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가 아닌 존재론적(存在論的), 시적(詩的)인
복음 선포의 삶“
"날마다 새기는 다산 인생 문장 365일, 다산 어른의 하루"란 2월 주제와 2월1일 말씀입니다. 형창설안(螢窓雪案: 반딧불로, 눈빛으로 글을 읽었다는 고사에서 유래, 공부란 환경에 굴하지 않는 꾸준함이다)이 2월 주제 말씀이고, “시는 시대의 진실한 울음이다. 우리는 시를 닮기 위해 시를 읽는다”와 <시경>의 “시삼백 일언이폐지 왈 사무사(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삼백편의 시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생각에 거짓이 없다’는 것이다”라는 말씀이 2월1일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한결같은 공부의 자세와 시적인 삶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예전에 써놨던, 언젠가 인용했던 ‘시처럼 살고 싶다’란 글도 떠올랐습니다.
“시처럼 살고 싶다.
하얀 여백의 종이위에 시처럼
침묵의 여백의 시공안에 시처럼
홀가분하게 살고 싶다.
여백을 가득 채운 수필이나 소설이 아닌
시처럼 살고 싶다.”-1998.1.24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누구나의 갈망이요 소원이 “하느님의 시詩처럼 사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사실 사람 내면을 잘 들여다 보면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시인詩人임을 발견합니다. 새벽 휴게실에 들렸다가 피정 마치고 떠난 이들의 남긴 글 세편도 시처럼 마음에 와 닿습니다.
“늘 하느님을 만나고 대화하고 위로와 힘을 얻고 갑니다. 새해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수도원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요셉수도원의 수사님들을 뵈면서 많은 사랑과 위안을 체험했음에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곁에서 잘 머무르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아, 수도원은 하느님의 시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위로와 위안, 평화와 사랑을 전하는 존재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수도원 곳곳의 아름답고 사랑스런 풍경 모두가 시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은 2월 첫날, 2월4일은 입춘立春이네요. 봄이 성큼 가까웠음을 느낍니다. 아직은 겨울이지만 봄꿈을 꾸는 겨울나무들처럼 보입니다. 며칠전 인용했던, 한동안 행복해 했던 “봄길”이란 시를 봄길 사진과 더불어 어제도 두분과 나눴습니다.
“한겨울 봄꿈을 꾸고나니
봄길이 열렸어요.
봄향기 맡으며
봄님 에수님과 함께
봄빛을 받으며
봄길을 하늘길을 걷습니다”-2024.1.27.
이에 대한 두편의 답글도 시적詩的입니다.
“예, 저도 봄꿈을 꾸고 봄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런 간절한 희망을 갖습니다. 아름다운 시, 감사합니다.”
“이 시를 읽으며 위로를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같은, 시같은 예수님입니다. 봄꿈이 상징하는바 하느님의 꿈입니다. 예수님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꿈이자 실현입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바라보며 참으로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실현했습니다. 하느님의 무인武人이자 동시에 시인詩人이며 예인藝人이었던 다윗이 아들 솔로몬에게 죽음에 앞서 남긴 유언도 아름답기가 시적詩的입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다윗은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성에 묻히니 죽음도 시적詩的이고, 솔로몬이 뒤를 이어 왕권이 튼튼해지니 끝까지 보속을 다하고 거룩한 시적詩的인 죽음을 맞이한 다윗을 통한 축복이 계속됨을 봅니다.
꿈중의 꿈이 하느님의 나라 꿈이고, 희망중의 희망이 하느님 나라의 희망입니다. 살아있다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꿈과 희망이, 하느님 나라의 꿈과 희망이 생생할 때 비로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생생히 꿈꾸며 복음 선포를 통해 그 꿈과 희망을 실현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런면에서 예수님의 삶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꿈도 희망도 보고 배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꿈과 희망을 보고 배웠을 것이며,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인 예수님만으로 행복했을 것입니다. 이런 주님과 함께 했기에 자발적 가난의 자유롭고 부요하고 행복한 삶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무소유의 단순한 모습으로 파견되는 다음 장면의 묘사가 참 아름답고 완벽하고 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예수님의 신뢰와 희망과 사랑을 가득 담고 파견되는 제자들은 부족한 것 같으나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텅 빈 충만의 느낌입니다. 소유로부터 완전 자유로워진 존재의 삶이요 본질적 가난의 삶입니다. 이런 무소유의 삶을 가능케 한 것은 곳곳에 자리잡은 착한 신자들의 환대 덕분이요 이런 환대 역시 참으로 아름다운 시적 자세에 속합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복음 선포의 자세도 거칠 것이 없고 홀가분하고 창공을 나는 새처럼 참으로 눈부시고 자유롭고 힘차보이니 그대로 하느님의 시같은 삶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오늘 복음과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와 더불어 우리를 치유해주시고 당신의 권능으로 충만케 하시어 우리 모두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