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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39) 사랑의 의무(義務) (로마1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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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28 조회수237 추천수1 반대(0) 신고

 

 2024. 1. 28. (일요일)

 

로마서39) 사랑의 의무(義務)

 

(로마13,8-10)

8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라는 계명이 있고 또 그 밖에도 다른 계명이 많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이 한 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0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로마서 13장은 ‘위에 있는 권위에 복종하라. 모든 권위는 하느님이 정하신 바며, 하느님께서 만드신 바라. 그러니 복종하라’ 라는 구절에 와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이 권위는 이제 정권이겠죠. 정권, 정부, 각 나라와 사회의 권력 구조일 텐데 이것에 복종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힘을 가지고 다스리는 권력을 갖고 있으면 그것이 하느님의 선이고 하느님의 뜻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확인해본대로 이것은 하나의 컨텍스트에 불과합니다. 정권이라는 것, 그때 사회에 어떤 질서나 구조는 컨텍스트입니다.

컨텍스트가 뭐냐? 지금 한국 전문용어를 아직 개발 중에 있습니다. 연극을 하려면 이 세 가지가 있어야 된다는 말, 학교 다닐 때 배운 기억이 납니다. 연극을 하려면 희곡이 있어야 되고 관중이 있어야 되고 무대가 있어야 된답니다.

그러니까 정권은 무대라는 뜻입니다. 무대, 그게 있어야 뭘 하죠? 그 연극을 하려는 이유는 텍스트를 이제 소개하려는 것입니다. 텍스트를 담고 그 텍스트를 표현하려는 것이 연극의 목적입니다. 거기서 무대는 컨텍스트다 이거지요. 무대가 모든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가 하나의 무대가 돼서, 더 좋은 말이 생각이 안 나네요. 하느님이 어느 사회건 주는 어떤 권위, 어떤 구조, 유산, 질서, 정서라는 것이 전부 컨텍스트라는 사실입니다. 거기 뭘 해야 되느냐? 텍스트를 담아야 되는데, 세상은, 컨텍스트는 다 보고 있습니다. 자연 자체가 컨텍스트죠. 역사 그리고 질서, 현실, 공간적 현실이 다 컨텍스트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 내내 누적되어온 반복되는 결론과 같이 자연주의는 필연적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이 허무주의로 나갑니다. 죽어버리니까요. 소멸되니까. 모든 생명은 소멸되니까 허무주의로 나갑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에 컨텍스트 싸움을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무가 서로 기를 쓰고 더 많은 볕을 쬐려고 키를 키우고, 나라가 땅을 빼앗고 자원을 확보하고, 한 나라, 한 사회 속에서는 정권을 움켜쥐어 어찌해서든지 강제력을 가진 자, 우위에 서는 자가 되는 컨텍스트를 다투는 싸움이 될지언정 텍스트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뭘 담아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연이 생명을 낳고 있어도 생명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 우리가 사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세상 사람들 같이 우리가 태어나고 선택할 수 없는 어떤 정황 속에 있는 것을 극복을 하는데 또는 바꾸는데 일차적인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구조와 이 원칙 속에서 담아낼 텍스트가 있느냐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됩니다.

이 세상적인 답에서는 그것이 우리가 마치 이 정권과 질서와 구조가 우리가 몸 담고 사는 컨텍스트의 가장 외벽이니까 좋게 만들자. 그 속에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게 만들자. 그게 이제 민주사회입니다. 그 속에 살아야 되는 국민들이 주권을 가지고 합의 하에 정권을 창출하자. 민주사회입니다.

그걸 해보니까 결국 시민사회로 나가야 된다는 것이 이제 역사학자들이나 모든 인류의 어떤 공통된 이해로 현재까지 왔습니다. 민주사회를 만들려면 시민들 즉 국민들의 실력이 더 나아져야 된다. 어떤 실력? 모든 권리는 책임을 가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까지 왔습니다.

이 실력이 없으면 힘이 약해서 언제나 손해 본다는 것만 남거든요. 잘못된 나라에 살기 때문에 억울하다만 남거든요. 그게 어느 정권에다 대고 할 수 있는 욕이거나 자기가 태어난 시대나 나라에다 대고 할 수 있는 불평이 아니라,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서 국민 노릇을 해야 되는, 그 수가 적을 때는 속 썩어야 되는, 그 수가 늘어나도록 애써야 되는, 컨텍스트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걸 아는 것, 그게 시민 정신, 시민 사회입니다.

그래서 합의를 해야죠. 이 합의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결국 죽고 없어질 내일이라는 것이, 오늘보다 나을 거라는 확신도, 자신도, 역사적 증거도 없이 죽어버리고 말, 내 한 인생을 그 기대할 수도, 상상할 수도, 안심할 수도 없는 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나보다 못한 자들을 위하여, 내가 오늘 책임을 위하여, 권리를 양보하고 헌신하고 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이르면 이게 복잡한 것입니다.

거기에다 대고 그리스도교인들 보고 "너희는 위에 있는 권위에 복종하라." 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차원에서는 도저히 나오지 않는 답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죠. 너희는 내일이 있다.

너희는 영생이 있다. 하느님의 약속이 있다. 승리와 영광이 있다. 죽음으로 가는 길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 너희 자신이 구원받아 알고 있는 자들이다. 마음 놓고 양보해라. 져라. 지는 길 가라. 이렇게 되는 거죠.

그 그리스도교인만 유일하게, 사실은 시민 정신을 가지고 있고 시민 사회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성향과 정치적 무슨 능력을 가져서가 아니라 그 지위와 상관없이 우리는 질 수 있습니다. 지는 것으로도 지고, 짊어지는 것으로도 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이 뭘 만드실 수 있다?

(1열왕19,9-18) 9 그가 거기 한 동굴에 이르러 그 속에서 그 날 밤을 지내는데 갑자기 야훼의 말씀이 들려 왔다. '엘리야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0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보고 만군의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고 있읍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읍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읍니다.' 11 다시 음성이 들려 왔다. '앞으로 나가서 야훼 앞에 있는 산 위에 서 있거라.' 그리고 야훼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 한 줄기가 일어 산을 뒤흔들고 야훼 앞에 있는 바위를 산산조각내었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바람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다음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12 지진 다음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불길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다. 불길이 지나간 다음 조용하고 여린 소리가 들려 왔다.

13 엘리야는 목소리를 듣고 겉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동굴 어귀로 나와 섰다. 그러자 그에게 한 소리가 들려 왔다. '엘리얏야, 네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4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보고 만군의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고 있읍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죽였읍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읍니다.'

15 야훼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다마스커스 광야로 해서 돌아 가거라. 다마스커스성에 들어 가거든 하자엘을 기름부어 시리아의 왕으로 세우고 16 님시의 아들 예후를 기름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아벨므홀라 출신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기름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17 하자엘의 칼을 피하여 살아난 자는 예후에게 죽을 것이고 예후의 칼을 피한 자는 엘리사에게 죽으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도, 입맞추지도 않았던 칠천 명을 남겨 두리라.'

 

엘리야는 호렙산까지 뛰어 내려옵니다. 갈멜산 전투에서 이겼으나 이세벨의 권세가 여전히 등등한 것을 보고 놀라서 비유하건데, 위화도에서 이기고 사이판으로 도망간 겁니다. 너무 놀라서.

하느님이 묻습니다. “엘리야야, 너 왜 여기 있느냐? 네 자리가 왜 여기냐?” “하느님 모두 죽이고 나 하나 남았는데 나도 죽이려고 합니다. 내가 어떡하란 말입니까?” “너 내일 굴 앞에서 보자.” 다시 묻습니다. “엘리야야, 너 왜 여기 있냐?” 똑같은 답을 하지요. “다 죽이고 나만 남았는데, 나 하나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거기다 대고 얘기하죠. “너 가서 하자엘로 시리라(아람) 왕 세워라. 예후로 이스라엘 왕 세워라. 엘리사로 예언자 삼아라.”

무슨 소리죠? 이 컨텍스트가 계속되게 하라. 아합이 왕인, 악한 왕인 이 이스라엘을 악한 대로 존속시켜라 그럽니다. 그 가장 큰 대적(對敵)인 아람 왕조를 연장시키랍니다. 하자엘을 시리아왕으로 세우고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라. 그리고 엘리사 세워라. 걱정하지 마라. 칠천 명이나 남아있다.

그 칠천 명은 정결하고 가려 뽑힌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컨텍스트 속에 감춰진, 삼켜진 것 같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하느님의 사람들이 그 컨텍스트에 사로잡힌 것 같이, 무대 위에 서서 무대가 삼킨 것 같이 무대 안에서 이제 자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이 컨텍스트 속에 텍스트를 담기 위하여 그걸 유지하십니다. 우리가 보는 ‘이게 뭔가?’ 속에 하느님이 담아내시는 기적과 구원과 자비와 능력과 거룩하심과 두려움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역사학자들이 늘 얘기하는 역사란 반복에 불과하다. 우연의 산물이다. 의식이 없고 낙관할 수 없다 밖에는 가질 게 없습니다.

인문학이라는 얘기는 그 컨텍스트 얘깁니다. 그게 아무리 멋있어도 담아낼 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과 여’라는 그 유명한 영화, 그 중요한 고급 영화인데 그 프랑스 영화죠. 사랑하지만 이렇게 선뜻 결정을 못하고 있는 둘이 대화 중에, “집에 불이 나면 피카소 그림을 들고 나올래? 고양이를 들고 나올래?” “고양이 들고 나오겠다.” “왜? 살아있는 생명이니까.” 그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그때그때 하느님이 누구시며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에게 무얼 채우려고 하는가를 보지 못하면 이 세상 인생에서 감사한 인생은 없습니다.

모든 은혜는 그가 겪은 모든 억울함을 역전시킵니다. 그거 손해 보지 않았어요. 이게 은혜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우리 오늘 보는 본문과 같이 “그러니까 너희 사랑해라.” 이렇게 됩니다. 이게 느닷없이 여기서 왜 사랑 타령일까요?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는 거랍니다.

다시 이 컨텍스트 속에 텍스트를 담으시는 하느님이 있는 줄 알아, 내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 내 인생의 억울함을 컨텍스트로 풀지 않고 텍스트를 담아내는 자로 위대하게 서 있다를 이해해야 되는 자가 가지는 구체적 길, 구체적 실천, 덕목,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악을 행치 않는 것입니다. 내 이웃에게 이웃이 있습니다. 악은 대부분의 경우 제거해서 없애려고 그럽니다. 아까 제거해서 없애려고 그러죠.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서도 ‘예수를 믿으면 정결하게 되고 죄를 짓지 않는다’ 라는 소극적인 그 이해가 우선해서 저희 흠 없으려는 거 그리고 나중에 이제 교만하지 않는 것, 진심이 부족한 것으로 전부 이렇게 거기에 붙들려 가는데, 사랑이라는 건 그것과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우리가 악을 제거하면 선이 남는다고 생각을 하죠. 악을 제거하면요, 공(空)이 남습니다. 공, 꽝. 선은 다른 것입니다. 악은 선의 부재(不在)입니다. 악은 선의 부패며 악은 선의 왜곡입니다. 선과 악은 대등하게 있는 적대적 그건 대등한 이원론적 지위를 가지는 게 아니라 선을 파먹는 것입니다.

선을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악을 제거하면 선이 재생되거나 없던 것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가장 우리 실감나는 역사적 증거로 조선사회를 보십시오. 오해를 받으면 그만두죠. 그만두는 것은 굉장히 무책임한 행위입니다. 자기한테 준 능력과 지위를 책임 있게 하지 않고 욕 안 먹기 위해서 다 그만두는 바람에 우리식으로 하지만 무능한 것들만 남습니다.

무능한 건 왜 남았냐? 탐욕과 부정부패를 할 능력이 없어서, 물 같고 흙 같고 이런 것들만 남는 겁니다. 알아 들으세요? ‘누구 관둬라.’ ‘나 안 한다’ 든, 그리스도교와는 전혀 거리가 먼 얘기들입니다. 악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채우는 것 그 적극적인 선이 뭐냐? 사랑입니다.

흔히 이 악을 제거하는 데 있어서 최고로 지독한 데까지 간, 이 한국 유학의 경지는 결국 신독(愼獨,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언행을 삼감)이죠. 혼자 있을 때도 스스로 삼간다. 누가 볼 때만 윤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혼자 있을 때도 잘한다. 그건 얼마나 그리스도교 정신과 먼 것이냐?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경지를 말합니다.

이웃은, 옆에 있는 사람은 없어도 되는, 옆에 있는 존재가 거부되고 모욕스러운 표현입니다. 그 스스로가, 그 사람의 존재가 옆 사람에게 기뻐야 되는 것이고 옆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되는 것이지 스스로 어떤 윤리와 법에 매어 달려 인간이 아닌 아무런 사심과 정서가 없는 원칙이 되어 버리는 것은 못할 짓인 것입니다.

창조의 아름다움과 생명의 무성함이라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라 비틀어진 것입니다. 아 자꾸 그리 갑니다. 그리 가죠. 교회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부요한 생명에 관한, 그 구원에 관한, 그 능력을 놓치면 표정이 나쁩니다. 이제 자치 표정이 좋아야 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의 다름입니다. 그것은 부요하고 풍성합니다. 강아지가 와서 한 입 베물어도 남는 게 많아야 됩니다. 그 뺏어간 강아지 쫓아가서 잡아 먹을 필요 없습니다. 넉넉해야 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사랑은 뭐죠? 사랑은 우리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뭘 참는 거예요? 고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뭐가 고통이죠? 같이 사는 사람이 고통인 것입니다. 같은 시대를 사는 이웃이 고통스럽습니다.

왜 저런가? 너는 왜 내 마음과 다른가? 너는 왜 그러는가? 그걸 어떻게 참으라고? 인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덕목으로 이런 명분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의 존재와 인생을 가치 있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요? 마음에 안 드는데.

아까 얘기했죠. 한 권세는, 그 시대의 권세와 질서와 구조는 하느님이 정하신 것이라. 컨텍스트다. 겁내지 마라. 컨텍스트다. 그 안에 사는 자가 되어라. 집이 멋있냐, 멋있지 않느냐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죠. 그 안에 사는 식구가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네 이웃을 견뎌야 하는 그는 상대의 역이다 이겁니다. 상대역이다.

벤허에서 없으면 안 되는 사람, 멧살라, 멧살라가 없으면 벤허는 한 세 명밖에 안 봤을 겁니다. 그 드라마를 유지할 수가 없고 메시지를 담을 수가 없습니다. 멧살라의 역할, 그 극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누구? 로마 황제. 그 사람을 죽이는데 그 영화의 목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담을 메시지가. 거기는 초점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벤허, 한 개인의 생애에서 그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복수였죠. 복수를 해봤자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예수를 만나 가슴에 칼을 놓기까지 인생의 가치, 인생에 허락되는 운명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걸 알게 되죠. 무엇 속에서? 고난 속에서, 억울함 속에서, 오직 복수심에 불타서.

그러니 다시 생각해 보시오. 무엇이 겁이 나는 겁니까? 왜 나라가 이 꼴이냐고? 무능해서 그러죠. 왜 무능하냐고? 우리는 이것보다 훌륭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제 여기까지 왔습니다. 서둘러 뺑끼칠 해서 합판으로 틀어막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서둘러, 등수를 올렸죠. 20등 안에 들었는데 사실은 그게 다 베니아판이었다. 이렇게 된 거죠.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다시 해야 됩니다. 하루 아침에, 다시 하자. 똑바로 해라. 그러면 하루아침에 된다고요? 아니요. 시간이 걸립니다. 그동안은 어찌 해야 되는가? 아슬아슬하게 살아야죠. 그 사고가 우리 누구에게 어떤 형식으로 나타날지 모릅니다. 그 속에 하느님이 텍스트를 담을 수 있답니다.

예수는 잡혀 죽습니다. 그것보다 더 놀라운 사고는 없습니다. 그것보다 놀라운 절망과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은 없습니다. 그걸로 뭘 하셨다구요? 인류와 역사를 역전시킵니다. 모든 인류, 각 개인의 생일을 바꿔놓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부활, 생명을 가져 그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그에게 일어난 모든 일, 자신의 못남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모든 일까지 합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영광의 찬송이 되는 운명 아래에 있다고 합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가 2,000년 전에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을 그의 부활로 완성시켜놓고, 우리 보고 우리 인생을 그 운명 속에서 살라고 구체적인 시간을 줬습니다. 그러니 무대에 올라가십시오. 자기 역할을 하십시오. 멧살라하고 싸우십시오. 휴식 시간에 데리고 나와서 같이 짜장면 먹으시오. 그 사람을 죽여 없애면 어떡하려고요.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최고라고 얘기합니다. 왜요? 천국에 가면 모두가 사랑스럽기 충분할 만큼 적극적인 선으로만 가득 차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직 만들어지는 시간 속에서 천국 시민사회를 만들어도 이 세상 나라가 천국을 만들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참여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이 그 사명을, 천국을 기대하는 자로서 사랑과 믿음을 지키고 어느 한 국가와 시대에 하나의 시민이 되고 국민이 되면 하느님은 하느님이 세우신 나라의 덕목들을, 약속들을, 그 기적들을 우리에게 담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거 하십시오. 멋진 국민, 시민 되어서. 내가 이민가면 죽이겠다는 말의 뜻입니다. 갈 수 밖에 있는 경우를 다 차단하자는 것 아니요, 여기에 보내졌으니 이 무대에 서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일하신 방법의 신비를 직접 체험하는 기적의 길을 걸으시오. 사랑이 가지는 우리 스스로를 만족시키는 명예를 살아내시오.

 

우리는 단죄하고 보복할 필요 없고, 사랑하고 기다리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명예로운 지위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감사한 인생입니다. 그 인생 살게 하소서.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동참하는 자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 우리 이웃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기적을 알리는, 나누는, 복된 삶을 지키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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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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