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의 2월 2일 주님 봉헌 축일(1): 루카 2, 22 - 4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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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기승 | 작성일2024-02-01 | 조회수147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인 동시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제정하신 수도자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축성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흔히 수도 생활을 축성 생활 혹 봉헌 생활(Vita Consecrata)이라 칭합니다. 이처럼 수도 생활을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축성 생활이라고도(=하느님 측면에서)하고, 봉헌 생활(=인간 측면에서)이라고도 합니다. 즉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수도자가 자신의 전 존재를 자발적으로 봉헌(=바치는 삶)하면, 하느님께서는 이를 사랑으로 기꺼이 축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축성 생활의 날을 맞으면서, 비록 수도자는 아닐지라도 주님의 봉헌에 비추어 과연 우리는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했으며, 그것도 온전히 거듭해서 바쳐드리며 살고 있는지 반성해 봐야겠습니다. 저 자신 길지 않은 봉헌 생활을 살아왔지만, 아직도 온전히 바치면서 나날이 비우고 또 비워서, 죽고 또 죽어서 참으로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가 성찰해 봅니다. 봉헌된 세월만큼 주님 앞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고 있지 못한 저 자신을 제가 더 잘 알고 있기에 다시금 봉헌합니다. 오늘 축일의 복음에서, 루카는 봉헌 생활의 참된 모범으로 시메온 예언자를 우리 모두에게 제시합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무엇보다도 한평생 하느님께 충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수도 생활에 있어서 봉헌 역시 한때가 아니라 평생을 봉헌한 삶이어야 하며, 봉헌 생활은 단거리 경기가 아닌 마치 장거리 달리기와 비슷합니다. 이처럼 한때 열심한 봉헌 생활이나 신앙생활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충실한 존재이고 충실한 삶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시메온의 덕목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의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사람이며, 주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2,25)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가 이런 삶을 살았기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찬미와 영광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으며, 마침내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뵈옵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2,29~32참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 「봉헌 생활」에 의하면, 수도자의 표상은 마치 타볼산의 『변모의 신비 안에서 그리스도의 빛나는 얼굴을 바라보아야 한다.』(14항) 라고 권고합니다. 교회 초기의 모든 영성적 전통은 관상 생활을 ‘산 위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연결하였으며, 어느 면에서는 봉헌 생활의 활동 차원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결국 수도자란 변모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분을 만나고 체험하면서 주님을 따르며 서원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하는 존재입니다. 수도자는 끊임없이 ‘산을 올라가는 것= 기도 생활’과 ‘산을 내려오는 것=활동 생활’, 즉 고독과 친교, 물러남과 나아감의 조화와 균형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런 조화와 균형 잡힌 삶의 양식을 통해서 수도자는 교회의 교계적 신분은 아닐지라도 “교회의 생명과 성화의 신분”(교회헌장 44항)으로써 교회 내의 고유한 위치를 자치하게 됩니다. 성녀 대 데레사가 말한 것처럼 『수도자가 없다면 교회와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자서전32-11) 이에 대해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복음의 증거 3항>에서 『봉헌 생활 같은 구체적인 표징이 없을 때 교회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랑은 식어지고, 복음이 전하는 구원의 역설은 무디어지며, 세속화로 치닫고 있는 세상에서 신앙의 ‘소금’은 그 맛을 잃게 될 위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라고 피력하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에게 자신을 완전히 봉헌할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 교회는 주님 봉헌 축일을 맞아 1년 동안 교회와 가정에서 사용할 초를 축복합니다. 초가 상징하는 의미처럼 자신을 태워 온 누리에 그리스도의 빛을 밝히는 촛불처럼 수도자들이 생활하고 활동하는 모든 곳에서 모든 시간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봉헌함으로써 교회의 생명과 성화의 신분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여러분과 함께 생활하고 활동하는 남녀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축하해 주길 바랍니다. 코로나도 이제 잠잠해졌기에 작년과 달리 여러 수녀회에서 서원식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기도 가운데 꼭 기억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다만 저를 포함한 모든 수도자에게 코헬의 이름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못난 선배들 탓하지 말고, 다음 권고를 다시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네가 하느님께 서원한 바를 채워라. 서원을 하고 채우지 않는 것보다 서원하지 않는 것이 낫다.” (5,4) 다시금 강조하지만, 진정한 봉헌은 주님께 받은 것을 주님께 온전히 되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 드렸던 참된 봉헌의 모범은 아브라함과 성모님이십니다. 자신과 가족의 희망의 전부였던 ‘이사악’을 하느님께 봉헌한 아브라함, 하느님의 영으로 잉태하시고 낳으신 아드님 예수님을 아무 조건도 없이 봉헌하신 성모님은 우리의 본보기이십니다. 성가 221장의 이냐시오의 <받아주소서>는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통해 우리가 살아야 할 참된 봉헌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성가, 곧 기도입니다.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과 지력 나의 의지 소유한 모든 것을 주여 당신께 드리나이다 이 모든 것 되돌려 드리오리다 내게 주신 모든 것 주의 것이오니 오직 주님 뜻대로 처리하소서 당신 사랑은총을 나에게 주시면 바람 없으오리다. 주여 나를 온전히 받아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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