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3주간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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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 작성일2024-01-26 | 조회수670 | 추천수4 | 반대(0) |
매주 수요일에 ‘직원회의’가 있습니다. 보통은 업무보고를 하고, 저의 일정을 이야기하면서 회의는 30분 안에 끝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가끔 현안에 대한 토론을 할 때가 있습니다. 매년 조금씩이라도 급여를 인상해야 하는데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급여를 삭감하였고, 대신에 근무시간을 단축했습니다. 편집기의 시스템이 불안정해서 신문제작에 문제가 생기곤 하는데 아직 새 편집기를 구매할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회계업무 간소화를 위해서 ‘퀵북(Quick Books)'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토론을 토론으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서로 다른 의견이 있으면 그것을 존중하면 되는데 성격상 그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경청하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지 못하는 엄마의 심정 같기도 합니다. 저도 어릴 때 어머니에게 원하는 것들을 말하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다음에 해 줄게라고 하시기도 하고, 있는 것 일단 사용하라고 하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는 야속했지만 지금은 충분히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문사에 애정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직원들의 마음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2024년에도 신문홍보과 광고를 통해서 신문자의 재정을 안정적으로 이끄는 것이 저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대기업은 주로 가족들이 경영권을 승계하지만 미국의 대기업은 ‘전문경영인’이 기업을 운영하는 곳이 많습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기업의 규모가 커지면 전문경영인 체제가 좋을 것 같습니다. 전문경영인은 경험도 많고, 잘못되었을 경우에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검증된 전문경영인이 운영하면 기업은 더 많은 투자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교회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사도들이 이끌었습니다. 사도들의 열정과 헌신은 교회를 성장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박해라는 시련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 교회에 제자가 아닌 전문가가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지만 그리스어에 능통하였습니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로마에서 공부하였고, 로마의 시민권도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의 율법은 물론 그리스의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의 판단에 교회는 유대의 율법과 전통을 위협하는 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교회를 박해하는 편에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그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초대교회는 그를 교회의 지도자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열정과 헌신으로 교회는 예루살렘을 벗어나 아시아로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신학과 교리는 교회 조직의 토대가 되었고, 그가 보낸 서간은 지역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처방전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확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억울하게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의 믿음입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이었고, 그의 죽음은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표징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으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다는 믿음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세계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사도 바오로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 나탄은 다윗 왕은 잘못을 예리하게 지적하였습니다. 다윗 왕이 자신이 권력을 이용해서 충실한 부하를 억울하게 죽음으로 몰았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이 나탄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았다면 다윗 왕은 잊혀진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나탄의 이야기를 경청하였고,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판결을 받아들였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으로 거듭 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풍랑을 만나 두려웠습니다. 호수에 빠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늘 풍랑이 불기 마련입니다. ‘교만, 나태, 시기, 탐욕, 인색, 탐식, 욕정’의 바람입니다. 그 바람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불렀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 시작은 바오로 사도가 회심했던 것처럼, 다윗 왕인 회개했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부르면,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돌리면 자비로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으로 품어 주십니다.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 저는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리이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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