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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로마서40) 예수 그리스도로 무장(武裝) (로마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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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쪽지 캡슐 작성일2024-01-29 조회수186 추천수1 반대(0) 신고

서해 일출 명소 연포해수욕장 2024년 1월 1일 새해맞이

 

2024. 1. 29. (월요일)

 

로마서40) 예수 그리스도로 무장(武裝)

 

(로마13,11-14)

11 이렇게 살아야 하는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12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14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일하시는 그 무대, , 구조 속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부분을 지금 배우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권위에 복종하라 하는 것이죠. 세상은 다만 권력 싸움밖에 어떤 목적과 의미를 부여할 때가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려 하시며, 복 주려 하신다. 라는 믿음을 갖고 있고, 그런 역사관과 운명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네가 놓여있는 정황과 구조 속에서 네 역할, 네 자리를 지키라. 그래서 국세도 바치고 지방세도 바쳐라 하는데까지 왔지요. 그러한 커다란 구조, , 무대 같은 것들을 제가 다 이렇게 묶어서 컨텍스트라는 말로 지금 쓰고 있습니다. 컨텍스트는 이거보다는 작게 문맥, 정황 등에 쓰이는 단어이지만, 저희 말을 아직 못 만들어서 적당한 단어를 못 찾아서 제가 그렇게 컨텍스트와 텍스트 이렇게 둘로 나눠서 쓰고 있습니다. 컨텍스트를 두려워 말라.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고, 컨텍스트를 텍스트로 오해하지 말라. 이런 얘기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만이 텍스트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시대, 사회, 조건, 이런 것들이 다 사실 어렵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런 조건들을, 예수를 믿고 거룩한 목적을 부여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개선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된다.’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자면, 이렇게 거룩하고 중요한 사명을 갖고 있는데,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지위와 무력한 역할을 맡기시는 현실이 이해가 안되고 너무 작다. 그런 불평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얘기지요.

(마태16,24) 24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자의 도()에 관한 예수님의 유명한 요구입니다. 자기를 부인(否認)한다는 것은 자기라는 존재와 가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권력을 가지거나 스스로를 증명할 어떤 재주를 가지거나, 또는 좀 심하게 나가서 배알도 내놔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자기 부인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하느님이 우리를 컨텍스트 속에 넣어 놓으신답니다. 여기가 어렵죠. 중요한 임무를 맡았으니 중요한 지위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 자신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아무런 지위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 앞서, 그의 길을 예비한 세례자 요한은 저 광야에 외치는 소리입니다. 존재도 신분도 아니고 그저 다만 소리입니다. 광야에 외치는 소리, 이렇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이 컨텍스트 속에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죽어 나갈 것입니다. 죽음의 길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죽어버리면 그만인 인생을 살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컨텍스트 속에서 가지고 있는 지위와 역할입니다. 당연히 아멘을 안 하시겠죠. 그걸 모르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제가 얘기한 건 우리 모두에게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매주 와서 이건 억울합니다 라고 얘기하고, 이걸 개선하고 희망에 찬 어떤 답을 얻어가려고, 매일 와서 매일 그 얼굴로 왔다가 그 얼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성경(聖經)은 한 번도 그 약속을 한 적이 없는데, 성경이 한 약속이 뭔지도 모르고, 진심, (), 종교, 임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그 암묵적(暗黙的)으로 자신들의 안심과 자존심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그렇겐 못한다.” 그것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그러니 시편 90편을 보면, 시편에 있는 유일한 모세의 기도문입니다.

 

(시편90,1-12) 1 주여, 당신은 대대손손 우리의 피난처, 2 산들이 생기기 전, 땅과 세상이 태어나기 전, 한 옛날부터 영원히 당신은 하느님, 3 사람을 먼지로 돌아 가게 하시며 '사람아, 돌아 가라' 하시오니 4 당신 앞에서는 천 년도 하루와 같아 지나간 어제 같고 깨어 있는 밤과 같사오니 5 당신께서 휩쓸어 가시면 인생은 한바탕 꿈이요, 아침에 돋아나는 풀잎이옵니다. 6 아침에는 싱싱하게 피었다가도 저녁이면 시들어 마르는 풀잎이옵니다. 7 홧김을 한번 뿜으시면 우리는 없어져 버리고 노기를 한번 띠시면 우리는 소스라칩니다. 8 우리의 잘못을 당신 앞에 놓으시니 우리의 숨은 죄 당신 앞에 낱낱이 드러납니다. 9 당신 진노의 열기에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지고 우리의 세월은 한숨처럼 스러지고 맙니다. 10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 년, 근력이 좋아야 팔십 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11 누가 당신 분노의 힘을 알 수 있으며, 당신 노기의 그 두려움을 알겠습니까? 12 우리에게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

 

이게 도대체 무슨 기도, 무슨 고백, 무슨 탄식일까요? 모세는 120살을 삽니다. 40년은 파라오의 궁에서 길리워지고, 그 다음 40년은 도망가 미디안 광야에서 그저 세월을 보내고, 그저 그렇게 한 줌 재로 늙어가지요. 80에 부름을 받습니다.

40년 동안 잘 아는 대로 파라오 앞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고 홍해를 가르며 반석에서 물을 내며 하느님이 붙드시는 대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호렙산에서 율법을 받고, 그리고 저들의 불순종으로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며 다 죽습니다.

그 배경을 가진 기도죠. 얼마나 인생은 짧습니까? 얼마나 인생은 못 났습니까? 우리의 죄가 주님 앞에 있고 주님의 분노에 일식간에 다 죽어버리는 참으로 헛된, 못난 인생입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문은 그렇게 읽고 듣는 것 같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이 못난 것들을 위하여 하느님이 10가지 재앙을 베푸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내셨습니다. 호랩에서 만나셨고 만나를 먹여 이 40년 동안 내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고 내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다. 그것 보이셨습니다.” 그런 기도지요.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저들의 실패는 다만 실패일까요? 저들의 못난 것은 다만 못난 것일까요? 거기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하느님의 신실하심과 오래 참으심과 못난 인생을 향하여 퍼부은 하느님의 진실하심과 능력으로 그들의 생애를 모든 인류에게, 모든 후손들에게 유익으로 남기고,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으로 둥실 솟아나는 하느님의 자기 본문은 이 못난 것 속에서 얼마나 크던가요! 우리의 죽어가는 인생과 우리의 못나고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인생 속에 하느님이 본문을 담으시겠답니다.

세상은 본문을 못 담죠. 마치 담아 보이죠. 문학을 보면 거기 곤혹이 있고 도전이 있고 절망이 있고 사색이 있고 감동이 있고 무슨 깊고 깊은 뭐가 있습니다. 예술을 보아도 그렇고, 철학을 보아도 그 깊은 인간의 고뇌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떤 메시지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긴 본문이 없습니다. 왜요?

본문이란 죽음을 극복해내야 되는 것입니다. 죽음에 다 굴복할 수 밖에 없으면, 무슨 사치를 하든 무슨 깊이를 가지든 그것은 그저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스도교만 본문을 가집니다. 부활을, 용서를, 회복을, 승리를, 영광을, 영생을 얘기하죠. 그걸 하느님이 우리 인생 속에 담으시겠답니다.

우린 그걸 모릅니다. 자꾸 컨텍스트 싸움을 하죠. 이사야 53장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죠. 메시아는 이렇게 임할 것이다. 그 모습은 참으로 놀라워서 그 시작이 이랬습니다.

(이사53,1-2) 1 그러니 우리에게 들려 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2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이게 예수입니다. 예수 안에 하느님이 뭘 담았죠? 세상 죄를 씻으시면 죽음으로 끝날 인생을 부활로 승리케 하시며 하느님을 떠난 폐허된 인간의 심령 속에 하느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와 화목하십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되며 우리는 그의 자식이 됩니다. 예수가 그걸 만드십니다. 그의 모습입니다. 우리에게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 그 길을 걸어야 됩니다.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길을 걸어야 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로 불러 이 세상의 조건, 현실, 구조, , 배경, 무대 속에 우리를 넣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들만이 본문을 담는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가서 가만히 계시오. 우리에게 주어진 지위와 역할을 감수하시오.

 

(필리3,10-12)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11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12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이것입니다.

 

어떤 성취가 없습니다. 벽돌을 쌓고, 쌓고 해서 성취한 업적이 없습니다. 하루하루를 살라고 합니다. “난 뒤에 것 모른다. 난 오늘을 산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오늘 내가 살아있음은 하느님이 오늘이라는 컨텍스트 속에 본문을 담으려 하신다. 그렇게 이해하라는 겁니다.

내 삶이 돌아보아 무슨 가치가 있는가? 어디까지 왔는가? 그런 건 난 모른다. 하느님이 나보고 하루 살라고 했다. 그 하루는 어떤 하루죠? 우리가 평생에 겪은 그 하루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하루고 벼락이 치는 하루. 기가 막힌 일이 일어나고 자기의 존재감이 가장 거부당하는 날이기도 한 그 날 말입니다.

거기서 하느님이 우리를 통하여 본문을 담으시겠답니다. 그렇게 본인을 이해하고 하루를 이해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 같이 오직 보이는 것으로 의미와 존재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다만 종교라는 이름으로 떼쓰는 사람에 불과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 같이 잠자지 말고 깨어 있어라, 술 취하고 방탕하지 마라가 나옵니다. 이 본문을 좀 더 확대한 것이 에베소서 5장입니다.

(에페5,8-10) 8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9 빛은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을 열매 맺습니다. 10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가려(시험) 내십시오.

 

어둠이란 뭐예요? 갈 바를 알 수 없다 이거죠. 빛이란 뭐에요? 보인다는 거죠. 뭐가 보여요? 우리 인생, 존재가 뭔지 보이는 거죠. 뭘 할 수 있다고요? 세상의 도전과 시험 앞에서 텍스트를 담아낼 수 있다고요. 컨텍스트 경쟁을 하지 않는다고요.

지위를 가져야 하고 권력을 가져야 하고 능력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일하신다를 아는 자의 인내와 성실과 겸손과 하느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자의 믿음이 빚어내는 깊이가 있을 것입니다.

매일 시험을 봤지요. “넌 뭐냐? 왜 그렇게 사냐?” 매일 현실이 우리를 와서 도전할 것입니다. “니가 열심히 예수 믿어서 얻은게 뭐냐고? 사람들이 너를 알아주냐고?” 계속 시험하고 도전할 것입니다. 무슨 효과가 있냐고?”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그렇게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억울하면 나갔다가 나중에 오시오.

예수를 믿는 것을 스스로가 납득하여 그 인생을 살 자신이 없거든. 그러면 기도하시오. 우리들이 지금 늘어놓는 그 기도 말고, 컨텍스트를 완화시켜 달라는 기도 말고, 내가 텍스트를 담아내는 존재라는 그것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에페5,15-16) 15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깊이 생각해서 미련한 자처럼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사십시오. 16 이 시대는 악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

 

매일 우리의 삶은 그냥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이 무언가 하시는 겁니다. 아직 안 보이죠. 흘려 보내지 마시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어리석은 자가 뭐에요? 자기 역할을 모르는 거죠. 자기 역할을 모르는 이주일 씨는 예전에 유명했던 코미디언입니다.

못생겨서, 써주질 않아서 유랑극단 쫓아다니고 어떻게든지 연예계에 데뷔를 하고 싶었는데, 하춘화씨가 공연하던 그 공연장에 불이 났을 때, 하춘화씨를 구원해 업고 나온 덕으로 하춘화씨가 밀어줘서 이제 데뷔를 하게 됐습니다. 간단한 단역을 맡게 됐죠. 그래 어떤 환자가 죽게 됐는데, 이제 의사가운을 입고 들어가서 눈을 까 뒤집어 보고 운명하셨습니다.” 이거 하나입니다. 일주일 내내 대사를 외우는 겁니다. 운명하셨습니다. 운명하셨습니다. 이제 시간이 되어 자기 순서에 되어서 나가서, 자기 눈 까뒤집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죠.

왜 자기 눈은 깠을까요? 연습을 했으니까. 환자가 어딨어요? 연습을 혼자 했으니까, 자기 눈을 깠죠. 계속 그러니 나가서도 그랬죠. 그리고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이주일씨가 그 시대에 우리에게 줬던 위로는 꽤 대단했습니다.

그가 그런 조건 속에서 스스로 웃을 수 있는, 웃을 수 있는 실력이 있다는 사실에 많이 위로를 받았습니다. 못생겨서 당하고 아무 연고도 없고 낙이 없다가 그렇게 대중에게 알려지고 유명해졌는데, 그 유명한 걸로 잘못하지 않고 본인의 못난 것을 이렇게 함께 은혜로 나눴던 흔치 않은 위인이었습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으로 보상을 받거나 확인하도록 보냄을 받지 않았다는 걸 아는 것은 얼마나 어려울까요? 그러나 만일 그것이 어렵고, 그것을 뚫어낼, 그것을 극복할, 예수 믿는다는 말을 그것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되기 때문에 짚고 넘어가야 됩니다. 여기서와 같이 18, 유명하죠.

(에페5,18) 18 술취하지 마십시오. 방탕한 생활이 거기에서 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야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건 방탕한 것이다. 무슨 얘기라고요? 생각 없이 넘어가자는 거죠. 세월을 떠내려 보내는 것입니다. 술 먹는 게 왜 방탕하냐? 술을 먹으면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의식이, 책임이, 자기 역할이, 시간이, 마구마구 지나가지요.

우리의 인생을 마구마구 지내 보내고 넋두리하고 분해하는 것으로 소비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작음과 억울함을 그걸 품고 하느님의 일을 해야 된다는 것은 가장 큰 지위를 가지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가지는 고뇌와 같습니다.

한 인간의 가치는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고, 그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 국가나 사회나 이상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시고 인격자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 없이 갖다 붙이는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붙였던 어떤 덕목들과 이상들도 애국이나 인류애나 무슨 희생이나 무슨 유익이나 이런 것들은 무인격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이해하고 우리 삶을 다만 착하고, 순진하고, 겸손하고, 보다 큰 하느님의 일하심을 담아내는 인격이 되는, 우리가 당한 현실을 인격이 감수해내는, 울고 한숨 쉬며 그러나 도망가지 않는,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를 통하여 기적을 이루시는, 그 인생을 스스로에게 확인하시오. 그 기적을 이루시오. 어떤 조건, 어떤 시대에도 동일한 하느님의 기적을 만나시오.

성경에서만 보는 기적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보는 기적을, 우리 인생에서 주인공이 되고 그 주인공이 되는 복()을 누리시오.

 

하느님! 우리 인생이 녹록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매순간 불평과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고, 이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성육신이 그거였죠. 십자가가 그것이었습니다. 그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고, 그리고 죽어버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길이었습니다.

거기서 하느님은 은혜와 능력과 구원과 영광과 승리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 길을, 주님께서 걸으시어 오늘 우리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 길을 뒤쫓아 십자가의 길을 걷게 하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이 원망과 분노만 있는 우리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회복과 구원을 증거하는 귀한 인생들 되게 하여 주소서.

자신의 인생을 자랑하고 명예와 승리와 영광으로 살아내는 믿음의 큰 복들도 모두의 심령에 부어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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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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