 있고, 그래서 유능해요. 배다른 형제인 율 브린너가 있어요. 그놈 무능해요. 야심만 있고 욕심은 있지만 무능해요.

아버지가 왕이 시키는 일에 모세는 뭐든지 다 성공을 하고, 율 브린너는 실패를 해요. 아버지가 모세를 편애하죠. 배다른 또 공주가 하나 있어요. 안 박스터라는 영화 배우예요. 모른다고 하면 안 돼요. 둘이 사랑을 해요. 이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자기는 자기 민족에게 가겠다고 합니다. 거기에 나오는 유혹이에요.

안 박스터가 먼저, “당신이 파라오가 되어 당신 민족에게 자유를 주면 되잖아요?” 그런 걸 해야죠. 굉장한 거 아니에요? 그 말이 맞죠. 하느님은 그렇게 안 하셨어요.

두 번째는 이렇게 말해요. “나를 사랑한다면서 내가 율 브린너한테 가도 좋아?” 우리 사랑을 할 때는 다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어요? “당신 없으면, 나 죽을 거야!” 그거 묻잖아요. 그걸 어떻게 넘어왔을까요. 몰라요.

찰턴 헤스턴은 인상만 써서 모르겠어요. 그게 컨텍스트에요. 그걸 겪어야 돼요. 그게 없으면 구체화할 수가 없어요. 담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계속 이 싸움만 하고 있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한국 근현대사를 보세요. 이승만 정권에서 가장 급했던 현실은 해방이 되자, 아무도 나라의 주인이 없는 거예요. 이씨 조선이 망하고 해방이 됐는데 도대체 누가 책임을 질 거예요? 이승만 대통령이 지게 됐어요. 어떻게 지게 됐는지까지는 몰라요.

근데 역사에서 알고 있잖아요. 뭐가 급했을까요? 국방이죠. 국방, 다시는 외국에게 나라를 뺏기지 않아야 되죠. 국방 되면 치안을 해야 될 거 아니에요. 치안. 그리고 공부를 시켜야 될 거 아니에요. 후진국이니까 교육. 그걸 하려면 누구한테 맡길 거예요. 다 친일파한테 맡겼죠. 잘했냐고요? 아니요. 잘 못했죠. 그러나 써야지 어떡할 거야?

박정희 뭘 했을까요? 돈이 든다는 걸 알았어요. 국력이 있고 경제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 무시무시하게 밀어붙였죠. 부작용이 있었죠. 억울하죠. 배웠죠. 국력을 가질 때는 민도도 높이고 모두의 마음을 항복시키는 시간도 가져야 된다를 배웠죠. 그리고 문민정부가 됐어요. 뭘 배우셨어요? 사심이 없고 공정하게 하면 다가 아니라, 그러면 무능해진다는 걸 배웠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오래 해야 돼요. 지도자나 백성이 시간을 가져야 돼요. 빨리 답을 내라고요? 그런 건 없어요. 우리 경부선 제일 빨리 만들고 보수 공사 때문에 원가의 열 배를 꼴아 박아요. 그죠. 빨라야 되는 때 있고, 튼튼히 늦게 가야 되는 때 있다를 배웠어요.

유능하다는 건 뭐예요? 유능하다는 건 행운과 불운을 넘어 지금 무얼 해야 하는지를 아는 분별이에요. 지금은 뭘 하느냐, 뭘 할 수 있느냐, 어떻게 해야 되느냐를 아는 것, 그게 유능한 거예요. 옳은 말 하면 다 아니에요? 정도전에서도 그러다가 시도 때도 없이 옳은말 하면 죽는다. 임마.” 그걸 유익하게 써야죠. 유익하게 뒤집을 수 없는 과거를 지금 우리의 현실을 감수해야죠. 극복해야죠 당연히. 뒤집으면 그만인 게 아니라, 한 면이 익어야 뒤집을 거 아니에요. 빈대떡도 그렇게 뒤집는데, 뒤집기만 세 번 해봐야 다 찢어지죠.

성경이 하는 얘기예요. “너희는 위에 있는 권위에 복종하라.” 이게 무슨 얘기야? 너희에게 준 컨텍스트 속에서 이 일을 하라. 그게 무슨 변화가 있을지 몰라요. 우리 짧은 인생 속에서도 남의 나라 식민 시민이 됐다가, 해방을 받다가, 군정을 받다가, 6.25 겪고, 4.19 겪고, 5.16 겪고, 12.6 겪고, 12.12 겪고, 5.18 겪고 다 겪었어요.

이제 공휴일 아닌 날이 없죠. 그게 뭐죠? 그건 콘텍스트에요. 그 속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걸 하세요. 분명히 얘기해 달라고요?

(마태24,32-42) 32 '무화과나무를 보고 배워라.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돋으면 여름이 가까와진 것을 알게 된다.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사람의 아들이 문 앞에 다가 온 줄을 알아라. 34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35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37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바로 그럴 것이다.

38 홍수 이전의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 가던 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39 홍수를 만났는데,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 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41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 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42 이렇게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

 

중요한 성경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데려가는 그날까지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완성하거나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예비하는 컨텍스트는 없습니다. 시집가고 장가가고 밭 갈고 맷돌질 하는 컨텍스트 속에 하느님이 일하시고 때가 되면 그 콘텍스트를 끝내실 겁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역사가 종말을 만들거나 종말로 치닫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고 나아지는 것 없고 생각이 없듯이 지나갑니다. 그 속에서 하느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그 일들을 잘하면 더 나은 세상이 되고 더 좋은 인간이 되고 그렇게 인류와 역사가 그러지는 않습니다. 왜 그렇게 장담하냐고요?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우리 자식은 여전히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좀 나은 애가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도 그 스스로 자기 인생 속에서 예수를 만나야 됩니다. 그래 자기가, “그래 결국 이거였어.” 그때는 70-80입니다. 알아들으세요? 각각의 인생을 각각이 전부인 것 같이 일하시는 하느님을 모르고 콘텍스트를 받고 편안하자는 거죠. 그래서 모두에게 고함만 지르고 있어요.

"깨어 있어라." 이게 무슨 말이에요? 깨어 있어라. 뭐가 텍스트인지 알아라. 너에게 주어진 컨텍스트와 텍스트를 혼동하지 마라. 니가 못할 것 하나도 없다. 밖으로 만드는 것으로 내 일이 끝나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죠. 못 알아 들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하나 더, 에베소서 5~

(에페5,11-14) 11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의 행위에 끼어들지 말고 오히려 그런 일을 폭로하십시오. 12 사람들은 그런 일들을 숨어서 하는데 그것들은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들입니다. 13 모든 것은 폭로되면 빛을 받아 드러나고 14 빛을 받아 드러나면 빛의 세계에 속하게 됩니다. '잠에서 깨어나라. 죽음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빛을 비추어주시리라' 는 말씀이 이 뜻입니다.

 

깨여있어라고 여기도 나옵니다. 깨어있다는 게 뭐라고요? 텍스트(내용)를 아는 거라 그랬습니다. 그 텍스트를 어디에 담는다고요? 컨텍스트에 담습니다. 컨텍스트를 무시하지 말고, 컨텍스트를 텍스트와 혼동하지도 마시오. 그래서,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서 미련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사십시오. 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에페5,15-16)

세월은 넘어가면 끝이 아니예요. ‘그 지나가는 그릇에 물 담듯이 세월을 채워 보내야 되는 것이란다. 때가 악하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마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라.’

술취하는 게 뭔데요?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죠. 술 취하면 필름이 끊기잖아요. 우리의 삶을 모든 순간 우리 보고 꼭 언제나 정답을, 언제나 전능하라 그러지 않아요. 우리 보고 전지전능하라는 것 아니에요. 완벽무쌍하라는 거 아니에요. 모든 경우를 우리의 실력으로 부딪혀 살아내요. 그리고 거기서 은혜를 받았어요.

인간이 뭔지 하느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우리가 누군지 하느님의 능력과 기적을 확인하세요.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조건도 억울하거나 우리를 실패케 하거나 절망으로 끝날 수 있는 것은 없대요. 로마서 8장에서 이미 다 한 거예요. 그렇지요.

 

하느님 아버지, 우리가 무서워한 건 사실 믿음 없음이었습니다. 우리의 조건은 최선의 하느님의 지혜고 하느님의 의지고 하느님의 일하심입니다. 내가 당하는 모든 조건 속에서 원망과 게으름과 어리석음을 걷어버리고 내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에게 준 조건 속에서 걱정하며 염려하며 탄식하며 기도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 우리가 산 오늘을 하느님 앞에 바치는 위대한 하느님의 증인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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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요. 힘내세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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