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로마서45)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로마16,17-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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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 작성일2024-02-05 | 조회수18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24. 2. 5. (월요일) 로마서45)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로마16,17-27) 17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배운 교훈과는 달리 남들을 분열시키고 죄짓게 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18 그런 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 뱃속을 채우고 있으며 그럴 듯한 말과 아첨하는 언사로 순진한 사람들의 마음을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19 여러분의 충성스러운 신앙생활이 사방에 잘 알려져 있어서 나는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는 현명하고 악한 것에는 물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20 평화를 주시는 하느님께서 사탄을 여러분의 발 아래 굴복시켜 주실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의 은총이 여러분에게 내리시기를 빕니다. 21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디모테오와 내 친척들 루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르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22 이 편지를 받아 쓰는 나 데르디오도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문안드립니다. 23 나와 모든 교우를 잘 돌보아 주는 가이오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이 도시의 재정관 에라스도와 교우 과르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내가 전하는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을 통해서,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 두셨던 그 심오한 진리를 나타내 보여주심으로써 여러분의 믿음을 굳세게 해 주십니다. 26 그 진리는 이제 예언자들의 글에서 명백하게 드러났고 영원하신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모든 이방인들에게 알려져 그들도 믿고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27 이러한 능력을 가지시고 지혜로우신 오직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빕니다. 아멘. 오늘 본문은 16장 전체입니다. 편의상 17절부터 읽었고 그 앞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며 사도 바오로가 이 편지를 받는 로마 교회에 이 사람들을 호의적으로 소개하고 기억하고 함께 감사를 나누자고 여러 이름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아주 좋은 영화를 봤을 때 그 영화가 끝나고 불이 들어와도 안 나가고 자리에 서서 그 여운을 즐기는 장면 같습니다. 자막이 나오죠. 화면은 더 이상 영상이 아니라 그냥 자막, 제작, 감독, 주연, 조연, 그 다음에 엑스트라들 그리고 화면에 안 나왔던 사람들이 소개됩니다. 촬영, 조명, 밥집 아줌마, 운전기사 이런 것들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역사에도 위인과 주인공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 안 되는 일과 기억할 필요 없는 사람들이 있고 그 모든 것으로 역사와 지금이라는 현실이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의심하거나 거부한다고 역사가 바뀌지 않듯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결정과 혹은 외면이 미래를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다만 체념이나 외면 같은 것으로 비겁하게 살 수는 없다. 이것이 로마서 16장이죠. 여기 나열된 사람들은 중요한 사람들이 아니고 또 뒤집어보면 바오로가 일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한 손씩 보태준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아니고 결정적인 사람들인 것이죠. (로마16,17) 17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배운 교훈과는 달리 남들을 분열시키고 죄짓게 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들을 말하자면 우리의 긍정적인 책임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여기 나온 이런 말들은 이런 로마서가 가지는 큰 그림, 가장 중요한 접속사가 3장 21절에 있는 ‘그러나’ 였습니다. 예수 안에서의 구원, 인간이 자초한 파멸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그러나’ 그리고 인류의 운명을 바꾼 3장 21절이 있다면, 12장 1절에 ‘그러므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는 외워두고 잊지 않아야 될 ‘그러므로’입니다. 한번 찾아보시죠. (로마12,1)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자비하심으로 권하는 넉넉함, 넉넉한 관용과 베품을 근본적인 본질로 담아 신앙은 요구되는 것입니다. 날이 시퍼런 구별, 분명함, 완전 이것을 다 담은 ‘그러나’로 시작된 우리가 해결할 수 없었던 우리의 운명, 우리가 자초한 멸망에서 그것을 구원하신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과 지혜와 자비의 넉넉함으로 권하는 것이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존재며 인생이며 운명인 것입니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한 이분법으로 자꾸 좁아지지 마시오. 그 분명한 것이 하느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분명해졌다는 걸 알아 마음껏 열어 놓으라고 이 많은 사람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나열하고 있죠. 본인이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다. 예수로 구원한 존재의 운명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느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니’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12장에선 이렇게 됐었죠. (로마12,14-21)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 주십시오. 15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 주십시오. 16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십시오. 그리고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18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19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 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20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 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 21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 내십시오. 놀라운 이야기였죠. ‘악을 제거하는 것, 심판하는 것, 징벌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 아니라, 거기에 시험 받지 말고 그 싸움 하지 말고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선한 역할을 하라’ 입니다. 우리는 이 일이 만만치 않습니다. 선한 역할을 하려면 굉장히 능력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나열한 이 이름들은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깨우칩니다. 우리 잘 아는 예를 들어서 벤허죠. 벤허라는 영화, 물론 주인공은 당연히 벤허입니다. 벤허 혼자 나오면 영화가 성립이 안 되고 스토리를 담아낼 방법이 없습니다. 상대역이 있어야 됩니다. 악역 멧살라, 따지고 보면 벤허는 멧살라가 죽은 다음부터는 재미없습니다. 그 뒤는 설교가 되거든요. 알아들었어요? 거기를 자르자고요. 아 그렇게 하지 말고 그 뒤에 설교가 힘을 얻는 것은 멧살라 덕입니다. 거기서 벤허 하십시오. 그런데, 그 당시에 벤허를 제작할 때 원래 제작진에서 그 역할을 제안한 상대는 록 허드슨이었습니다. 록 허드슨은 미국 최고의 대표적인 미남입니다. 우리가 아는 미남을 넘어서 미국식 미국 규격에 맞는 미남입니다. 크죠. 자이언트라는 영화에도 나왔던 멋진, 미국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거절했습니다. 굉장히 비싼 개런티를 약속했는데 거절했죠. 굉장히 잘한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거기를 멋진 배우가 맡았으면 우리는 스토리를 읽지 않고, 벤허 사진만 갖고 돌아다녔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못생긴 거는 굉장한 깊이를 가지게 됩니다. 그렇게 말을 해도 맞나가 그런 배우 중에 하나가 더스틴 호프만입니다. 아시죠? 모건 프리드만이죠. 못생겨서 사람들이 그 사람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연기에 몰입됩니다. 찰턴 헤스톤이 벤허를 맡은 것은 거의 예정의 수준인 것입니다. 그 사람만큼 스토리를 잘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었으니까요. 우리 자신의 조건에 대하여 불만하지 마시오. 하느님께서 무얼 담는가의 문제입니다. 욥기에 이용했던 이런 시가 있습니다. ‘밤은 천개의 눈을 가진다. 낮은 하나의 눈을 가질 뿐이다.’ 왜요? 낮엔 보이는 것이죠. 보이는 것이 전부 다 형태를 보는 거, 형태를 보는 것이고, 밤엔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분명해야 메시지를 담는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 손 안에 있는 신비입니다. 또한 벤허에는 수많은 엑스트라가 있습니다. 조역에도 못 올라오는, 대표적인 그 엑스트라는 벤허가 잡혀 노예선에 끌려가던 길에 간수에게 지시된 “저놈은 모질게 다뤄라.” 때문에 고생을 하고 맨발에 부르터 입이 허옇게 말라 광야 길을 걷다 우물을 만납니다. “물 한 잔씩 먹여라. 단 저놈은 주지 마라”에서 죽어나는데 예수님이 등장하죠. 뒷모습만 보입니다. 물 한 바가지 담아주죠. 그걸 먹으려는데 간수가 와서 걷어차고 “그 놈은 주지 말래니까.”라고 고함칩니다. 뒷모습으로 보이는 예수님이 일어서고 쳐다보십니다. 그 간수의 표정을 기억하십니까? 눈부신 듯, 부끄러운 듯, 녹아들 듯, 뒷걸음치고 고개를 떨구던 모습 말입니다. 그걸 기억 못하면, 우린 아직 벤허의 비읍도 입문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들이 영화를 만드는 거죠. 살을 찌우고 깊이를 만들고 정황을 만들어 벤허의 승리와 결국이 무엇을 담아내는지 옆에서 효과를 한 손을 보태는 것입니다. 그러니 벤허가 끝나면 자막에 다 나오죠. 벤허의 찰턴 헤스톤, 멧살라의 멧살라가 누구였나요? 좀 나오죠. 간수의 누구, 뒷모습만 나온 예수님의 역할은 누구, 이렇게 다 나오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이 문득 예수님의 뒷모습일 수 있다는 걸 알겠습니까? 안 믿어지는 표정들을 하니까, 이사야 53장입니다. (이사53,1-2) 1 그러니 우리에게 들려 주신 이 소식을 누가 곧이들으랴? 야훼께서 팔을 휘둘러 이루신 일을 누가 깨달으랴? 2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이사야 53장의 그 깊이는 메시야가 와서 어떤 고난을 받을 것인가에 관한 예언입니다. 정확히 이 예언이 다 맞아떨어지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 누가 보냈는가, 어떤 약속의 성취인가, 인류에게 어떤 운명을 만들었는가, 이것을 신적 의지와 약속으로 확인시킵니다. 내용은 자주 놓칩니다. 그의 고난은 어떤 내용을 가지는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떤 하느님인가를 보입니다. 신약적 표현으로는 필리피서 2장 5절에서 9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이쪽을 강조하는데, 강조하는 쪽이란 뭐냐? ‘인류 모두가 처한 상황까지 온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위에서 힘으로 붙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와 동참하여 우리를 항복시킵니다. 거기에 들어옵니다. 어떤 모양으로? ‘연한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다고. 모양도 풍채도 없어 흠모할 것이 없는’ 모습으로. 하느님의 일하심의 구체성, 인류 모두를 품는 넓이가 여기 증언됩니다. 우리들이 가지는 억울함, 열등감, 자책, 자폭, 그 자리까지 오십니다. 예수가. 우리는 예외이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성육신을 이해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그 대표적 신앙 고백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약 유대주의에서도 유일하신 야훼 하느님, 그리스도교에서도 유일하신 야훼 하느님을 믿는데 왜 신약에 와서는 그것이 그리스도교가 됐을까? 하느님을 믿는다는 표현이 왜 예수를 믿는다로 바뀌었을까? 하느님의 자기 설명의 구체성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야훼 하느님의 자기 설명의 구체성, 예수, 우리가 알 수 있게, 볼 수 있게, 이해할 수 있게까지 찾아온 하느님의 성의, 하느님의 내어줌, 내려오심, 유대인들은 아직도 하느님을 섬기지만 우리는 그 하느님을,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구체적 통치, 그 은혜의 내려오심을 말이죠. 그걸 갖고 있지요. 그 내려오심과 그 찾아오심, 하느님의 자신의 설명을. 자신의 자랑은 우리 모두를 품는 데 있습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그 은혜와 부르심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성육신이죠. 33년을 삽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시간과 공간과 이웃과 정치, 사회, 개성 속에, ‘나는 억울해’에 묶이십니다. 그가 공생애 속에서 이 세상이 만들 수 없는 초월적인 힘을, 전능자의 권력을, 그 지위를, 그 영광을, 문득문득 나타내지만 자신의 인생을 면제받기 위하여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배신을 당하고 오해를 받고 욕설과 수치와 고난 속에서 죽으십니다. 죽음의 자리, 배신의 자리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다 품어내는 것, 그것이 성육신입니다. 그 예수를 믿는 자들이 ‘나는 억울해. 나는 외면당한 것 같애. 나는 아닌 것 같애.’는 얼마나 무지(無知)한 말인지 모릅니다. (아사53,3) 3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우리가 누구와 얘기할 때 제일 많이 하는 얘기이어야 됩니다. 정답 말고 “너 그래봤자 소용없잖아. 니가 견뎌야 돼.” 그 말 하지 말고, “난 니 고난 알아.” 이게 제일 고맙죠. “너 어렵겠다.” 그 말을 해야죠. 아무나 못하죠. 누가 내 고난을 알아만 주면, 내가 얼마나 가슴 아픈지를 이해만 해주면, 아니 한 발 더 양보해서 들어만 줘도 견딜 것 같지 않아요? 그게 성육신이래니까. 듣기만 하신 것도 아니고 해결을 해주신 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하느님이 구체적으로 품으시는 것 성육신입니다. 우리가 무얼 해야 되고 만족시켜야 되는 것은 명예에 관한 일입니다. 믿음에 속한 우리의 자랑이고 영광이지, 조건으로는 요구되지 않습니다. (아사53,4-6) 4 그런데 실상 그는 우리가 앓을 병을 앓아 주었으며, 우리가 받을 고통을 겪어 주었구나.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은 줄로만 알았고 하느님께 매를 맞아 학대받는 줄로만 여겼다. 5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 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 주었구나. 6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 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우리 때문에 억울한 짐을 지셨다. 우리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다. 그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받아야 되는 그 못난 자리까지 내려오셨다. 그런 얘기입니다. ‘채찍에 맞을 자리까지, 비난을 받는 그 못난 자리까지, 당신이 받지 않을 비난의 자리, 우리가 늘 받는 당연히 받을 비난의 자리까지 내려오셨다.’ 성질 부리세요? 그럼 어떻게? 살살 해? 그 미련함과 무지함이 평생 나를 잡아 늘 억울하게 했거든요. ‘하느님 억울합니다. 나 진심이었는데,’ 이게 뭡니까? 그게 제 발목을 잡아서, 우리가 가지는 원한과 우리가 가지는 원망 속에서 하느님이 “너 악역 맡지 마라.” 그러신다니까요. 아니 해결을 해줘야 멋있는 걸 알지. 너 그 자리에서, 거기서 웃으세요. 머리가 다 가려. 거기서 웃어라. 너 거기서 악에게 지지 말고 너 선한 역할 해라. 할 수 있을까요? 능력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하느님이 일하시는,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그만이 아실 수 있는 영광이라는 걸 알아야 돼요. 우리가 가장 억울한 자리에서 가장 할 수 없는 것을 감수한다면 모두가 은혜를 나눕니다. 우리가 다 가지고 모든 것을 알아서 정답을, 고함 지르면 모두가 외면합니다. ‘모두에게 정답을 말해. 모두를 내 마음에 들게 말해.’ 자기 편안하려고 그러는 것 외에 아무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 길 가지 마시오. 사람들이 우리를 만나면 사람들이 우리를 반가워하게 하시오. 만나는 게 기쁘게 하시오. 뭘 가져서 그걸, 아님 없는데 해야 됩니다. 없으면서 해야 그게 무엇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그걸 알고 있지 않으면 신앙생활은 할 수가 없지요. 악역 아닌 악역을 맡게 되지요. 잘난 싸움이 되고 치열한 싸움에 불과하지요. 품고 일어서고 지고 견디는 싸움을 할 수가 없어요. 해결을 하려면 그렇습니다. 우린 해결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을 영광된 역할로 살아낼 것입니다. 하느님이 내 조건 내 처지로 일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일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그건 하느님 손에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은 1절 이후에, 물론 뒤를 이어서 이런 신기한 말까지 이어집니다. (로마12,2-3) 2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3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 2절에 세상과 하느님의 일하심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세상은 죽이는 싸움을, 죽이는 요구를 하고, 하느님은 살리는 요구를 합니다. 살리는 요구, 이 역할을 하십시오. 그래서 3절에 ‘나서지 마라. 너 할 일 해라.’ 우리로선 지금 내 역할과 내가 묶여있는 컨텍스트가 무얼 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늘 알 수가 없습니다. 벤허, 늘 알 수가 없죠. 노예선을 견딘 건 신앙이 아니고 희망도 아니고 복수심이었죠. 단 하나 복수심으로 버티는 겁니다. 죽을 수 없죠. 그때 살아남아야 되는 것이죠. 그가 그런 우여곡절 끝에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갖고 돌아올 수 있게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그땐 모릅니다. 배우에서 제일 중요한 장면, 어머니와 여동생이 잡혀갔을 때 멧살라를 만나 풀어달라고 얘기하고 멧살라의 거부로 자기까지 잡히고 도망쳐 나와 창 들고 대든 장면이라 그랬죠. “풀어줘. 안 풀어주면, 죽일 거야.” 멧살라가 일어나 외쳤다 그랬죠. “찔러. 날 죽이면 네 어머니와 동생이 풀려날 수 있어? 날 찌르면 다 죽을 거야. 찔러.” 찌르면 안 돼요. 왜? 영화가 끝나요. 알아먹으세요. 죽이지 마세요. 그 창을 꽂으세요. 하느님이 일한다는 거 아세요? 작가가 있어요. 작가가. 주제 넘게 자기가 작가가 되지 마세요. 자기 역할을 하세요. 멋있게 하세요. 그러니까 신약 성경은 매 서신서에서 동일한 권면을 합니다. (에페4,25-32) 25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한 몸의 지체들입니다. 26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 됩니다. 27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28 도둑질하던 사람은 이제부터 그런 짓을 그만두고 제 손으로 일하여 떳떳하게 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29 남을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 30 마지막 날에 여러분을 해방하여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을 보증해 주신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여 드리지 마십시오. 31 모든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소리와 욕설 따위는 온갖 악의와 더불어 내어 버리십시오. 32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게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윤리, 도덕이 아니에요. 명예로운 역할을 맡으세요. 하느님의 자기 자랑을 기억하세요. 죄인들을 참아서 자기를 내어주셔서 항복시키는 하느님의 자기 자랑, 자기의 영광을 기억하세요. 예수를 믿고 인생을 사는 것은 그 영광과 명예를 누리는 길이다. 기억하세요. 상대나 상황이 억울할 때 웃으세요. 침묵하세요. 양보하세요. 우리 평생에 다른 것으로 얻지 못했던 명예를 가지게 됩니다. ‘인간이란 과연 하느님의 창조물이구나’라는 걸 알게 됩니다. 힘으로 이기면 영혼은 말라버립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의 인생을 자랑으로 채우기 위하여 성경의 말씀을 따르십시오. 웃음에 조롱을 담지 마시오. 웃음의 친절과 기쁨을 담으시오. 우리 존재가 비난과 두려움이 되지 마시오. 멋있으시오. 우리의 인생을 고함 지르지 않고 웃으며 기뻐하며 살겠습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반가워하게 하겠습니다. 뭘 해결 하겠습니까만 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 내 옆에 있는 사람들 나와 묶어준 사람들 앞에 저희는 기댈 수 있는 나무가 되고, 와서 그네를 매는 나무가 되고, 우리를 보면 반가워하는 인생이 되겠습니다. 그 명예를 놓치지 않는 우리 인생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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